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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람 만나기 사위일체 팀워크>의 줄거리: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라는 것은 사위일체 팀워크를 다지고 만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만나고 대할 때 아무리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만남이라도 준비 없이 만나면 안 됩니다. 입학이나 입사를 위해서 인터뷰를 준비하듯이 해야 합니다. 사위일체 팀워크가 일상적이든 특별하든 사람 만남을 즐겁고 당당하고 내실 있게 합니다.
사람 만나기 사위일체 팀워크
(누가복음 12:8~12)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람 만나기 사위일체 팀워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람 만나기 사위일체 팀워크’
스포츠에서 팀 게임의 승리는 말할 것도 없이 팀워크에 의해 결정됩니다. 팀워크는 구성원들의 연대가 튼튼하여 협동이 잘 이루어지는 상황을 말합니다. 팀원 전체가 하나의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각자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고 다른 역할을 하는 구성원들에 대해 신뢰를 높이는 것이 팀워크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가까운 사람이든 원수든 가족이든 직장동료든 누군가 앞에서 사위일체의 팀워크를 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위일체의 팀워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사위일체에서 각자의 역할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통해 삼위일체에 참여한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뜻을 드러내시고 기운을 발산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의 머리이시기에 내가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도 머리가 되십니다. 이러한 사위일체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건과 상황을 마주 대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위의 역할이 각각 주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일상적인 만남이라도 이 사위일체의 팀워크의 준비됨이 없다면 그 만남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위일체를 이룬 후에 만남을 이루라는 것이 본문 말씀의 내용입니다. 사위일체 팀워크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특별한 사람에게도 필요하지만 일상적으로 늘 반복해서 만나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질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만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관계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어렵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잘 이루어가는 방법이 바로 사위일체의 팀워크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사람은 배우자를 늘 대하게 됩니다. 흔히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위일체의 팀워크가 없이는 온전한 만남도 이루어질 수 없기에 반드시 갈등과 반목과 결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부부관계를 이루고 싶다면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사위일체 팀워크가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삼위일체에 참여할 때 아버지가 머리 되셔서 배우자에 대해 해야 할 말과 취해야 할 태도를 결정하실 것이고 성령님께서 그 결정의 내용을 내 마음에 가져오셔서 드러내시고 발산시켜나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비로소 배우자를 마주 대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내가 똘똘 뭉쳐서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 모든 관계는 온전해집니다. 사위일체 팀워크로 배우자를 대하고 자녀를 대하고 직장에 나가서 동료들을 만남으로써 최선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원수와 대면해야 하는 외나무다리 같은 상황에서도 사위일체 팀워크를 정비함을 통해 온전한 만남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위일체 팀워크는 실제 만남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상대와 통화를 할 때는 껄끄럽고 어색하여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위일체 팀워크를 이룰 수 있다면 어떤 상대와의 대화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화기를 드는 순간에 예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성령님을 생각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모든 대화의 진행을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전화로 마주대하는 역할을 해드릴 수 있으면 됩니다. 내가 마주대하는 동안 실제 대화의 내용은 하나님이 결정하시니 대화가 편해집니다. 실제로 이러한 경험을 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과적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기피증도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 중에는 나의 팀이 없습니다. 가족이나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애인을 마주대할 때에도 나의 팀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뿐입니다. 이 팀 구성에 애인이 끼어들 자리는 없습니다. 애인과 함께 길을 가다가 건달들을 만나게 되었어도 애인과 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건달들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나는 사위일체 팀워크로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애인을 보호하겠다고 주체성을 주장하는 순간 사위일체 팀워크는 깨지고 최선의 결과도 나타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본문 말씀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 시인은 곧 사위일체 팀워크 다지기입니다.
