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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하나님만 소원할 수 있으려면_태승철 (누가복음 13:6~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0.12.30|조회수9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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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만 소원할 수 있으려면>의 줄거리:

하나님께서 선민 한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바는 그리 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소원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 한 가지 기대를 충족시켜드리지 못합니다. 소원은 실재하는 것 중에서 내게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없음을 느끼며, 내게 없음을 증오하고 두려워하고 못 견뎌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봅니다.

 

하나님만 소원할 수 있으려면

(누가복음 13:6~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만 소원할 수 있으려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만 소원할 수 있으려면’

지난 시간에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다가 빌라도의 칼에 맞아서 죽게 된 갈릴리 사람들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죽게 된 참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들을 빗나감의 죄와 빚지는 죄의 비유로 삼으셨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인간 존재의 체질이 되어버린 빗나감의 죄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빗나감의 죄와 빚지는 죄는 항상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성경에서는 이 빗나감의 죄를 더 근원적인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빗나감의 죄가 극복되고 지양되고 억제될 수 있을 때 빚지는 죄도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 죄는 구분하여 말할 수 있지만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빗나감의 죄란 결국 소원의 과녁이 빗나갔음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소원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소원의 정의를 다시 내려 봅니다. 소원은 “실재하는 것 중에서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실재하는 많은 대상들이 있습니다. 다만 만족하고 기쁘기 위해서 실재하는 모든 것들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없음을 강하게 느끼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없음을 강하게 느끼는 것이 소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소원은 어떠한 대상이 없는 상황이 너무나 싫고 두렵고 견딜 수 없는 마음 상태입니다.

우리에게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지만 모든 대상들에 대해 없음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특별히 꼭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대상에 대해서만 없음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한 배우 톰 크루즈는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실재하는 인물이지만 내 옆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톰 크루즈가 내 옆에 없음을 의식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본래 내 옆에 있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대통령의 자리는 실재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내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 자리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의식하지 않습니다. 대통령 자리가 내게 꼭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소원은 실재하는 대상 중에서 어떤 특정한 대상이 내게 없는 상황이 너무 싫은 것입니다. 즉 그것이 없는 게 너무 싫고 너무 증오스럽고 너무 두렵고 너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에서 “하나님만 소원할 수 있으려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소원의 정의와 연관하여 풀어보자면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을 증오하고 두렵고 견딜 수 없게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소원하기는 입으로 하는 고백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증오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건강이 상해도 고통스럽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무척 힘들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견뎌보겠습니다. 승진을 못해도 이를 악물고 참아보겠습니다. 합격을 못해도 다음 기회를 봅니다. 취직을 못해도 견뎌내겠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들이 무시해도 견뎌내겠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이 너무 증오스럽고 너무 두렵고 너무 지긋지긋합니다.”라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 소원해요, 나 하나님 좋아해요.”라는 말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소원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소원하는 사람은 돈이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합니다. 돈이 없는 상황을 그런대로 견뎌내고 있다면 돈에 대한 소원은 그만큼 약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건강을 소원하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상황을 견디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 소원하기는 일상 속에서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망각되고 중단되기 십상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6절을 보면 특이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라고 하셨습니다. 대체 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일까요? 그런데 이러한 일은 당시에는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포도원의 빈자리에 무화과나무나 감람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도 포도원의 빈자리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있는 상황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겨있다는 것은 포도원의 포도나무보다 주인의 관심이 특별히 집중되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시고자 의도적으로 이러한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다른 많은 비유에서 포도나무는 중요한 상징물로써 활용되었으나 오늘 비유에서는 포도원에 있지만 포도나무가 아닌 무화과나무가 주인의 관심을 받는 대상으로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포도원의 포도나무는 온 세상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해 주인이시지만 무화과나무처럼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시는 선민들이 있습니다. 선민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선민들은 하나님께 한 그루 무화과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마치 한 사람을 관심하듯이 관계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에는 특별한 기대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는 하나님의 기호를 알면 정확하게 집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하신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랑이란 예수님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성령님이시고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신 예수님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복사판 영으로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또한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복사판 영으로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일체가 되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 이 신비로운 관계를 인간이라는 피조물에 연장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인격자로 지으셨습니다.

다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하나라면 인격적 선택의 과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로봇처럼 존재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과 하나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과 하나 되기를 바라시며 하나님께서 들어가실 자리로 마음의 공백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발생하는 흡입력으로 하나님을 소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의 삶은 물론이고 육체가 죽은 뒤의 삶 또한 낙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는 상태를 증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계시지 않는 상태를 지긋지긋하게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삶을 기쁨이 가득한 낙원이 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타락함으로써 더는 기쁨이 가득한 낙원의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절대평강이 기준이 됩니다. 절대평강에는 기쁨과 만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족하지 않고 기쁘지 않은데 평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절대평강을 누리지 못한다면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 때문에 기분이 나쁜 상태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배우자는 나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를 보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절대평강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기분이 나쁜 근본적 이유는 배우자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자녀는 무슨 수를 써도 나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 마음이 좋지 않은 이유는 내 마음 안에 반드시 계셔야 될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절대평강을 기준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절대평강이란 이 세상에는 이유가 없는 평강입니다. 이러한 절대평강을 누린다는 것은 동시에 절대기쁨을 누리고 절대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절대평강을 누리도록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음으로 걱정합니다. 그러나 돈은 걱정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에서 생긴 걱정을 돈 때문이라 착각할 뿐입니다. 따라서 돈을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7절을 보면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삼 년이라는 기간이 언급됩니다. 삼 년은 물론 심은 지 삼 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시점을 기준으로 삼 년이 지났다는 의미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일 년에 서너 번 열매를 맺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삼 년 동안 열 번 가까이 열매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 것입니다. 주인의 기다림은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가지셨던 기대입니다.

