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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생애 때 예수님처럼 되자>의 줄거리:
오늘 한 구절은 성경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예수님 사생애에 관한 아주 희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한 구절이 지니는 의미의 무게가 장난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구로 사용된 복음서 저자인 누가가 어떤 사람이었을까, 새삼 궁금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 각자가 본 구절의 사생애 때 예수님처럼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사생애 때 예수님처럼 되자
(누가복음 2:40)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생애 때 예수님처럼 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생애 때 예수님처럼 되자’
예수님의 사생애(私生涯)에 관한 기록은 드뭅니다. 본문의 40절과 이어서 나오는 41~52절까지는 예수님이 12살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이 거의 유일한 사생애 때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오늘 읽은 40절 말씀은 구체적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뭉뚱그려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구절이 누가복음의 초반부가 진행되는 맥락을 고려할 때에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을 통해 복음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다만 의도적으로 삽입한 이 한 구절에서 누가만의 독특한 영성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누가라는 사람이 대체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로 대단한 의미를 가진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어린 예수님을 묘사함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한 구절을 통해서 어린 시절의 예수님에 대해 받는 첫 인상은 수동적입니다. 이른바 신동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일 살펴보게 될 부분에 대해 잠시 언급하자면 12살 된 예수님이 성전에서 유명한 랍비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율법사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하나님에 관해 대화를 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신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예수님의 모습은 결코 세상에서 생각하는 신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신동과는 반대되는 자아의식을 갖고 계셨습니다. 신동(神童)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재주와 슬기가 남달리 특출한 아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동일 수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특출함이 스스로의 재주와 슬기에 기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누가가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제목에서 말씀드린 ‘사생애 때 예수님처럼 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는 자세하게 제시될 것입니다. 이에 앞서 누가는 예수님 사생애의 특징을 통하여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공생애의 목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생애 때의 예수님과 같은 인격이 되기를 바라며 공생애를 사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될 단어 두 개가 있습니다. 지혜와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두 단어에 집중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성경연구가들은 이 내용을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랐음을 의미한다고 이해합니다. 다만 킹제임스버전(KJV)에서는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여 심령상의 강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와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에 집중함으로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볼 것입니다.
지혜와 은혜 이 두 단어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공생애의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갖추어야 될 인격의 핵심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께서는 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 공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서 타락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원죄를 유전 받지 않고 태어난 유일한 사람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뿐이셨습니다. 원죄가 없다는 것은 죄악과 저주에 찌들지 않은 채로 자란 사람도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사생애 때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됩니다.
지혜(智惠)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사전적 정의를 찾아봅니다.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달아서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내는 정신적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에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일에 대한 최고의 대처법을 빠르고 정확하게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개인이 갖는 인격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지혜란 사전에서 정의한 지혜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인격적 속성으로써의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곳곳에서 언급되고 본문에서 예수님께 적용되고 있는 지혜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지혜란 하나님과의 연결됨이 지속되는 중에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 안으로 들어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내 안에 주어져 있는 독립적 능력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을 통해 표현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지혜가 충만하며’라는 표현이 이를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자라며 지혜가 탁월해진 것이 아닙니다. 충만해졌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생각이 강물처럼 흘러들어오는 저수지와 같은 상태가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각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 육신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을 대하시고 형제들을 만나며 목수일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이기에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밖에서 흘러들어와 가득 채워졌다는 뜻의 충만하다는 말은 수동적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 스스로는 한 조각의 생각조차 하지 않는 무력함과 무능한 상태에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예수님께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어서 30절에서는 똑같은 의미의 내용을 반복하시며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는 공생애 때에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혜가 충만하다는 말씀이 의미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여기셨습니다. 목수 일을 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셨고, 어머니나 아버지를 대하실 때나 형제들을 만날 때나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셨던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아무것도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고 계획할 수 없는 상태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이후 인류 역사상 모든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단 한 사람만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와 연결된 상태에서 아버지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생각과 판단을 받아서 표현하며 사셨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특성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졌음을 떠올리며 지혜가 충만하였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요한복음 5장 30절에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이라는 단어로부터 솔로몬이 떠오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때의 지혜로 번역된 원문을 살펴보자면 듣는 마음입니다. 결국 솔로몬이 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문제를 판단해야 하는 재판관으로써 스스로 잘 판단할 수 있는 지혜라는 능력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판단을 포기하고 항상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바랐고 하나님의 뜻을 듣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듣기를 바라는 것은 연결되기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응답하십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따라 지혜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구하는 지혜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충만해짐도 아니고 솔로몬이 보여준 듣는 마음도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지 슬기롭게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구한 것은 하나님과의 연결이었습니다. 연결을 전제로 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려 봅니다. 지혜란 하나님과의 연결이 유지되는 동안에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입니다. 