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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하나님 현실감이 최고의 복_태승철 (누가복음 13장 18절~21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02|조회수9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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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현실감이 최고의 복>의 줄거리:

새해 인생살이를 셋방살이로 하느냐, 전세살이로 하느냐, 자가살이로 하느냐? 새해에는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겠는가? 하는 등등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비용없이 천국살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더는 지옥살이의 예고편인 세상살이를 반복하면 안 됩니다. 천국살이로 바꾸는 간단한 비결을 소개합니다.

 

하나님 현실감이 최고의 복

(누가복음 13장 18절~21절)

 

18.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현실감이 최고의 복>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현실감이 최고의 복’

2021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이 새해에 큰 복이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런 인사를 드리면 의아해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예전에 이런 인사는 중단하자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이 인사가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늘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라는 말로 바꾸어 보아도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 편하시다면 그냥 두기로 하고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고자 합니다. “희망찬 새해”라는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이란 땅에서의 삶 즉 평면상에서의 미래를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마음을 보내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희망차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만 이 또한 내용을 바꾸면 위를 향한 희망, 하늘을 향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희망찬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어제 본문에서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비유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만 비유는 짧지만 담긴 내용은 간단치 않습니다. 먼저 18~19절의 겨자씨 비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최고의 복은 바로 하나님 현실감입니다. 우리가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복들을 줄줄이 끌어오기 때문에 하나님 현실감이야말로 최고의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인생살이가 좀 나아질 것을 기대하셨습니까? 셋방살이가 전세살이가 되고 전세살이가 자가살이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막연한 기대는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미래가 아닌 지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작년 내내 원치 않는 형편으로 감옥처럼 둘러싸여 있었고 새해에도 감옥살이 같은 삶이 예상된다고 할지라도 한탄할 필요도 없고 불행하게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주어진 형편이 어떠하든 새해에는 천국살이로 바꿀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이 땅 즉 ‘나’라는 사람의 영역으로 확장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옥예고편의 세상살이가 아닌 천국살이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처한 환경이 천국살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이유는 천국은 땅 위로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임하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될 일이나 준비 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여러분의 삶의 실제상황이 어떠하든지 천국살이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스스로 내 삶 안으로 확장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천국의 확장을 받아들이고 천국살이를 할 수 있을까요? 세상살이와 천국살이의 차이점을 알 때 천국살이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는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에 있는 대상들로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기대로 채워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 천국살이는 천국의 특징대로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곧 천국의 특징이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특징은 천국 안에 있는 모든 각각의 존재들이 하나님 한 분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빛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나도 천국에 있는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기운이 발산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는 이 세상의 삶의 조건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살이를 고집한다면 지옥의 예고편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육체를 입은 사람이 어떻게 이 땅에서 천국을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 따져보기에 앞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를 시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 땅에서의 천국살이가 어떠한지에 대해 아무리 말로 설명을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 도달하고 나면 진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국살이가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꾸 “육체로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천국을 살 수 있으냐? 세상을 담쌓고 살아도 괜찮으냐?”라는 질문을 반복할지라도 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육체가 있다고 해서 천국살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천국살이를 한다고 세상에 담쌓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나면 다 깨달아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 어떻게 충만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소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소원하기가 지속되면 천국살이는 이루어집니다. 이는 곧 하나님 소원하기가 나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당신은 뭐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사람은 “저는 아무개의 아버지입니다.” 혹은 “저는 누구의 남편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에 앞서 “저는 하나님을 소원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을 소원하기는 쉬워도 하나님 소원하기가 잘 되지 않는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소원을 갖는 것 자체는 쉽습니다. 문제는 그 소원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갖기는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소원하기에 도달하면 하나님이 솔선수범해서 내 안에 충만하게 들어오시고자 하십니다. 세상 소원하기처럼 내가 이루려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소원하는 단계까지만 갈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가 돈에 대해 소원한다고 해서 돈이 알아서 내게로 오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대통령 자리를 소원한다고 해서 대통령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소원한다면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주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곧 천국의 특징이 내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삶은 천국살이로 바뀌게 됩니다. 천국살이는 세상에서 부족함과 결핍에 대해 불감증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족함과 결핍을 느끼지 못하고 항상 기뻐하고, 항상 만족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삶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져도 상관없이 그냥 좋고 그냥 감사하고 그냥 기쁩니다. 그 기쁨과 감사와 만족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무조건 그대로 하면 됩니다. 거침없이 살면 됩니다.

