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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잊지 않으심 안에 있는 나?>의 줄거리:
그 옛날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렸던 모양입니다. 앗사리온은 가장 작은 푼돈의 단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팔리는 참새 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이 잊으시는 법이 없다 하십니다. 그러니 어떻게 나를 잊으시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심이 과연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요?
잊지 않으심 안에 있는 나?
(누가복음 12:1~7)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잊지 않으심 안에 있는 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잊지 않으심 안에 있는 나?’
예수님께서는 본문 6절에서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가 읽지 않은 앞부분의 1절을 보면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수만 명이 아닌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수만 명의 무리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만 명의 무리가 몰려온 이 상황을 근심스럽게 보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러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부흥이 이루어졌다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무리를 뒤로하신 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수만 명의 무리가 몰려든 상황이야말로 제자들에게 죽음의 위협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제자들이 수만 명의 백성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몰려든 수만 명의 무리를 양과 같은 제자들을 죽이려는 이리떼로 보셨습니다.
다시 6절을 보면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푼돈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왕이면 “하나님께서 참새는 잊으실지라도 너희는 잊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다면 특별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서 더 좋았을 것입니다. 한낱 참새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나를 잊지 않으시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고 또 특별히 감사할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차라리 하나님께 잊히고 싶은 경우입니다. 욥은 고통 중에 차라리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어주시기를 바랐고 하나님께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를 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께 잊히는 편이 더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죽음의 위협을 언급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다.”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앞선 4절에서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못된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음을 전제로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죽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두고 보시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결코 “육체의 죽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쓸데없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는 죽임을 당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두고 보실 수도 있지만 애초에 육체의 죽음은 전혀 대단하게 여길 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지켜주실 것이니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육체는 죽을 수 있지만 죽음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복음 전파의 역사에서 육체의 죽음은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필두로 하여 얼마나 많은 사도와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몸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기 때문에 육체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오해해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잊지 않으실 것이니 육체는 죽어도 괜찮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잊지 않으신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 내용을 알고 나면 하나님이 잊지 않으심이 나의 육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창조 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는 나를 향한 독특한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어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다 죽었지만 이 사람들 중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태어날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을 고유한 인격체로서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창조의 특징은 보시기에 좋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이것이 원형으로서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점선으로 그림을 그려두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몸으로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려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려두신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려갈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잊지 않으심 속에 머물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점선에서 벗어나는 실선을 그린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으로 잊지 않으심 속에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사람의 모습이든 나쁜 사람의 모습이든 잊지 않으심 속에 있다는 것은 같습니다. 따라서 몸으로 사는 동안에 잊지 않으심 속에 있는 점선을 실선으로 그려가는 과정에 점선에서 얼마나 벗어났느냐 일치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화가가 그림을 다 그리면 낡은 붓을 버리지만 그림은 남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육체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안에서 우리의 모습은 온전히 남게 됩니다. 화가에게 중요한 것이 붓이 아닌 그림이듯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닌 삶의 내용입니다. 비록 몸은 죽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몸이 없어졌다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할 일은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조금이라도 잊으신다면 우리는 다소 점선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더라도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밝히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모르신 채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의 내용을 조금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려두신 점선과 일치하는 실선을 그린 자들은 보시기에 좋게 여기셔서 천국으로 불러들이실 것이고,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에서 벗어난 실선을 그린 자들은 보시기에 좋지 않게 여기셔서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일은 몸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어도 억울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까지가 하나님이 정해두신 시한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려두신 점선에 가능한 일치 되도록 실선을 그려갈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다 육체의 시한이 다 되어 죽게 되었을 때 삶의 내용이 하나님의 점선과 얼마나 일치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속에 있는 나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때 천국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가 두려운 일이지 결코 몸이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그려두신 점선을 어떻게 따라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죄악과 죄 사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죄악은 하나님의 그려두신 점선에서 벗어난 실선을 그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이란 주님의 보혈로 내가 그려둔 실선이 다 지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려두신 점선에서 벗어나게 그려둔 실선을 지워주십니다. 내가 그린 실선이 지워졌으니 남은 것은 하나님의 점선뿐입니다. 이제 남은 삶이 얼마가 되었든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리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한 삶이 구약에서는 성전 생활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예수님이 오셔서 성전의 의미를 완성하신 뒤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고 있는 동안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며 손으로 만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식과 마음은 몸으로 느끼는 세상의 대상들이 아닌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달리 말하면 내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몸으로 사는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기 위한 과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세밀하신 분이십니다. 