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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S) 열등감이 살기를 띠게 될 때_태승철 (누가복음 11:47~5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2.14|조회수5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열등감이 살기를 띠게 될 때>의 줄거리: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사. 모두 이스라엘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변방의 일개 목수 출신 랍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살기가 등등합니다. 믿음의 적인 열등감 때문입니다.

 

열등감이 살기를 띠게 될 때

(누가복음 11:47~54)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열등감이 살기를 띠게 될 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열등감이 살기를 띠게 될 때’

십자가 복음방송을 오랫동안 듣는 분들을 실제로 만나면서 쌓인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 경험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는 당당함이고 두 번째는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당당함과 관련하여 미국에서 만난 여자 집사님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기 시작한 이후로 변화된 모습을 “저보다 없는 여자도 못 봤고, 저보다 못 배운 여자도 못 봤지만, 저보다 당당한 여자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꼭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을지라도 십자가 복음방송을 듣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분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고백과 특징은 바로 이 세상을 향하여 갖게 되는 당당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당당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죄인 됨을 고백함으로써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이 세상을 향해서는 당당할 수 있습니다.

또 세상에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모든 조건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스팩, 부유함, 사회적 직책 같은 것들이 실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는 간증을 반복해서 접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열등감은 자신을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존재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인 정의는 열등감이 주는 폐해를 제대로 제시하고 있지 못합니다. 열등감의 근원적인 뿌리는 절대 결핍입니다. 단순히 누구와 비교하여 부족함을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적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더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절대 결핍입니다. 바로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자 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마음 공백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절대 결핍을 만듭니다. 이 절대 결핍에서 열등감은 생겨납니다.

다만 절대 결핍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소망과 욕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고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보일 수 있는 사랑의 형태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절대 결핍으로부터 생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에 믿음인 것이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을 갖고자 소망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끼어들어서 이 절대 결핍을 왜곡시켰습니다. 이 절대 결핍의 원인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지 못하게 했습니다. 세상에서 절대 결핍의 원인을 찾도록 의식의 시선을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의식의 시선이 세상에 갇히게 되면 마음 채움의 대상을 세상에서 찾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붙잡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또한 마음의 절대 결핍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마귀에 의해 의식의 시선이 세상 안에 가두어지고 국한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의 가치들 중에서 결핍을 채울 대상을 찾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돈이라는 대상이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고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돈은 추구하는 대로 가질 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갖고 어떤 사람은 적게 갖게 됩니다. 여기서 열등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처럼 열등감이란 상대적 결핍에 앞서 절대적 결핍에 근거합니다. 절대 결핍에서 발생하는 욕구와 의식이 세상에 갇힐 때 열등감으로 왜곡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열등감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의 원인이 절대 결핍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상대적 결핍의 영역에서 원인을 찾기에 열등감은 해소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 많이 가졌다고 느낄 때는 열등감의 연장선상에서 우월감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월감은 열등감이 극복된 상태가 아니라 더 악화된 상태입니다. 우월감을 느낀다고 실제로 우월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열등하고 무가치한 상태에 있음에도 스스로 우월하다 착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열등감을 극복하고 우월감을 얻으려는 모든 노력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짐 지게 만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에 대한 저주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율법교사는 본래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침으로써 세상 짐을 벗겨주는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상을 탐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세상을 얻는 수단으로 변질시켰고, 이들의 가르침 또한 세상 짐에 율법이라는 짐까지 얹는 형국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저주의 선언을 마치신 예수님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힐문하고 따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등감이 극대화되어 살기를 띠게 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열등감 없이 사는 하루를 그리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 결핍이 채워지면 세상을 향하여 당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못 배웠어도 상관없습니다. 인물이 못났어도 상관없습니다. 직책이 낮아도 상관없습니다. 절대 결핍이 채워지면 당당함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본 날이 몇 날이나 있었을까요?