이렇게 좋은 하나님 충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소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소원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을 소원합니다. 소원하다 지쳐 죽는 한이 있어도 세상에 대한 소원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소원은 하면 할수록 마음이 가벼워지고 소원의 성취는 내가 아닌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데도 불구하고 소원하기를 하지 않습니다. 소원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자씨 비유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내용입니다.

 

언제가 말씀드렸지만 겨자씨는 실제로 지구상의 모든 식물 중에서 가장 작은 씨는 아닙니다. 다만 유대 땅에서 재배되는 작물의 씨 중에서는 가장 작다는 것입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분께서 겨자씨를 가져오셔서 직접 보았습니다만 마치 참깨 부스러기 같이 생겼습니다. 모양을 눈으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습니다. 그런데 이 부스러기 같은 겨자씨가 채소임에도 불구하고 3~5미터까지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 현실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을 소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소원하기는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이 커질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처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시작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은 겨자씨와 같이 작습니다. 그런데 시작은 작았으나 하나님 소원하기를 통하여 천국이 임하고 천국의 특징인 하나님 충만이 이루어질 때는 하나님의 현실감이 무성하게 자라난 겨자나무처럼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소원하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상대방으로 인식하면서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삼라만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이 나의 마음의 공백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하고 최고로 좋으신 분이시다. 또 그 하나님은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나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에 대한 주권자이시다.”라고 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진척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사실로 믿고 창조주시며 주권자이심도 사실로 믿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이론에 대해 아무리 인정하고 수용하고 믿고 사실임을 고백할지라도 그 하나님이 현실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별도의 일입니다. 현실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예를 들어봅니다. 수백억 매출을 자랑하는 탄탄한 중소기업의 사장님을 아버지로 둔 자녀를 생각해봅니다. 실제로 그러한 아버지를 가진 자녀를 직접 보기도 하였습니다만 남들과 다른 티가 납니다. 이들에게는 또래의 젊은이들이 가진 문제들이 문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또래들은 경제적인 문제로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만 이들에게 결혼문제나 경제문제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재력이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사장 아버지를 두었다는 현실감이 문제의식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돈 문제, 진로문제, 취직문제, 결혼문제, 자녀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삶의 대부분의 문제가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집니다. 고작 아버지가 중소기업 사장님이라는 현실감을 가졌을 뿐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인생 최대의 짐이 될 수 있는 일들이 아무런 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중소기업의 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을 현실로 느낀다면 이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창조주이고 역사의 주권자로 믿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이 현실로 받아들여진다면 그에 합당한 변화 또한 일어나게 됩니다. 중소기업 사장이 아버지만 되어도 삶의 문제들이 대부분 해결되는데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현실이라면 애초에 문제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돈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건강이 안 좋은 것도 문제로 여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때 우리에게는 어떠한 상황도 문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현실감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할 때에 우리의 의식이라는 채소밭에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겨자씨가 심겨집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느끼는 현실감의 크기를 내 눈앞에 존재하는 배우자나 자녀의 현실감의 크기와 비교해본다면 어떨까요? 그 대상이 내 마음의 희로애락을 좌우하는 정도에 따라 현실감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배우자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면 회사에 나가서 일을 하고 동료들을 마주해도 배우자 때문에 상한 마음이 회복되지를 않습니다. 회사보다 일보다 동료들보다 배우자의 현실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대학입학에 실패하자 누구를 만나고 무슨 말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자녀의 현실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에 대한 현실감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할 때에 갖게 되는 현실감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하나님의 현실감은 겨자씨 정도가 아니라 제로상태입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싹이 터서 컸을 때 그 어떤 채소보다도 더 무성하게 커지듯이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으로 바뀔 때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때에 지옥예고편의 세상살이가 중단되고 천국살이로 바뀌게 됩니다. 현실감의 힘이 이렇게 강력합니다.

