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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께 빚지는 체질 회개>의 줄거리: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존재를 회개한다는 것은 존재의 속성이 되어버린 두 가지 죄적인 체질을 묶고 제어하여 활성화의 스위치를 꺼버리는 것입니다. 즉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입니다. 하나님께 빚진다는 말은 하나님께 손해를 끼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손해를 끼치면서 내 인생 내가 살게 한 체질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빚지는 체질 회개
(누가복음 13:4~5)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 빚지는 체질 회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 빚지는 체질 회개’
지난 금요일에 이어서 “행위 말고 존재를 회개하라”는 같은 주제에 대하여 4~5절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제목은 하나님께 빚지는 체질을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 제가 중고등학생 시절에 수도 없이 반복하여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돈에 대해 가장 올바른 마음가짐은 돈을 많이 벌겠다는 생각이나 결심이 아니다. 절대로 빚을 지지 않겠다는 결심이 돈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마음가짐이다.”라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하셨는지 모릅니다. 또 그러면서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싼 것을 먹고 싼 것을 쓰고, 심지어 못 먹고 못 쓰더라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이를 악물고서라도 빚은 져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한번도 돈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빚을 지지 말라고만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그렇게 주장하셨기 때문에 저는 여름에 입는 티셔츠를 20년 넘게 입고, 90년에 광화문 지하도 좌판에서 9,000원 주고 산 바바리코트를 지금도 입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수입산 보다는 국내산이 비싸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서는 소고기는 물론이고 국내산 돼지고기를 먹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사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고 있는 저에게는 돈을 많이 벌라는 대신에 빚지지 말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달게 느껴지고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아들에게 지금까지 기회만 있으면 표현은 다르더라도 같은 내용의 말을 해왔습니다. 하나님께 빚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 남기고 죽으면 저는 아들에게 남겨줄 유산을 다 남겨준 것이라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빚을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 공짜로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공짜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빚을 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빚을 진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소유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처럼 무력하고 미미한 존재들이 어떻게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손해를 끼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는 주권 침해를 통해 하나님께 빚을 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가 늘 언급하는 내용이기에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의 심각성은 장난이 아닙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 대한민국에서 빼앗은 것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주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주권을 빼앗기 위해 민족문화를 말살시키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물적 재산, 역사적 유물들, 언어 등 엄청나게 다양한 방면에서 대한민국을 수탈하였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주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보다 더한 하나님의 주권을 날마다 약탈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체질은 하나님의 주권에 손해를 입히고 훔치고 강탈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빚진 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예를 들어 봅니다. 제가 사고를 내서 상대방의 차가 파손되었다고 가정해봅니다. 이제 저는 상대방 차주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꼭 돈을 빌려야만 빚을 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훼방하거나 소유에 손해를 입히는 것도 빚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손해를 끼치고 빚을 지면서 살아갑니다.
한편 이렇게 손해를 입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빚을 진 우리에게도 손해가 발생합니다. 일본이 대한민국의 주권을 강탈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강탈하고 손해를 입히면 하나님의 주권과 계획안에서 최선으로 계획된 보시기에 좋은 나의 인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끌림을 받을 때 주변사람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은총을 차단하여 이웃에게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에게 삼중 손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끊임없이 훔치고 훼방하고 훼손함으로써 하나님께 빚지는 체질을 회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빚지는 체질에 대한 회개는 곧 내 인생을 내가 산 것에 대한 회개입니다. 내 인생을 남이 살아줄 수는 없기에 내 인생을 내가 산다는 것은 무척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볼 때는 내 인생을 내가 사는 것처럼 말이 안 되는 사건은 달리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75억 인구가 돈 문제로 고민하며 삽니다. 돈 문제를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 모습을 천사들이 본다면 가장 이상하고 망측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내가 사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본래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에 이끌려져야만 하고 하나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타락하였고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대한민국의 주권을 강탈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탈하며 살게 되었고 이것이 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문을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특별히 죄가 더 많아 죽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금 죽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큰 죄인들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죄와 예수님께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저울에 올린다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사람들이 죽은 것은 모두에게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로 알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앞서 갈릴리 사람들이 제물을 드리다가 빌라도의 군인들에 의해 칼에 맞아 죽은 사건에 대해서 언급된 죄는 빗나감을 의미하는 하마르톨로스(ἁμαρτωλός)로 표현되었습니다. 한편 본문의 죄는 오페일레타이(ὀφειλέται)로써 ‘채무자’라는 뜻의 오페일레테스(ὀφειλέτης)를 원형으로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에는 이러한 존재의 두 가지 체질로써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을 회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빗나가는 체질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요약해보자면 마음 채움의 기쁨을 위해서 하늘에 계신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 이외에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빗나가는 체질의 특성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을 과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한편 오늘은 실로암 망대 사건을 통해 빚지는 체질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12절의 주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죄가 바로 본문에 나타난 채무자라는 뜻의 오페일레테스입니다. 12절 말씀을 직역해보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자들을 용서하여 주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손해를 끼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시대상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실로암 망대는 빌라도에 의해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물 문제를 개선하기 위하여 실로암 연못으로부터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이 수로를 지키는 망대가 바로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었습니다. 망대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높이 쌓아 올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공사 중에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명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인식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건물이 무너져 사람이 깔려 죽는 사고는 큰일이었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사비용의 출처입니다. 당시에 빌라도는 이 공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로마의 국고나 백성들에게 걷은 세금을 사용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전의 헌금을 약탈해서 비용을 충당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고를 당한 열여덟 사람 또한 약탈한 돈에서 품삯을 받으며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전의 헌금은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고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을 따라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을 위해서 쓰고 구제에 쓰일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헌금을 약탈하여 자신의 정치를 위해 사용하였고 공사를 하던 노동자들은 그 돈을 품삯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사고가 발생하여 죽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된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한 사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총독으로부터 품삯을 받아 일을 한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은 맞으며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가 주어진 것임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약탈한 헌금으로 품삯으로 받는 것만이 하나님에 대한 도둑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것을 도둑질하며 손해를 끼치고 빚지는 체질로 살아가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망대가 무너진 사건은 오히려 사람들의 빚지는 체질을 드러내는 하나의 비유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율법도 지켰으며 회당에서 모임도 가졌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하나님께 빚을 지거나 손해를 끼친다는 생각을 하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실로암 망대 사건에서는 하나님의 것을 훔쳤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명확한 사건을 비유로 삼으셔서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존재의 체질을 문제시하십니다.