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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S) 하나님 외엔 다 무시되는 복_태승철 (누가복음 13장 20절~21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04|조회수7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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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외엔 다 무시되는 복>의 줄거리:

천국이 내게 임함은 내게서 하나님이 최대 현실감의 대상이 되시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가 최고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복은 여기서 끝나지를 않습니다. 또 다른 커다란 복을 가져옵니다. 하나님밖에 안 보이는 복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보이는 한 복이 없는 겁니다. 돈을 보는데 하나님이 보이는 상태가 복입니다. 복을 완전 정복합니다.

 

하나님 외엔 다 무시되는 복

(누가복음 13장 20절~21절)

 

20.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외엔 다 무시되는 복>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외엔 다 무시되는 복’

‘무시하다’라는 말은 없을 무(無)에 볼 시(視)를 써서 시선이 없음을 뜻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시선을 할애할 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대상에 시선이 향해 있기에 그 외의 대상에 대해서는 시선을 할애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전을 보면 무시를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다시 풀어보자면 “하나님께 마음의 시선을 드리기 위해 세상에 할애할 시선이 없는 상태가 복이다”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시선을 드리는 사람은 돈의 가치나 의의를 무시하게 됩니다. 마음에서 돈을 깔보고 업신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복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 현실감이 최고의 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며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무시의 복은 이 최고의 복에 이어지는 복이라 할 수 있으며 복의 완성 단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복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 외에는 무시하는 복으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나님 현실감이야말로 최고의 복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최고의 복을 누리다 보면 복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복의 완성이 바로 하나님 외에는 다 무시하는 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최고의 복과 복을 완성하는 복은 붙어있습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란 오복으로 정리됩니다. 건강, 장수, 재물, 출세, 자녀가 오복에 해당되고 이와 비슷한 내용들이 언급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복은 진짜 복일 수 없습니다. 진짜 복은 이러한 오복을 무시하는 것이 복입니다. 재물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실제로 수중에 재물이 있든지 없든지 재물에 마음의 시선을 향합니다. 그러나 있어서 보든 없어서 보든 마음의 시선이 재물을 보고 있는 한 그 재물은 저주입니다. 재물과 관계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복은 오직 무시하는 복뿐입니다. 하나님을 보느라 재물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는 하나님이 주신 존재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시선이 배우자를 향하는 동안에는 배우자는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복은 무시하는 복뿐입니다. 하나님을 보느라 배우자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야말로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복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도 하나님이 주신 존재입니다. 그러나 부모 마음의 시선에 자녀가 보이게 되면 자녀는 저주가 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얻을 수 있는 복은 무시하는 복뿐입니다.

세상의 오복이나 배우자나 자녀까지도 저주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우자와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면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이미 체감하고 계실 것입니다. 배우자 때문에 기쁘고 만족하고 즐거웠던 시간보다 괴롭고 불편하고 짜증나고 부담스러운 시간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우자와의 삶은 저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바라보는 시간 동안 기쁘고 만족하는 시간보다 화나고 불편하고 불만스러웠던 시간이 많았다면 저주가 된 것입니다. 배우자나 자녀뿐만이 아닙니다. 돈이나 건강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 마음의 시선을 향하게 될 때 그것들은 저주가 됩니다. 우리가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보기 위해 이 모든 것들을 무시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시선이 없는 상태인 무시(無視)의 반대되는 표현으로 시선이 존재하는 상태라는 뜻으로 ‘유시(有視)’라는 말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유시하느라 내게 주어진 것들을 다 무시할 때에 진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위해 세상의 모든 대상들을 무시할 때에 비로소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무시해야 한다고 하니 “부부싸움을 해서 각방을 쓰는 상황이라도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을 뿐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어느 때보다도 배우자를 엄청나게 크게 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배우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만큼이나 마음으로는 배우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존대하고 있고 크게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복은 이와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눈으로는 배우자를 보고 있을지라도 마음에서는 무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에서 세상의 대상들이 무시될 때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은 세상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세상의 대상들은 복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음에서 배우자가 무시되어야 배우자를 향해 웃을 수 있고, 마음에서 자녀가 무시되어야 자녀를 향해 웃을 수 있으며, 마음에서 돈이 무시되어야 돈 문제를 향해서 웃을 수 있습니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이 복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배우자를 보느라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저주입니다. 자녀를 보느라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자녀는 저주 그 자체입니다. 돈을 보느라고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면 이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건강을 보느라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헤아릴 수 없는 저주입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양상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임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모습은 바로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통해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날마다 반복하는 것입니다. 추구와 도달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에 우리 삶에 하나님 나라는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의 모습을 겨자씨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붙잡게 되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하나님의 현실감은 겨자씨와 같이 작습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이 세상 대상들의 현실감에 비하자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에 마음이 도달하기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할 때에 하나님의 현실감은 세상의 어떤 대상들보다도 커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장 큰 현실감으로 느껴진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소원하게 되고 하나님을 소원함이 유지되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음에 충만해지면 그 증거로 절대평강 절대기쁨 절대만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치 작은 겨자씨가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현실감의 최고의 복은 그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무시로 이어지게 됩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부가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습니다. 서 말은 22리터나 되는 엄청난 양입니다. 이때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누룩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누룩이 들어가서 22리터나 되는 밀가루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합니다. 부풀어 오른 밀가루 반죽은 어디에도 누룩의 기운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우리에게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다 보면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이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즉 십자가는 곧 나와 세상이 분리되는 곳입니다.

