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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좋아하기 하나만 제대로 하라>의 줄거리:
하나님이 나의 평생 내게 바라시는 한 가지가 무엇일까요? '좋아하기' 입니다. 좋아하는 것. 이 일처럼 쉬운 것이 있을까요? 또 누군가, 무엇인가를 좋아하기처럼 하기가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좋아하기 하나만 제대로 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은혜가 다 주어집니다. 그런데 쉬워서 오히려 그럴까요? 제대로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좋아하기 하나만 제대로 하라
(누가복음 12:54~59)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 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 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좋아하기 하나만 제대로 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좋아하기 하나만 제대로 하라’
우리는 여러 가지 해야 될 일을 생각하며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아하기 하나만 제대로 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12장의 마지막 부분을 다루기에 앞서 말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떠올려봅니다. 1절을 보면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 모였던 수만 명의 무리가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전염된 사람들이었음을 의식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6절에서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12장의 말씀은 마쳐지게 됩니다. 시대를 분간한다는 것은 마치 서쪽 구름이 소나기의 징조가 되고 남풍이 무더위의 징조가 되듯이 현재의 조짐이나 징조를 통해서 지금과는 다른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견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에게서는 이러한 분간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시대를 분간할 수 있는 서쪽 구름이나 남풍과 같은 징조였습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사람들은 소나기나 무더위는 예상하면서도 예수님이라는 징조를 보고도 새 시대가 올 것을 예측할 수는 없었습니다.
앞선 49~5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십자가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소나기와 무더위로 비유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로운 시대의 징조이셨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특징이 이미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만 명의 무리들 앞에 서신 예수님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안에 우주보다 더 크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들어와 현존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셨고, 예수님의 몸과 지정의는 하나님의 장갑으로 쓰임 받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불을 던지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나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이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들은 이것을 분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일을 대체 누가 예측하거나 분간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온 우주보다 더 크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안으로 들어와 현존하시며 나의 몸과 지정의를 장갑 삼아서 이 땅을 살아가시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으며 그러한 미래를 감히 바랄 수도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이 그렇게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징조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에는 이들의 외식 즉 위선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외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사야서 29장 13절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의 흡입력은 24시간 쉬지 않고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좋아하게 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이 떠났다’는 말은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열심을 보이는 상태가 바로 위선이자 외식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정작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며 예수님의 몸과 지정의를 장갑 삼아 움직이신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들 또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못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과 관련하자면 “좋아하는 만큼 보인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각종 지혜와 권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느낄 수 없다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세상 문제를 해결해주는 기적의 행위자일 뿐이지 새 시대의 조짐이나 징조는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보며 새 시대에 대한 기대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 일어나는 일이 자신에게서도 일어나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와도 기껏해야 병을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송사를 해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하나님이 내 안에 현존하시며 예수님을 장갑으로 쓰셨듯이 나를 장갑으로 쓰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내 안에 모셔 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공회로부터 불경죄를 언도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26장 64~65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는 하나님을 가지고 계셨던 예수님을 불경하다 여겼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이들과는 반대이셨습니다. 이들은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 보좌 우편을 그리워할 것이며 하나님 보좌로 가고자 합니다. 이때 더러움이 문제라면 깨끗해지기를 고민할 것이라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갈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룩한 분이라는 명목하에 하늘에 가두어 둔 채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능력만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저 사람 없으면 죽겠다는 심정이 됩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라면 다 들어주면서라도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산헤드린공회를 비롯한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거룩한 분이라며 하늘에 가두어 두고는 땅에서는 좋아하는 대상이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것을 얻기 위한 능력만 주시면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설득하고 꼬드기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에서는 하나님을 갖고 계셨던 예수님을 새 시대의 조짐이자 징조로써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기도문의 첫 번째 구절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흡입력을 발휘합니다. 즉 인간은 마음의 흡입력으로 무엇인가를 잡아당기며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고 하나님만 좋아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세상일들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의 문제해결을 바랄 수 없습니다. 돈 문제 앞에서 건강 문제 앞에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만을 좋아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루신 모든 복음의 역사 속에 담겨 있는 은혜와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외식하는 자들은 이러한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도 결코 하나님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이 좋아하고자 하는 대상은 여전히 세상의 가치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좋아함이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모른 채 좋아하기를 계속합니다. 좋아함의 문제는 단순히 좋아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력화시키게 됩니다.
사람들은 돈 문제가 생기면 돈이 들어와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좋아하기입니다. 우리는 제대로 좋아하기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 사람들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건강이 회복되어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틀린 좋아하기입니다. 우리는 건강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제대로 좋아하기입니다.
