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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S) 세상 생각 끊는 오감불신_태승철 (누가복음 12:35~4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2.21|조회수74 목록 댓글 1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생각 끊는 오감불신>의 줄거리:

십자가가 복음인데 이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을 의식이 놓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실은 75억 명이 다 그렇다고 해도 될 지경입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오감 만족 즉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오감 불신으로 세상 생각 끊기를 생활화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생각 끊는 오감불신

(누가복음 12:35~40)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생각 끊는 오감불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생각 끊는 오감불신’

요즘 인터넷을 보면 블로거들이 방문한 맛집의 음식을 평가할 때에 오감만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에 반대되는 표현을 만들어보자면 오감불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입니다. 어느 날 주인이 혼인집에 참석하게 되어서 집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종들은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때 주인이 늦은 밤에 돌아오더라도 기다렸다가 대문을 열어줄 수 있는 종이 있다면 주인은 기뻐하며 칭찬할 것인데 그 칭찬함이 마치 주인이 종을 섬기는 것과 같이 특별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가 오감만족이나 오감불신에 대하여 어떤 연관성에서 이해될 수 있을까요? 이 비유에는 세상 생각에 빠진 오감만족의 삶은 중단되고 오감불신으로 하늘만 생각하라는 예수님의 권고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감(五感)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입니다. 오감만족이라는 것은 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만족시키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이 바로 만족감입니다. 사실 만족이란 감각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채워질 때 느끼는 것입니다. 본래 오감에는 만족이나 불만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감만족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이유는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이 오감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으로부터 마음 채움을 얻기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이 오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다 보니 마치 마음이 오감과 붙어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이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것인데 마치 오감이 만족하게 하는 것처럼 느끼기에 오감만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오감만족이라는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오감만족을 추구하고 있는 한 진정한 만족은 경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오감만족에 대한 야심은 인생의 기쁨과 만족에 대한 최대의 걸림돌이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오감만족의 삶이란 오감을 통하여 포착한 대상에서 만족을 추구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29~30절에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렇게 오감만족을 추구하며 세상 생각에 빠져들 때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생기게 됩니다.

본래 오감은 천국으로 만족한 마음 상태에서 세상을 마주대하기 위하여 활용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감이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감 꽁무니를 쫓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감으로 세상을 포착할지라도 진정한 만족은 결코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만족한 사람이 오감을 활용해서 세상을 대할 때에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들에게 하늘의 뜻과 기운이 발사되는 것이고 발산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오감은 대상을 포착할 뿐이지 만족과 불만에 대한 기능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없는 기능을 있는 것처럼 믿으며 오감으로 세상을 쫓아다니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 생각을 끊을 수 없습니다. “세상 생각을 끊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세상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고 걱정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기준으로 하면 세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생각하지 않는 편이 더 쉽습니다.