본문 49절을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라는 표현이 학자들을 고민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일렀으되’라고 말씀하셨다면 말 그대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셨다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하나님의 지혜’를 언급하십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하나님의 지혜의 내용에 따르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혜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사람들은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스스로 짐을 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지혜를 발동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와 사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절대 결핍을 왜곡하여 열등감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 짐을 벗는 것을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였던 것은 그들 나름대로는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 생겨난 절대 결핍은 마귀에 의해 이 세상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상에 있는 가치들을 붙잡아서 결핍을 해소하고자 하게 됩니다. 사업이나 건강 혹은 가족의 형통 등을 붙잡는 것이 일반적이고, 목회자는 목회의 성공과 큰 예배당 건축이나 수적인 부흥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고 인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가치를 붙잡은 마음은 너무나도 절박하고 절실합니다. 절박하기에 무거운 짐을 지고도 무겁다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짐을 감당하기 위해 또 다른 짐으로써의 율법도 지켜나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나 사도들은 세상의 짐을 벗으라고 요청합니다. “돈을 벌려고 애쓰지 않아도 필요한 만큼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자녀를 형통하게 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녀는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에 놓여있다. 자녀의 형통을 바라며 온갖 율법을 지킬 것이 아니라 자녀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만 일깨워주면 충분하다. 자녀 스스로가 자신을 향해 갖고 계신 주권에 맞추어진 삶을 살 수 있게 만들어주라.”라는 것이 선지자와 사도들의 요청이었습니다. 사업에 대해서도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짐을 벗고 마음 공백은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피해의식과 손해의식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하였습니다. 이들의 말대로 했다가는 삶이 망쳐진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절대 결핍이 왜곡되어 나타난 열등감이 세상의 가치들을 붙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기 위해 돈과 자녀의 형통과 건강과 출세와 형통 등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멈추라고 하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열등감은 살기로 변하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누구나 마음의 결핍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마귀에 의해 절대 결핍은 왜곡되었고 사람들은 이 결핍이 하나님이 없어서 생기는 절대 결핍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세상의 가치로 절대 결핍을 채우고자 하게 되었고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바꾸기 위해 1등을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돈에서 1등을 하고 싶어 하고, 부모는 자녀양육에서 1등을 하고 싶어 합니다. 건강하고 장수함에서 1등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선지자와 사도들은 그 길을 가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그 짐을 벗어버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를 얻는 것만이 열등감을 극복하고 기쁨과 행복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라 믿는 사람들은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우월해지는 것이 그렇게 싫은가? 내가 잘난 사람이 되겠다는데 그렇게 못마땅한가?”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의 요청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진짜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요청을 성공하는 인생을 빼앗기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열등감의 반대인 우월감으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 결과 절대 결핍의 왜곡형태인 열등감이 극한으로 치달아 살기를 띠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의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세상 짐을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져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바람 같은 영이시기에 질수록 오히려 가벼워지게 됩니다. 세상 짐은 지면 질수록 무거워지는 것과는 반대입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짐을 지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양육의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결혼한 부부는 배우자에 대한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젊은이들은 결혼이라는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사장님은 회사라는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은 나라살림에 대한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학생은 공부의 짐을 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와 반대의 소리를 합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나라살림을 잘해야만 역사에 남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장은 회사를 잘 운영해야만 이득을 많이 남길 수 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잘 양육해야만 남보다 훌륭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요청은 모두 절대 결핍의 왜곡 현상인 열등감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부모에게 자녀의 짐을 지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듣기 싫어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어떤 집사님의 말씀을 드려봅니다. 이분은 치과 의사로 두 아들을 두고 계셨습니다. 첫째 아들은 하버드 대학에 다니고, 둘째 아들은 예일 대학에 다녔습니다. 대단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이 하버드 대학에 다니던 중에 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분과 상담을 하던 중에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절대 안 된다며 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 맡긴 결과 하버드에 들어간 첫째 아들이 죽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도둑질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 집사님께서는 첫째 아들을 사고로 잃었으므로 둘째 아들은 절대 하나님께 맡길 수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그것을 자식사랑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또한 열등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아들 둘로 채워보려고 하였습니다. 첫째가 죽었으니 이제 둘째에게 모든 것을 걸고 마음을 채울 수밖에 없다는 공허한 심정이 드러난 것입니다. 둘째 아들만큼은 하나님께 맡길 수 없다는 외침은 “나는 아무것도 못 가진 자입니다. 나는 없는 자입니다. 나는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둘째 아들이라도 붙잡고 살아야 되겠습니다.”라는 절대 결핍에서 비롯된 왜곡된 열등감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한 예로써 의외의 인물을 언급하십니다. 아벨과 사가랴를 예로 드셨습니다. 유대인의 성경 배열을 보면 창세기가 제일 먼저이고 역대기가 마지막입니다. 창세기에 아담 타락 이후 아벨은 가인에 이어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고, 사가랴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서 역대기에서 순교를 당한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아벨은 제사를 드린 후에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고, 사가랴는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둘 다 제사와 연관되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제사가 일반 종교의 제사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일반 종교의 제사는 이 세상 것을 붙잡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곧 열등감에서 탈출하고자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 제물을 잘 드시고 저의 결핍과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세상 것을 잘 이루게 해주시옵소서. 세상 짐을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라는 심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 종교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이와 반대입니다. “제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 열등감을 느끼게 되었고,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세상 것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하나님만으로 채워져야 되기에 이러한 나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짐을 지게 된 나는 하나님만을 소원해야 하는 의무를 이탈하였습니다. 이러한 나는 여기 제물로 바쳐진 양처럼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마음가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의 제사가 죄악 된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기 위하여 절대자의 능력을 빌리고자 뇌물을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열등감에 찌들어서 세상 것을 소원하고 있는 죄악 된 나 자신을 제물과 동일시하여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기에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양과 다르게 농산물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곡식을 드리는 제사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곡식을 나와 동일시하여 죽인다는 의미에서 가루로 만들어 바쳤던 것입니다. 문제는 가인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에 세상 것을 소원하는 죄악 된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세상 것을 소원하는 마음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갖지 못하게 된 절대 결핍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가인은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관철시키고자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제사가 아닌 종교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한편 아벨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충실하였습니다. 제물로 바쳐진 양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가짐을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미 아담이 타락한 이후였기 때문에 제사 또한 타락으로 인한 마음 공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에덴에서 쫓겨나서 하나님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로 세상 것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악한 유전적 기질을 타고난 나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오니 이 양이 죽은 것처럼 나도 세상에 대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마음가짐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사가랴의 죽음도 마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가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선민들은 바알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바알 숭배는 단순히 바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풍요와 다산을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사가랴의 요청 또한 결국 세상 것을 소원하지 말고 하나님을 소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열등감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열등감은 곧 지금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는 절실함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해서라도 풍요와 다산으로 마음을 채우고 싶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돈 좋아하지 말고 부자 되기를 소원하지 말라고 하니 화가 난 사람들은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사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처럼 열등감은 사람을 절실하고 절박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조금만 영향이 생길 것 같으면 발끈하게 됩니다. 살기를 품어 죽이고자 하고 형편상 죽일 수도 없다면 등지고 떠나고자 합니다.