하나님은 선민들에게 반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셨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며 얼마나 강력한 세상의 주권자이신지에 대해서도 계시해주셨습니다.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은 세상일을 걱정하거나 소원하지 말고 세상 것들이 없는 상황을 증오하거나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 사십 년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광야는 세상의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 250만 명이 사십 년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역사가 선민들이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신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신 열매는 바로 하나님을 소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를 증오하고 지긋지긋하게 여기며 하나님에 대한 소원을 드러내기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매력을 보여주셨고 좋으심을 드러내셨고 주권자 되심을 드러내심으로써 세상 것이 없음에 대해 소원할 필요가 없음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선민들은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못했고 증오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돈과 건강이 없음을 증오하였고 형통하지 못함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직장에서 승진이 되지 않음을 괴로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들이면서도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하지만 하나님을 소원하지 않습니다. 소원은 실재하는 것 중에서 내게 없음을 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셔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니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돈이나 건강이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자녀가 실패하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에 대해서는 지긋지긋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실재하심과 최고로 좋으심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 되시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이 없음을 걱정하고 소원할 필요가 없음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선민들이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하고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증오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빗나간 존재의 체질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실재하는 분으로 느끼며 소원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실재하는 것 중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런데 실재하는 것을 느끼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인간의 감각은 육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을 우선시하기에 오감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은 뒤로 밀리게 됩니다. 오감으로 세상을 계속해서 포착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달콤한 콜라를 잔뜩 마신 뒤에 과일을 먹으면 단맛이 다 사라지고 밍밍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존재하심을 계시하시고 좋으심과 주권자 되심을 가르쳐주셔도 존재의 체질이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세상 것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느낄 때는 하나님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그 외의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육체의 오감을 통해 포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육체의 오감에 의존하여 세상을 느끼는 동안에는 오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기에 소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재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 문제를 우선시하여 실재로 느끼는 것이 문제입니다. 돈이라는 콜라를 마셨으니 사과이신 하나님의 단맛을 느낄 수가 없고, 건강이라는 콜라를 마셨으니 무화과라는 하나님의 달콤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도원지기가 등장합니다. 8~9절을 보면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일 년만 유예해 주기를 구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번의 기회를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소원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소원하기를 인격적으로 이룰 수만 있다면 하나님은 일사천리로 만사를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이라는 자들이 이 소원하기 하나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빗나간 죄적 체질이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을 콜라로 먹게 합니다. 오감으로 포착되지 않으시는 과일이신 하나님의 달콤함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콜라 먹은 사람이 과일을 소원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지기가 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라는 과일 대신 오감이 포착하는 세상의 콜라를 먼저 마시게 되는 체질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은 세상을 탈출하는 사건입니다. 누가는 앞선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 또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별세를 향해 가시는 과정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탈출하시고자 하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길이 되시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육체가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감으로 포착하는 콜라들을 더 이상 마시지 않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별세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오감으로 포착하는 콜라에 대해서 죽고 콜라가 없는 세상 바깥으로 마음이 나갈 때 비로소 과일이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갈 때만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 할 수 있습니다. 단물이 떨어지는 오렌지, 싱싱하고 달콤한 포도, 한 입 깨물면 즙이 배어 나오는 사과와 같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목마르게 하시고 소원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이 도달하신 부활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자리에서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증오하고 지긋지긋하게 여기며 가장 두려운 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십자가를 기억함이 하나님을 소원함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은 생각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분이시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생각으로 붙잡을 수 있고 의식으로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회사 안에서 오감으로 포착하는 상황을 실재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통증의학에서 고통이 너무 심한 환자에 대해서는 고통을 느끼는 신경 자체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콜라와 같이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을 과일과 같은 하나님보다 먼저 실재하는 것으로 느끼는 존재의 체질을 끊어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하는 인간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로서 찍어버리는 것 외에는 용도가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지긋지긋하게 여길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속아서 돈이 없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몸이 아픈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자녀가 형통치 못한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남편은 아내의 잔소리를 지긋지긋하게 여깁니다. 원수를 지긋지긋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포도원지기로 오셔서 십자가 사건을 이루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모든 자들은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보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먼저 실재의 대상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상태를 싫어할 수 있고 지긋지긋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 앞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할 때에 배우자라는 콜라를 마시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느낀다면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 마주하는 순간에도 “하나님, 제 안에 들어와 주세요.”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돈이라는 콜라를 마실 수가 없습니다.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의 모든 대상에 대해 죽는 곳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오감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게 됩니다. 돈 문제를 앞에 두고도 돈이 아닌 하나님께서 안 계신 상황을 증오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소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일들은 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부디 여러분의 살과 뼈와 세포에까지 받아들여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버지의 살아계심과 아버지의 매력과 아버지의 좋으심과 아버지의 주권자 되심을 누누이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의식을 가짐으로써 오감을 통해 다가오는 콜라들을 제치고 하늘에 계신 과일이신 아버지 한 분만을 갈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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