연결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각도 흘러들어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목사님들과 전화로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공통적인 화제가 하나 있었는데 독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쓴 저자와 연결됨을 의미합니다. 책을 통해 연결됨으로써 저자가 가진 생각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하는 것이 독서의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안 보는 책들을 많이 정리하였는데 그래도 남은 책이 많습니다. 남겨둔 책들도 거의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전류의 책들이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저자의 생각이 강하게 반영된 책들을 읽으려 하면 마음에 거리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자와 연결이 되는 순간에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신앙과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고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보다 저자의 생각을 우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언젠가 남은 책들도 다 처분할 때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새 십자가 온라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온라인상에서 모임을 가짐으로써 지혜가 충만해지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나 아버지를 대하실 때나 목수 일을 하실 때도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생각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하나님과 연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이유는 사생애 때의 예수님처럼 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계셨던 것처럼 삶의 현장에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자아의식의 고백을 십자가를 통해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내가 무슨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아버지와 연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삶의 현장은 아버지의 생각이 흘러들어오고, 예수님의 어릴 때 모습처럼 지혜가 충만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만남이 필요한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자꾸만 십자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것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살 수 있다고 여기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생애 때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온라인 교회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지혜에 이어서 은혜(恩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하나님이시기에 은혜의 주인이시며 은혜를 끼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정의란 무엇일까요? 지혜는 하나님과 연결됨이 지속되는 중에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흔히들 “은혜 받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은혜의 정의란 내 것이 되면 너무나 좋고 소중한 것을 거저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계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에게 너무나 좋고 소중한 대상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공생애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도 나타날 수 없는 탁월한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14장 10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일어난 엄청난 일들 자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허락하신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공생애 때에 일어난 일은 하나도 예수님이 갖고자 하신 소중한 것들이 아닙니다. 전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었을 뿐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구해야 할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사업을 한 결과로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의 일로써 사업이 잘되게 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소중한 것을 거저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기에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예수님께 가장 소중한 대상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부터 은혜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 몸이 건강한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당신의 일을 행하실 때에 내 몸을 건강한 상태로 이끌고 계실 뿐입니다. 몸이 건강한 것이 은혜라면 몸이 아프다면 은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건강과 은혜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몸이 아플 때에도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일을 해나가시고계실 뿐입니다. 돈이 잘 벌리든 안 벌리든 이 또한 은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당신께서 해나가고 계실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도 돈도 목숨도 시간도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자녀와의 관계, 직장에서의 관계, 내게 주어진 몸과 재산과 능력조차도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쓰시는 재료들일 뿐입니다.
내 것이 되면 좋을 유일한 은혜의 내용은 하나님 자신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이미 삼위일체 되심 안에서 계셨습니다. 누가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는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는 하나님과 연결됨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생각이 나를 통해 나타날 때에 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갖게 되는 것만이 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주어진 것들은 하나님께서 행해 나가실 재료일 뿐입니다. 이를 바르게 이해하는 연습을 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을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현실보다 더 체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측근으로 다가가게 되었음을 느끼는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바짝 끌어당기고 계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느낄 때에 비로소 은혜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느끼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어진 일들이 내게 주신 은혜가 아니라면 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나와 연결된 상태에서 당신의 일을 해나가실 때에 그 모든 일들을 내 이름으로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통해 일하시기를 즐거워하시고 나를 최측근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새 학기가 시작되어 선생님이 교단에 서시면 모든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한 아이를 지목하더니 교무실에 가서 출석부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 아이에게 출석부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출석부를 가져오는 것도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출석부를 가져 온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특별히 부탁을 받은 아이의 마음은 즐겁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의 관계 속에서 모든 일을 해나가실 때에 감사함이 생겨납니다. 이사야 41장 14절을 보면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버러지 같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 앞에서 버러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버러지 같은 나의 이름 아래에서 모든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자 합니다. 눈물이 나도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석부를 가져왔다고 출석부가 아이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출석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그 하나님이 내 이름을 쓰시고 내 이름 아래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 너무너무 황송하고 고맙고 감사하게 됩니다. 내게 무엇이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뿐이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연결이 된 상태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들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은혜입니다. 내가 너무나 갖고 싶어 하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해가시기를 즐거워하시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생애 때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기를 바라시며 공생애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이제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중심으로 함께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 온라인 교회로 모이고자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함께 하기 위하여 십자가 온라인 교회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어떤 삶의 환경 속에서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사생애 때 예수님처럼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