현실감의 크기는 그 대상이 내 마음에 어느 정도로 기쁨과 만족을 좌우하느냐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한 무게를 어느 정도로 느끼느냐를 통해 하나님 현실감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청년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할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사랑에 취해 있을 때는 돈 걱정이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최고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감의 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을 어떻게 키우고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누가는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위해 가시는 과정 중에 이 사건을 포함시켰습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도 나타나지만 전혀 다른 맥락에서 언급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의 별세를 위해 가신다고 명시해 놓고 그 과정 속에 하나님 현실감에 대한 내용을 포함시킨 것입니다. 하나님 현실감이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 대상들의 현실감보다 월등히 커지는 기적 같은 역사가 우리가 누려야 할 최고의 복입니다. 현실감만 커지면 하나님 소원하기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이론이 현실감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최고로 좋고 유일하게 마음 채움을 위한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 이론을 믿고 받아들이고 사실로 인정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것을 현실감으로 느낀다면 하나님을 소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것은 돈보다도 좋다는 것입니다. 건강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승진이나 출세나 성공보다도 좋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심을 현실로 느낀다면 하나님 대신 돈이나 권력을 소원할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론으로 소개되고 있는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을 사실로는 인정을 하지만 현실로 느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소원할 수도 없습니다. 소원은 현실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느끼는 것을 소원하기 마련입니다. 현실감이 없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는 소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을 키울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예고하십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분명한 현실로 느낍니다. 그러한 대상들이 마음의 희로애락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를 묵인하고 출발점으로 삼을 때에 삶은 세상살이가 됩니다. 세상 것으로 채워진 상태를 소원하고 세상 것으로 채우려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살이로는 결코 마음을 채울 수 없기에 지옥살이의 예고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것은 이러한 세상살이가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버림당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세상의 대상들에 큰 현실감을 느끼는 나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 지기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부활에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나의 의식이 계속해서 십자가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몸과 연관된 세상은 십자가 바깥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반복할 때에 하나님의 현실감은 커지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의 채소밭에는 배우자라는 현실감의 씨, 자녀라는 현실감의 씨, 돈과 건강이라는 현실감의 씨, 취직과 승진 등의 현실감의 씨가 심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에 자리에 이르게 되면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실감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나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도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유지하는 동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고 맛볼 수도 없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버리고 육체의 오감을 통해 포착하는 세상의 대상들을 현실로 느끼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천만번 불러도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을 현실로 인정하기로 의식이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감으로 포착되지 않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현실로 느낄 수가 없으니 소원할 수가 없고 소원하지 못하니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천국의 특징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천국살이가 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현실감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건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이론을 사실로 느낄 수 있다면 삶의 어떠한 일들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현실로 느낄 수만 있다면 삶은 천국살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10절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하늘이 내려오게 됩니다. 돈 문제든 건강 문제든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 알아서 해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의 대상들을 현실로 느낄 때는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이 되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야만 합니다. 마음이 부활에 자리에 이를 때에 하나님이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합화를 보실 때에도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실 때에도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셨습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시고 세상의 대상들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시는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수 있습니다. 지옥의 예고편인 세상살이가 될 것인지 천국살이가 될 것인지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낄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배우자를 현실로 느끼고 있는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으면 배우자의 현실감은 겨자씨만큼 작아지고 하나님의 현실감은 겨자나무만큼 커집니다. 이때 배우자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붙잡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현실감이 겨자씨만큼 작아지고 배우자의 현실감은 겨자나무만큼 커집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천국살이는 시작될 것이고,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없다면 배우자의 문제를 현실로 느끼며 지옥예고편의 세상살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소원하기만 하면 소원의 성취는 소원의 대상인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현실감입니다. 하나님 현실감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분명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지속될 때에 하나님의 현실감은 채소밭에 심긴 겨자씨처럼 무성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그럴 때 삶의 문제들의 현실감은 사소해집니다. 배우자의 현실감은 배추, 자녀의 현실감은 당근, 돈의 현실감은 시금치처럼 사소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현실감을 겨자나무와 같이 느끼는 2021년 새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새해는 천국살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충만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 현실감을 채소밭에 심긴 겨자나무처럼 가장 크게 느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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