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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_태승철 (누가복음 13: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2.26|조회수12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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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의 줄거리:

도둑도 기뻐하고 마피아도 기뻐하고 살인자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 없는 기쁨은 그 자체로 죄악이지요. 성탄절을 기쁨의 날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회개의 날인 셈입니다. 회개는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쁨이 없다면 회개가 없기 때문이고 회개를 하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회개를 모르고 하기 때문입니다.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

(누가복음 13:1~5)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

본문의 말씀은 성탄절에 다루기에는 참혹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성탄절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는 제목은 어떤 잘못된 행위를 회개할 것이 아니라 존재가 잘못되었음을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은 저나 여러분 각자의 인생에서도 가장 축하할 일이기에 성탄의 기쁨을 말합니다. 다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탄을 기념하는 취지가 중요하지 12월 25일이라는 날짜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설령 예수님의 탄생이 7월 28일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음을 기념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탄절은 기쁨의 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슬픔의 날도 아닙니다. 우리가 일 년 내내 누려야 될 기쁨을 샘솟게 하는 옹달샘과 같습니다. 성탄절 하루의 기쁨을 말할 것이 아니라 성탄절 하루로 인하여 평생 누릴 기쁨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역에서 경부선이 출발할 때에는 부산이라는 목적지를 향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은 시작부터 그 끝을 향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시작입니다. 이 시작에도 목적지는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십자가로 인해 평생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 드립니다. 성탄이라는 출발점이 담고 있는 궁극적 목적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평생 우리의 기쁨을 담보해줍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을 본문의 용어대로 표현하자면 회개를 생활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탄이 기쁨이 되는 이유 또한 십자가와 회개라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회개가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상태에 대한 회개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항상 회개함으로써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회개가 밑바탕에 깔려있지 않음에도 기뻐한다면 그 기쁨이 무엇 때문인지 의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도둑이 도둑질을 성공하면 기뻐합니다. 마피아는 마약장사가 잘되면 기뻐합니다. 살인자는 경찰에 잡히지 않으면 기뻐합니다. 이처럼 표면적인 기쁨은 얼마든지 죄악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쁨 자체를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기쁨의 날이라고 하는 이유는 회개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기쁨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진정한 기쁨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회개 없이 이루어지는 기쁨은 전부 죄악의 발작 증세라 할 수 있습니다. 죄악은 슬퍼해야 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슬퍼해야 할 상태에서 기뻐한다면 발작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없다면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고, 회개를 하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위의 회개에 대해서는 익숙합니다. 잘못한 행위를 뉘우치는 것을 회개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회개가 아니기에 진정한 기쁨도 생기지 않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회개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회개는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대체 왜 회개를 평생 밑바탕에 깔고 살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잘못한 행위를 저질렀을 때만 회개를 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잘못된 행위가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는 체질을 회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목에서 말씀드린 존재의 회개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몸이 죽기 전까지 지속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나의 인격이 몸에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인격이 몸에 종속된 상태가 죄이기 때문에 몸이 살아있는 동안 회개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죄의 상태에 놓여있는 존재 자체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위의 잘못에 대한 회개는 뉘우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만 존재의 회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존재의 회개는 죽어야 끝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존재의 회개에 대한 필요성은 구약에서도 언급됩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회개의 기도는 바로 다윗이 군대장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죄를 숨기기 위하여 우리아를 죽게 만든 뒤에 나왔던 기도입니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와 거짓말을 하는 죄와 이웃의 것을 탐내는 죄까지 저지르고 나서야 자신의 행동이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회개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행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형성되는 어머니의 태중을 떠올리며 존재 자체가 죄의 덩어리였음을 고백하면서 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죄의 세포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극악무도한 간음과 살인과 거짓과 탐욕의 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악한 행위가 죄악 된 체질로부터 발생한 열매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회개가 진정한 회개일 수 있었고 이 회개 끝에 다윗은 참 평강과 기쁨을 되찾게 됩니다. 이렇게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평강이 주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행위를 회개했던 것이 아니라 존재를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회개에 평강의 지름길이 있습니다. 참 기쁨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 기쁨의 실질적인 내용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기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회개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죄라는 말과 회개라는 말 한마디 없어도 곧 회개를 생활화하는 것이며 항상 회개를 삶의 밑바탕에 깔아두는 것입니다. 존재의 죄악 됨을 회개함이 삶의 밑바탕에 깔려있을 때만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회개의 밑바탕이 없으면 기쁨도 기도도 감사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특이한 사건이 언급됩니다. 빌라도가 군인들을 시켜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칼로 쳐 죽였다는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듣게 되십니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치하에 있었습니다. 총독이었던 빌라도와 식민지 나라의 유대사람들과의 갈등과 반목은 불가피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별히 반항하는 세력의 제거 또한 흔히 벌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된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어진 성전 안에서 번제단에 제물을 드리는 중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성전은 가장 신성시되는 장소로써 신앙과 사회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에서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중에 이방인들에게 살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을 거부하셔서 재앙을 내리신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사건은 크게 새삼스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식민치하에서 유월절 같은 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는 3,0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인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에 칼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 특이하게 인식되었습니다. 로마의 악행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재앙이라는 식으로 여론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이 예수님의 귀에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은 데에는 앞서 있었던 일들이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만 명이 모여든 자리에서 바리새인들과 같이 외식하는 자들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러자 심기가 불편해진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께 따지듯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을 위선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갈릴리 사람들이야말로 위선적인 마음으로 제물을 드렸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묻고 있는 셈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받은 것임을 인정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질적인 문제는 행위에 앞선 존재입니다. 성전 제사의 의미 또한 존재에 대한 회개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본문 2절에서 언급된 죄는 하마르톨로스(ἁμαρτωλός) 즉 빗나간 자를 의미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들을 사랑함이 바로 빗나감입니다. 제사는 이 빗나감의 죄를 지은 존재를 불살라 죽이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갈릴리 사람들도 이러한 죄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소원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있었으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포함시키십니다. 2~3절에서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죄악의 무게를 저울에 달아본다면 갈릴리 사람들의 죄나 예수님께 묻는 사람들의 죄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 칼에 맞아 죽게 된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더 행위의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롭고 주권적인 역사였다고 못을 박으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존재의 죄를 염두에 두시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한편 4절을 보면 다른 사건이 언급되는데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셨습니다.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이 또한 마찬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절에서 언급된 죄란 하마르톨로스(ἁμαρτωλός)로써 ‘빗나간 자’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언급된 죄는 오페일레타이(ὀφειλέται)로써 ‘빚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회개해야 할 것은 행위 이전에 존재입니다. 그리고 존재에는 두 가지 체질이 있습니다.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입니다. 이러한 두 체질을 회개하기 위하여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해 존재에 대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행위에 대한 회개는 잘못한 것들을 조목조목 따져서 고백하며 뉘우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존재의 회개는 존재 자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이 존재의 회개를 위해서는 구분되어야 할 두 가지 죄적 체질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빗나감의 체질과 빚지는 체질입니다. 오늘은 빗나감의 체질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다 칼에 맞아 죽은 것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것도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굳이 이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결코 행위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죽음과 그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에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중시하신 것은 원인은 어떠하든 실제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기에 그로부터 의미하는 바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존재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실로암 망대에서 죽은 사람들은 그저 실로암 망대를 짓는 일에 참석했다가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나 실로암 망대를 짓던 사람들이나 예수님에게 이러한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나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존재의 체질이 같기 때문입니다.