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움직이고 말할 때마다 하나님께 손해를 끼치고 하나님께 빚을 지며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훼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로암 망대 사건을 비유로 삼아 단적으로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강탈하는 것입니다. 존재를 회개한다는 것은 존재의 두 가지 속성을 회개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존재 즉 나의 인격의 상태로부터 소원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에서 소원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주권은 침해당하고 강탈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체질은 공통적으로 마음이 육체의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들에 종속될 때에 나타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는 것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대상들입니다. 그 모든 대상들을 육체의 오감이 포착할 때마다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반응하게 됩니다. 그 대상에 이미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권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이 대한민국의 주권을 강탈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지금도 용서하지 못할 마음의 분노를 느낍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끊임없이 독도를 자기들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러한 기사를 볼 때마다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생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내가 건강을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은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듯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찾아도 나의 판단대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찾게 됩니다. 자녀나 돈 문제에 대해서도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합니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서만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주인 됨을 주장하며 살아갑니다. 일본이 독도뿐만이 아니라 서울도 부산도 인천도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며 대서특필한다면 무척이나 어처구니없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일본공관으로 쓰이고 인천공항의 모든 안내가 일본어로 되어 있고 모든 세금을 일본이 가져가고자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상상해보면 얼마나 이상한 광경인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한 일이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자행되고 있습니다.
본래 나는 배우자에 대해 자녀에 대해 단 하나의 판단도 떠올릴 자격이 없습니다.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으며, 직장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고, 정치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사건,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을 무시한 채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죄를 견디고 계시는 것이지, 하늘에 있는 천군천사들이 볼 때는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너무나도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 계획하신 내 인생에 대하여 무지막지한 손해를 끼쳐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삶이었다면 전지전능하심으로 보시기에 좋으신 대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내가 살아온 삶을 회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보다 큰 죄악이 없고 이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몹쓸 짓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끌려졌다면 배우자와 자녀로부터 시작하여 회사 동료나 친구들과 이웃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기에 내게서 일어나는 일이 나의 이웃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삶에서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환영함으로써 본래의 계획대로 이끌려질 수 있었다면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멋대로 살아갈 때에가족과 이웃들의 모습과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의 가족과 이웃들의 모습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존재의 회개이어야만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행위의 대한 반성이나 뉘우침은 진정한 회개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오감을 통한 대상을 붙잡을 때 빗나가는 체질의 죄를 짓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반성하고 뉘우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을 얻기 위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 지금과는 다른 행동을 해야 하겠다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여전히 완고하게 빗나가는 체질을 붙잡은 상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방금 빨래한 것 같이 깨끗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은 깨끗해 보이나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과 시체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행위의 회개를 아무리 할지라도 그 속에는 죄가 가득합니다. 존재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회개는 오히려 하면 할수록 죄는 깊어집니다. 회개할수록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독하는 것이고, 회개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존재를 회개하되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기쁨과 만족을 위해 소원하게 되는 빗나가는 체질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감으로 포착하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하는 빚지는 체질을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 체질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의 자의 의식을 갖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나의 주체성의 손과 발이 못 박혔으므로 어떤 일에 대해서도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는 것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여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중절모자를 찾아 헤매는 법은 없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관광을 소원할 수는 없습니다. 감옥에 갇힌 중에는 기껏해야 담배나 과자를 소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리산 속에서 사는 사람이 신선한 광어회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는 자아의식을 갖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소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은 세상에 못 박혀 죽은 것이고 오감에 포착되는 대상들에 대해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소원의 화살이 하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돌아섬으로써의 회개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통해 돌아설 때 나의 주체성은 비활성화됩니다. 주체성의 스위치가 꺼지는 것입니다. 빗나가는 체질도 빚지는 체질도 육체를 근거하기에 육체가 살아있는 한 근원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이러한 체질을 비활성화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활성화 스위치를 꺼버리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십자가를 붙잡고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았어도 오늘 일이 바쁜 가운데 십자가를 잊어버릴 때 주체성은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에서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럴 때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은 다시 활성화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존재의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을 동시에 비활성화시킴으로써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가시고 내 마음의 공백은 하늘을 향하여 소원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의식을 갖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이 회개는 사진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한 번 회개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체질에 대한 회개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간 죄의 체질은 다시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는 존재의 회개는 동영상처럼 이어져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상태는 회개를 지속하는 상태입니다. 이 회개의 상태가 지속될 때에 하나님을 항상 소원함으로써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가장 크게 봄으로써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을 매사에 인정함으로써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짐으로써 주님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 회개의 정수입니다. 존재를 회개하는 십자가 자아의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자아의식은 빗나감의 체질과 빚지는 체질을 비활성화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에덴의 삶을 회복시키며 복지의 삶을 열어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의 목표는 존재의 회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존재의 회개를 동영상 상태로 유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빗나가는 체질과 빚지는 체질이 비활성화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내 삶을 사시는 기적을 날마다 반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