나의 삶은 물론이고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문제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과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창조주와 주권자로서 얼마나 세밀하게 나의 삶에 관여하시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인정할수록 우리의 삶은 세상의 책임과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의 짐을 지지 않고 마음 채움을 위해서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면서 사는 순간들이 하나님께서 점선으로 그려놓으신 보시기에 좋은 모습을 실선으로 그려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속에서 점선과 실선이 일치된 모습이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천국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지금 몸으로 살고 있는 세상은 어머니의 자궁에서의 10개월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아기는 10개월 동안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사지백체가 온전해졌을 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지구는 마치 자궁과 같습니다. 이 지구라는 자궁 속에서 하나님께서 점선으로 그려두신 모습을 실선으로 완성시킬 때에 천국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죽는 것은 지구라는 자궁을 벗어나 천국에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지구라는 자궁에 있는 동안 하나님보다 세상을 좋아하고 그 결과 공로 사상에 찌들어서 세상 짐을 지고 살았다면 점선에서 벗어난 실선을 그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의 10개월은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는 기간이듯이 지구에서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갖추는 기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온전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몸으로 접하는 세상보다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세상에서는 짐을 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두 가지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점선을 따라 보시기에 좋은 실선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면 몸이 죽는다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영적인 사실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몸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는 것이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물론 몸이 죽임을 당할 때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이 죽는다는 것 자체는 오히려 끝이 아닌 시작이기에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을 끝인 줄로만 알고 두려워하기에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심리적 두려움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1절에서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무리를 뒤로하신 채 제자들만 듣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언급하신 것일까요?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란 외식(外飾)으로 마음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열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은 행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이들이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었던 대상은 세상의 가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누가복음 16장 14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이라고 하셨고 앞서 본 11장 43절에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돈을 좋아하였고 높임 받기를 좋아했고 세상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권력을 탐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가치로써 자신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께 열심이었지만 속으로는 세상에 열중해있었습니다. 공로 사상에 찌들어서 세상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도 섬겼던 것입니다. 이 외식함을 누룩에 비유하신 이유는 파급효과 때문입니다. 밀가루 덩어리에 누룩을 집어넣으면 발효가 일어나서 두세 배로 커집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의 외식이 백성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예수님은 이것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께 몰려왔던 수만 명이 바리새인의 외식과 가르침을 본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선지자이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도 상관치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얻고자 함이 아닌 세상의 가치를 더 많이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밝히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이 자신들 편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도 있었고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열심인 이유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얻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등 돌리신 채 제자들을 향해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이와 연관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좋아하지 않으셨고 이것을 부흥으로 여기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의 외식을 전수받은 자들이 결국 예수님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이유는 세상의 가치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셨던 일은 세상을 탈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통해 세상을 탈출하는 길을 내셨고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길을 따르는 자들은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좋아하게 되고 이 세상의 삶은 사소한 영역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길을 터득하고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전파할 때에는 충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바리새인들에게 배웠던 것은 세상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님 섬김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의 틀 안에서 보자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물을 끼얹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죽이고자 할 것인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말하는 부흥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을 전수받은 자들만이 세상의 부흥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기록하며 단순히 많은 무리가 있었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몰려왔음을 강조하며 바리새인의 외식이 그만큼 퍼져있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어린양 같은 열두 제자를 향해 수만 마리의 이리떼가 몰려오는 것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부흥이나 번영이나 세상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을 잡아먹기 위한 이리 떼들이 몰려든 것으로 보셨습니다.
뼛속까지 세상 사랑이 침투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은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세상을 탈출하고 벗어나자고 외치는 제자들을 죽이려고 달려들게 될 것이었습니다. 경멸할 것이고 버릴 것이고 무시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은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점선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실선을 그리는 과정이 끝난 것뿐입니다. 진짜 두려워할 일은 몸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 몸이 죽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였고 세상의 가치가 전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몸이 죽으면 세상의 가치들도 추구할 수 없었기에 제자들을 죽임으로써 모든 좋음을 박탈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세상에서 잃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속에서 보시기에 좋도록 그려진 점선을 따라 그리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몸이 빨리 죽어서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이 땅에서의 죽음이 아버지가 계시고 천사들이 있고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이 있는 천국에서 태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탄생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으신 분도 계시고 특별히 자녀를 앞세운 부모님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정말로 가족을 잃은 것이 아니기에 마냥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바깥으로 튕겨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정말 두려워하고 걱정할 일은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의 일입니다. 나와 내 가족들이 하나님의 잊지 않으심 속에 있는 점선을 실선으로 바꾸어 놓고 죽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그려놓으신 점선에 일치하는 실선을 그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과제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잊지 않으심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를 철저히 함으로써 그려두신 점선을 온전한 실선으로 그려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