 

빗나감의 죄란 소원의 과녁이 빗나갔다는 것이고 그것이 체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죄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회개는 곧 원죄에 대한 회개입니다. 행위는 원죄의 열매일 뿐입니다. 존재의 체질이 되어버린 원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행위라는 열매를 회개해서는 원죄의 문제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원죄는 존재에 박혀있는 체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음의 공백에서 비롯된 흡입력을 통해 소원과 바람을 갖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외에 다른 것으로 마음 채우기를 소원하고 바라는 것이 바로 빗나감의 죄이자 원죄의 체질입니다.

영이시고 바람과 같으시고 빛이신 하나님이 아닌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소원할 때에 과녁은 빗나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소원하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아닌 오감으로 포착되는 세상에 포함된 것이라면 어떤 대상이든 빗나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소원하는 중에 사기를 치게 되었습니다. 돈을 소원한다고 해서 다 사기를 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정한 법대로 정직하게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사기를 치게 되어 회개를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제가 돈을 벌려고 하다가 사기를 쳤습니다. 사기를 친 것이 잘못된 줄을 깨닫고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회개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또 같은 상황에서 다른 회개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 제가 또 돈을 소원하였습니다. 돈을 소원하였던 것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온전한 회개는 될 수 없습니다. 돈 대신 건강을 소원한 것은 죄가 아닐까요? 자녀형통을 소원한 것은 죄가 아닐까요? 아직도 죄의 근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온전한 회개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소원을 중단한다고 해서 그런대로 쓸 만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건강에 대한 소원을 중단한다고 해서 괜찮은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의 대상이나 상황을 소원하는 체질, 다시 말해 마음이 육체를 따라가는 체질 자체가 문제시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육체의 오감을 따라감이 빗나감의 원죄이며 존재의 체질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형성될 때 아기는 행위로 지은 죄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엇을 소원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은 죄 중에서 잉태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외에 세상을 소원하려는 체질이 세포마다 각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존재의 원죄를 인식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회개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도 평강의 자리로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회개의 힘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다윗의 죄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어 간음하였고, 간음을 숨기고자 거짓말을 하였고, 왕의 권력으로 우리야를 죽게 하는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은 죄는 탐내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한 네 가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밧세바를 탐내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 기뻐하지 못한 존재의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죄로 인하여 십계명의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첫 번째 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세바를 취하면 기쁘리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에 다윗에게 밧세바는 다른 신이었습니다. 다른 신이란 하나님 외에 기쁨을 준다고 믿어지는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첫 번째 계명을 어김으로써 나머지 모든 계명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지독하고 악독한 행위의 죄를 지었던 다윗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개를 함으로써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평강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어떤 극악무도한 죄악을 행위로 저질렀더라도 존재의 체질이 죄임을 깨달을 때 온전한 회개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 채움을 위하여 육체의 오감에 종속되어있는 것이 존재의 죄임을 알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를 받아들이시고 평강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성탄이 기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체질적으로 빗나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빗나감의 삶 속에서는 진정한 기쁨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성탄은 십자가를 담고 계십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의 존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다윗처럼 십계명 전체를 어기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육체의 오감을 따라 소원하는 빗나감의 체질을 죽이는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다윗이 누렸던 절대평강과 절대기쁨의 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신 날로써 성탄을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 성탄절을 최대한 기뻐하고 흠뻑 기뻐하며 충분히 기뻐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성탄에 담긴 궁극적 목적지인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나의 체질이 되어버린 빗나감의 죄악이 사라지게 하시고 억눌리게 하시고 밑바탕으로 깔려버리게 하심으로 진정한 기쁨을 누리며 평강을 만끽하는 성탄절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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