또 57절을 보면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만 보면 옳은 것에 관하여 스스로 판단할 것을 지시하시고 권장하시고 요청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보면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또 8장 26절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시고 판단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그 판단은 다 옳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고 오직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57절에서 판단하기를 권장하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어찌하여 옳은 판단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아니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 또한 외식함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더 직접적으로 해석하자면 “어찌하여 옳은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느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 옳을 것을 좋아하여 추구하지 않고 옳지 못한 것을 좋아하며 추구하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옳은 것을 좋아할 때 옳은 것에 가까이 가고자 하게 되고 결국 옳은 것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식하는 자들은 애초에 옳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릇됨과 오류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좋아하며 사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대체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펴보자면 옳은 것이 아니라 이득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옳지 않아도 이득이 된다면 그것을 원합니다. 옳지 않은 성공, 옳지 않은 흑자, 옳지 않은 성과, 옳지 않은 이득을 취하면서 문제가 되면 비로소 변호사를 사고 변명을 하고 거짓말로 포장을 하여 넘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옳은 것보다 이득을 좋아하는 마음가짐은 우리의 생애에 가장 큰 손실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옳음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옳음을 좋아하고 옳은 것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와 축복으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향해서는 하나님만을 좋아해야 합니다. 그리고 땅을 향해서는 옳은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이 좋아하기만 제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무엇을 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좋아하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얻을 것이냐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좋아하기가 바로 얻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좋아하기만 제대로 한다면 좋아하는 하나님이 주어지고 이 땅에서 필요한 축복 또한 주어지리라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이루려고 진땀을 빼며 살아갑니다. 좋아하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고생을 강요당하는 것입니다. 좋아하기만 제대로 하면 좋아하는 것은 저절로 주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늘과 땅의 원리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좋아하는 것을 인간의 궁극적 본질이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마음 공백을 만들어 놓으셨고 그 공백에서 비롯된 흡입력으로 무엇인가를 빨아들이도록 만드셨습니다. 빨아들일 때 만족하리라 믿어지는 대상을 좋아하게 됩니다.
하늘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좋아하고 땅에서는 옳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 제대로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좋아하기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내가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좋아하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내 것이 될 것이고, 그 이외에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까지도 내 것이 되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득을 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득을 구하는 것보다 옳은 것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구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옳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도가 넘치도록 좋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구하는 것을 물으셨고 이에 솔로몬은 열왕기상 3장 9절에서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솔로몬이 두려워했던 것은 외적의 침입도 아니고 국내의 정적들도 아니었으며 왕좌를 노리는 형제들도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송사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솔로몬은 오류투성이인 자신을 일천번제로 드리며 하나님께 옳음을 구하였습니다. 천 번을 죽어도 부족할 정도로 그릇되기만 한 자신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옳음이란 하나님의 뜻을 듣고 판단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솔로몬과 같이 옳은 것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를 기뻐하시며 10~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해야 할 옳음입니다. 또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장수하기를 구하고 부자 되기를 구했으며 원수가 사라지거나 망하기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약관의 나이에 솔로몬이 구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지혜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12~13절에서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귀와 영광은 옳은 것에 종속되는 하수일 뿐입니다. 옳은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축복의 본질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옳은 것은 내게 이득이나 유익이 되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찌든 죄악의 장아찌와 같은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게 정말로 이득이 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이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 상황은 좋아하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죄악이고 악독함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손해면 손해였지 결코 이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를 묵인하고자 합니다. 옳은 것을 구하지 않고 죄악에 물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득이라 여기며 좋아합니다.
솔로몬은 옳은 것을 구하기 위해 일천번제를 드리며 세상에 찌든 자신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습니다. 옳은 것을 좋아하는 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어서 본문 58절을 보면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것을 구한다면 재판관을 찾기 전에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화해하라’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고발로부터 떠나다, 고발을 벗어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옳은 것을 좋아하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옳은 것을 자급자족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옳음을 추구하지 않으면 58절 하반부에서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말씀하신 대로 자유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옳은 것을 좋아해서 유일하게 옳으신 하나님과 연결되고, 옳은 것을 받아서 움직일 때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가난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으로부터 옳은 것을 받지 못하면 나를 탓하고 시대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옳은 것을 받으면 돈이 없어도 건강이 좋지 않아도 어떤 문제가 생길지라도 자유하게 됩니다.
옳은 것이 없으면 계속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제가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에게 만날 때마다 당부를 드립니다. 목회 현장을 위한다면 세미나 쫓아다니지 말고 책 뒤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각각의 고유한 목회 현장에 대해 답을 알려주실 분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 외에 어디에 있다고 책을 뒤지고 사람을 찾아다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새 시대에 대한 조짐이자 징조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고 내가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서 옳은 것만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예수님이 드러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늘까지 닿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 길을 따라 하나님과 하나 될 때 옳은 것만을 이 세상에 표현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옳은 것을 좋아하기입니다. 하늘을 향해서는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땅을 향해서는 옳은 것만을 좋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좋아함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좋아하고 옳은 것을 좋아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좋아하는 하나님이 내 것이 되실 것이며, 이 땅에서 일거수일투족에 옳은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옳은 것의 결실이 나타날 때 파생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계획해두시고 예비해두셨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옳은 것을 좋아하기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 공백의 흡입력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흡입력으로 옳은 것을 제대로 좋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대로 좋아할 수 있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세상 좋아하는 마음은 죽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하게 하시며, 세상의 이득을 좋아하는 마음도 죽어 세상에서 옳음을 좋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