제가 생활 속에서 하는 기도를 그대로 말씀드려봅니다. 저에게도 삶의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건강 문제, 재정 문제, 자녀 문제, 일에 관한 문제, 나라의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분에게 생기는 문제들이 저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세상일이 생각날 때마다 저는 먼저 입으로 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되새깁니다. “지금 생각하는 세상일은 이래도 저래도 나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인생에는 절대로 아무 상관이 없다. 나의 만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일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미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뜻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일에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아버지의 주권과 통치가 임하게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세상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나는 시험에 들지 않기만 하면 된다. 세상 기준에는 맞지 않더라도 그것이 무조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최선임을 나는 믿는다.”라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저와 같은 고백을 하시며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주기도문을 풀어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일로 밤새 고민하는 것에 비하면 얼마나 짧고 간단한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재정 문제를 생각한다면 미래와 노후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또 문제의 대처법을 생각하느라 밤을 새워도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렸던 고백을 할 때는 5분도 걸리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 생각하기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나의 전부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나의 머릿속에 세상일은 실제 나의 인생의 진로와 성패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반드시 적절한 때에 손대실 것이고 이끄실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세상 생각이 날 때 이러한 고백을 스스로에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만 아버지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좋아서 하는 기도는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그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고백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생각이 날 때마다 이 일은 나의 기쁨과 만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다, 아버지가 주권자로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뜻하고 계신 대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나는 시험에 들지 않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최선임을 고백하면 된다,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서 사위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 세상일을 멈추고 하늘을 구하는 전환을 이루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세상일을 생각하다 보면 몇 시간 훌쩍 지나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몇 시간 정도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가지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몇 년이나 시름시름 걱정하고 근심하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녀의 문제입니다. 평생 동안 자녀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자녀 걱정이 생기려고 할 때마다 이 짧은 고백을 스스로에게 함으로써 생각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기쁨과 만족은 마치 맑고 따듯한 물에 향기로운 허브를 띄우고 목욕을 하는 것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겠다고 의식이 오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 돼지우리 안에서 뒹굴며 마음을 더럽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세상에 푹 빠져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세상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더는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기쁨이시고 만족이심을 선언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나의 일을 다 알고 계시는 주권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으면 됩니다. 때가 되면 나의 일들을 아버지의 뜻대로 이끌어 가실 것임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아버지만을 소원하기 위하여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일을 생각하며 근심하고 염려하고 스트레스 받고 사는 것이 힘든 일이지 세상일 그만두고 세상을 탈출해서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상식적으로 다소 이해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출타했던 주인이 밤에 돌아오는 상황을 가정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종들은 그때 일어나 문을 열면 됩니다. 굳이 집 안의 모든 종들이 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인데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인을 잠도 자지 않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라니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실질적으로 보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주인이 없으면 종들은 태만해지기 마련입니다. 가정에서도 잔소리하는 부모가 없으면 자녀들이 해방감을 느끼고 태만하게 자의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회사에서도 윗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아랫사람들은 게을러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특성을 염두에 두고 깨어있음을 강조하시기 위해 동원하신 비유적 표현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의 타이밍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평소에 깨어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나의 상태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집안에 주인이 있을 때도 종은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항상 등불을 켜고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다가도 주인이 부르면 바로 일어나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잠들지 않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잠들지 않아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깨어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오감으로 포착되는 세상의 상황이나 대상들에 의식이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공사 중에 큰 구덩이에 콘크리트를 붓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이때 콘크리트가 굳었는지 눈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겉보기에 말랐다고 생각해서 생각 없이 올라가면 바로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의식이 세상에 빠지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오감이 포착하는 세상일들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의식은 세상일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이 오감으로 포착한 세상 대상들에 매몰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잠들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주인은 혼인집에 참석차 집을 떠났습니다. 종들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부재인 상태를 오감으로 포착하게 됩니다. 집안에 주인이 보이지 않고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주인이 날마다 먹는 음식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인이 없는 상황을 오감이 포착하게 되면 마음은 주인이 아닌 다른 대상을 통해 기쁨과 만족을 찾고자 합니다. 주인이 있을 때 고생했으니 주인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쉬고자 하게 됩니다. 우리의 오감이 세상을 포착할 때에 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주인이 부재중이라는 상황에 의식이 매몰되어 버립니다. 주님께서는 이 상태를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늘과 팀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시듯이 우리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사위일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감을 초월해 계십니다. 마음과 의식이 오감에 묶여서 오감의 꽁무니를 쫓게 된다면 결코 하나님을 의식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복음과 종교의 차이가 생겨납니다. 종교인은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에 의식이 매몰된 상태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다면 오감이 포착을 합니다. 돈이 없다는 상황에 의식이 매몰되어서 돈이 없다는 세상일을 생각합니다. 생각하다 안 되겠으니 하나님을 의지해보고자 합니다. 헌금도 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도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 이미 잠이 든 것입니다. 오감이 포착한 돈이 없는 상황에 의식이 매몰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감이 포착하는 상황에 매몰된 상태에서는 오감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오감에 묶여있고 매몰된 상태에서는 결코 오감을 뛰어넘어 계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오감이 포착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불신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주인 부재의 상황을 오감으로 포착하였으나 그 상황을 불신하고 주인이 없으면 기쁨도 만족도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감 밖에 계신 주인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인들은 오감을 따라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의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오감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의식하고자 합니다. 오감을 통해 포착하는 세상일에 마음이 매몰되어 버리면 절대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29~30절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 또한 어제 말씀드린 세상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의 반대 방향에서 반복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간이 아니라 의식이 항상 예수님을 향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비유의 중심내용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는 이유는 오감으로 포착한 세상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을 오감으로 포착하게 되자 먹을 것 입을 것이 충분해야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 고민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오감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은 완전히 잠들어 버린 상태입니다. 오직 오감으로 포착한 세상일들만 진실로 여기고,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연인이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인을 오감으로 포착하면서 마음을 연인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 동안 의식은 오감에 매몰되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있는 대상에 대해 믿음을 발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부재중이라고 해서 의식에서 주인과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감으로 포착이 안 될 뿐이지 엄연히 주인은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38절을 보면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식으로 이경은 늦은 밤 9시~12시이고 삼경은 12시~3시까지 새벽시간입니다. 이때도 주인을 기다리느라 잠을 자지 않는 종이 있다면 복이 있으리라 하십니다. 당시의 종들은 육체노동을 담당하였기에 이 시간에 졸음을 참고 깨어있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주인을 의식하는 종들에 대해서는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 주인이 종을 대우해주리라는 것입니다.