결혼 이야기만 나와도 발끈하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나이는 찼는데 결혼을 못한 것이 열등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차든 결혼을 못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결혼은 열등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절대 결핍을 결혼 문제와 연관 짓게 되면서 열등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절대 결핍을 돈 문제와 연관 짓게 될 때 열등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절대 결핍을 자녀 양육과 연관 짓게 될 때 열등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결혼 문제에서 손 떼라, 돈 문제에서 손 떼라, 자녀 문제에서 손 떼라, 사업 문제에서 손 떼라고 하면 발끈하게 됩니다.

사회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가 유대인 육백만 명을 죽이게 된 원인 또한 열등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열등감을 가진 자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 권력은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일에 쓰이기 마련입니다. 열등감이 내 인생을 망치고 나와 연관된 모든 인간관계를 망칩니다. 열등감은 늘 불안에 쫓깁니다. 한편 당당하면 너그러워집니다. 당당하면 여유가 생깁니다. 당당하면 창조적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되돌아가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고자 노리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또한 열등감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요? 선지자와 사도들의 요청은 결국 성전 생활화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존재의미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으로 완전히 이관되었습니다. 성전의 중앙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말 그대로 지극히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들어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지성소 바깥의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성도의 기도 즉 구하고 찾고 두드림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고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떡상은 배부름 즉 만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이유는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만족하기 위함입니다. 금촛대는 밝음 즉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평강의 빛이 발산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성소 바깥에는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번제단은 하나님 이외의 세상의 가치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된 마음이 죽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기에 살아가는 동안 세상에 시선을 향하게 됩니다. 순간이라도 돈을 바라볼 수 있고 자녀의 형통을 바라볼 수 있으며 건강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지극히 거룩한 곳에 하나님 이외의 이름이 들어왔음을 인식하고 그러한 대상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자 했던 내가 부정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 상태를 방치하지 않고 번제단에서 죽은 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죽고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다시 하나님의 이름만을 마음에 담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써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빛과 평강을 발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삶에 대해서는 내가 짐 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임할 것이고 하나님의 손이 나를 장갑 삼아 이 세상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선지자와 사도들은 한결같은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와 사두개인과 같은 마음상태에서는 이러한 말씀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발끈하여 말씀을 밟아버리고 무시하고 등지고자 합니다. 이러한 열등감이 살기를 띠게 되면 삶을 폭파시키는 폭탄이 되고, 모든 인간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로 작용하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을 향하여 절대 당당함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주어진 나의 위치는 나의 마음상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대통령일지라도 박사일지라도 재벌일지라도 그들이 바라는 것이 세상의 가치들인 한 결코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며 열등감을 극복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세상의 가치에 매달리는 것이야말로 열등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고, 재벌이 되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악착같이 돈을 벌어들이고, 부모가 자녀를 닦달하는 이유도 모두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선지자와 사도들은 대통령 짐 벗고, 재벌 짐 벗고, 박사 짐 벗고, 자녀 짐 벗으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기에 선민들이라는 사람들이 선지자와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하였습니다. 죽이고 박해할 수 없다면 무시하고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 보내진 선지자와 사도들이 전한 말씀의 핵심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구하는 것만을 유일한 짐으로 채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연쇄 사건 안에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머물 때만 세상 짐을 벗어버릴 수 있고 열등감도 극복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열등감 없는 하루가 너무 아쉽습니다. 매일 매일을 열등감 없이 자유롭게 살고 절대 결핍이 극복되어 당당함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마주 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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