8절을 다시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여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할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주장하셔서 그렇게 말하라 하신다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밝혀야 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신앙의 자유가 있는 환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슬람 국가 등에서 공개적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순교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단지 이러한 어려움을 염두에 두시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시인하면”이라는 말씀의 원문을 보면 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ὁμολογήσῃ ἐν ἐμοὶ)입니다. 여기서 “시인하다”로 번역된 호몰로게세이(ὁμολογήσῃ)의 원형은 “동의하다, 찬성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이고, 엔 에모이는 “내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호몰로게오는 다시 호모(ὁμοῦ)와 로고스(λογος)의 합성어인 호모로게오(ὁμόλογος)를 어원으로 합니다. 호모는 “같다”라는 뜻으로써 우리가 흔히 동성애자들을 호모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즉 “동의하다, 찬성하다”라는 뜻의 호모로게오는 “같은 것을 말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는 본문의 말씀을 직역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와 같은 것을 말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와 같은 것을 말할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 앞에 있을 때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 동일한 것을 말하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사장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장님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장님 앞에서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은 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엔 에모이(ἐν ἐμοὶ)가 “내 안에서”라는 뜻이라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몸은 사장님을 대면하고 있지만 나의 의식은 사장님을 대면하기에 앞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 예수님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하라는 것은 어떤 사람 앞에서도 예수님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하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하나가 되는 연합은 가능합니다. 몸은 사장님과 마주하고 있지만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독립적인 인격체인 내가 삼위일체의 한 꼭짓점인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사장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생각이 있고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에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동의하고 계시기에 예수님 안에 있는 나 또한 동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내 입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본래 뜻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과 같은 것을 말함으로써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 하나님 아버지가 갖고 계신 생각과 말이 성령님을 통하여 나의 마음에 전달되고 나는 그 생각과 말을 표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시인할 때에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수행하는 천사들이고 곧 하나님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앞에서 우리를 하늘에 데려가기에 합당한 사람이라 동의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의 구원은 사람들 앞에서 사위일체 팀워크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생과 영벌을 결정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사위일체 팀워크를 반복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데려가기에 합당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의지 앞에서 우리를 향해 동조하시고 동의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사위일체 팀워크를 이루어본 적이 없다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동조하실 수 없습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 자녀를 대할 때에 직장에서 동료들을 대하고 이웃을 대할 때에 사위일체 팀워크를 가져본 적이 없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실만한 자가 아닙니다.”라고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위일체 팀워크는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성전이나 예배당을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해왔습니다. 소위 교인이라 부르는 예배당 조직의 회원들이 모여서 하는 활동들을 믿음생활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런 활동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은 성전이나 예배당이 아니라 삶의 현장입니다. 믿음 또한 삶의 현장에서 표현되는 것이지 성전이나 예배당에서 표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이 그토록 중요시 되었지만 실제 백성들이 성전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일 년에 세 번뿐이었습니다. 성전 생활화는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성전을 기억하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부딪히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의 팀을 구성하여 살아가느냐가 구원 즉 영생을 결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 마주대하는 역할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생각을 전하실 것이고, 우리는 입과 표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기운을 드러내고 발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데려가실 합당한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의지 앞에서 우리를 합당하다고 시인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사위일체 팀을 이루지 못했다면 천국으로 데려가실 하나님의 의지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는 말씀이 이와 같습니다.
한 일화를 말씀드려봅니다. 서울대 졸업식에 시골에서 올라온 초라한 어머니를 창피하게 생각한 아들이 애인 앞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라고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로부터 예수님 시인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인은 예배당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을 만나도 예수님의 존재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전혀 대단한 사람이 아닌 일상적으로 함께하는 가족들 앞에서는 마음이 느슨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도 예수님의 존재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는 항상 사위일체 팀워크가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부부 사이, 부모자녀 사이, 형제 사이, 친구 사이, 연인 사이가 편하다고 해서 나의 주체성이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대학입학이나 회사입사를 위한 면접을 준비하는 것처럼 마음에서는 항상 사위일체 팀워크가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준비는 결코 번거롭거나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늘 부딪히는 배우자나 자녀에 대해 일생일대의 면접을 준비하듯이 대할 수가 있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준비해야만 모든 인간관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제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준비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면접을 준비하듯이 사위일체의 팀워크는 준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떠올리고 만나야 될 사람과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마음은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듯이 부활의 자리에 이른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름만이 담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동안 사위일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손이 되셔서 나를 장갑 삼으실 것입니다. 나의 입과 손과 표정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무방비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고 의식하고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관계는 결코 그러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위일체의 팀워크가 준비된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관계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위일체의 팀워크를 염두에 두시고 10절에서 성령모독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또 이어서 11~12절을 보면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사위일체를 이루게 될 것이고, 사위일체 안에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부터 성령모독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모독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제기되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시각에서 비춰질 수 있습니다. 모독하기 위해서는 일단 성령을 모독할 수 있는 대상으로라도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드러나지 않으시는 성령에 대해 모독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시고 표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내가 사위일체 팀워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중에 성령님께서 나를 통해 하신 말과 행위를 꼬집어서 모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수는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위일체를 이룬 상태에서 성령께서 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실 때 그 말과 행위를 꼬집어서 귀신이 들렸다든지 미친 사람 취급한다면 그것은 나를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모독에 대해 정리해봅니다. 성령은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만 드러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나를 장갑 삼아 말하고 행동하실 때에 그러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곧 성령에 대한 모독이 됩니다.
앞서 본 11장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못 듣는 사람을 고치셨을 때 하나님의 손 성령께서 예수님을 장갑 삼아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은 용납하시겠는데, 예수님을 장갑 삼아 귀신을 쫓아낸 성령님의 역사를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는다는 비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0절에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누가 모독하느냐를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면 성령을 모독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모독에 대한 처분은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람을 앞에 두고 사위일체 팀워크를 원활하게 준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누구도 나의 팀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나의 몸조차 나의 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나의 마음과 의식으로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사위일체를 이룰 때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팀원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팀의 머리이시며 예수님과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어 성령님께서 전해주시는 것을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면 됩니다.
‘사람 만나기 사위일체 팀워크’가 구원을 결정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예배당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결정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이 사위일체 팀워크를 활성화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함으로써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 사위일체의 팀워크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팀워크 안에서 내 입과 표정과 몸을 통하여 아버지의 뜻과 생각이 드러나고 기운이 발산되는 관계를 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