이경과 삼경이 비유하는 것은 주인을 의식하기 어려울 때입니다. 가정에서 이런저런 문제로 부부간에 다툼이 생겼을 때 아내는 아내대로 화가 나고 남편은 남편대로 화가 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자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러한 순간들이 비유적으로 깨어있기 어려운 이경과 삼경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오감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마치 급류처럼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 세상의 급류에 휩쓸린다면 의식은 둥둥 떠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오감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의식이 깨어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종처럼 섬기시겠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격 전체를 통째로 갖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깨어있는 것이 바로 이경과 삼경에 깨어있는 종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오감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직장에서 가정에서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감으로 직장을 느끼고 가정을 느끼는 동안에는 우리의 의식은 하나님께 잠들 수밖에 없습니다. 오감으로 포착한 세상에 마음이 빨려 들어가서 하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잠든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40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 걱정을 하다가 스트레스로 돌연사를 하게 되었다면 이 사람은 이 상태 그대로 재림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돈에 대해 깨어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잠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 깨어있기 위해서는 돈에 대해서는 잠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돈!”하고 외치면서 예수님을 마주하게 될 터인데 이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자녀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죽었다면 이 또한 예수님에 대해 잠든 것입니다. 그러다 재림 때 예수님을 마주하게 되었다면 마찬가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언제 죽게 되더라도 오감에 붙들리지 않은 의식으로 오감을 초월해 계신 예수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오히려 세상일을 의식하여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문제도 없으시고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시며 내게 괴로움이나 부담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그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돈은 내 마음대로 벌리지도 않고 내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못돼먹은 돈을 생각하느라고 진을 다 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가 주권적으로 책임지신다는 말에 대해서는 믿지 못합니다. 세상 생각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생각하기를 이어가는 일이야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내용을 본문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본문의 내용은 세상 생각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당부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만을 생각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모든 세상일은 아버지의 주권에 의해서 이끌려 갈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을 믿는다면 범사에 감사할 준비만 하시면 됩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오감을 초월해 계신 아버지께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감사할 준비만 하면 된다.”라고 여기며 돈 문제를 끊어내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가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대신에 아버지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일은 감사하기 위해 떠나면 됩니다. 여러분께서 세상일을 생각해보고 근심하고 씨름해보셨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물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 생각하는 것을 끊기는 어렵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추구할 수 있어야만 세상 생각을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알았으니 얼마든지 세상을 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생각하지 말고 오감을 초월해있는 하늘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오감을 불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감이 참으로 치명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오감이 포착한 대상에 의식이 붙잡혀 생각에 생각을 이어가는 일을 이제는 끝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 아버지를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감불신의 삶을 통하여 천국 만족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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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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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Kbsong | 작성시간 20.12.21 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가길 원하여 십자가 앞에 다시 나아갑니다. 오감불신의 삶을 통하여 천국 만족의 주인공이 되길 진정으로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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