세상이라 함은 나의 몸도 포함이 됩니다. 몸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이웃, 친구, 직장동료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는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의 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외국의 일들 또한 실은 내가 몸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에 관련이 생기고 인연을 맺게 됩니다. 뉴스에서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나 북한 소식이 나오면 귀가 솔깃해지고 외국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면 걱정하기도 하고 안심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몸으로부터 출발된 연관성에 의해 세상 즉 지구 전체를 의식합니다. 나는 몸을 통해 세상을 의식하고, 나의 배우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통해 세상을 의식합니다. 부부가 같이 살아도 자기 몸으로부터 세상을 의식하기 때문에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다른 의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각자 다른 지구를 하나씩 갖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부가 자녀를 낳게 되면 그 자녀도 몸으로 세상을 관계하며 세상에 대한 고유의 의식을 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하는 일에 따라 세상을 의식하는 범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몸을 통해 세상을 관계하며 고유의 의식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통해 의식하는 세상을 밀가루 반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밀가루 반죽의 모양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부부가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도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의식은 다릅니다. 남편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자동차에 관심이 많다면 남편이 사는 지구는 정치와 자동차의 영향력이 큰 지구인 것입니다. 한편 아내는 남편과는 전혀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세상을 의식합니다. 아내가 사는 지구에서는 정치와 자동차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남편과는 전혀 다른 지구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것은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추구하게 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단 하나의 대상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누룩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반복하는 동안에 내가 의식하는 세상이라는 반죽에 하나님이라는 누룩이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가 몸을 통해 의식하는 세상은 엄청나게 방대하기에 거대한 반죽과도 같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기에 작은 누룩과 같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생활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추구하는 동안 어느덧 세상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누룩에 의해 부푼 반죽 어디를 떼어보아도 누룩이 들어있듯이, 눈으로는 배우자를 보고 있는데 마음의 시선에는 하나님만 보입니다. 또 눈으로는 분명히 자녀를 보고 있는데 마음에는 자녀가 아닌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복이 완결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일 원수인 빌라도를 보실 때에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사울 왕을 볼 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았기에 사울을 하나님이 세운 왕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또 다윗이 도망가는 길에서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보았을 때 장군들은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다윗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통하여 자신에 대한 책망을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볼 때 저주를 당하는 상황이 복을 누리는 상황으로 바뀌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팔아버리는 저주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저주의 상황이 변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동안 자기를 파는 형들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원수 역할을 하는 형들의 존재를 깔보고 업신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보느라고 형들을 바라볼 시선의 여분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형들에게 팔리는 저주의 사건이 복으로 뒤집히는 순간이 됩니다.

 

여러분이 한 해를 사시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할 것입니다. 돈 문제는 큰일입니다. 돈 문제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복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 방법은 바로 돈을 깔보는 것입니다. 돈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업신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기 때문에 돈에 대해서는 시선을 할애할 여분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과의 관계에서 복을 누리는 방법입니다.

돈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돈이 있다고 좋아할 수도 없고 돈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은 무시할 대상입니다. 이것이 돈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복을 완결 짓는 방법입니다.

자녀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대학 들어가면 끝날 것 같았던 걱정은 취직문제로 이어집니다. 취직하면 걱정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결혼문제입니다. 결혼하면 끝인 줄 알았더니 또 손자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복을 완결하는 법은 자녀문제를 깔보고 업신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를 끊임없이 야단을 치는 이유는 자녀를 대단한 것으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로 인해서 나의 기쁨과 만족이 좌우된다고 믿고 있기에 자녀에게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가 큰 존재로 보이는 한 자녀는 저주덩어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배우자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나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좌우할 정도로 크게 보이는 한 배우자는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 크나큰 저주덩어리입니다. 배우자를 복덩어리로 바꾸고 싶으시다면 배우자는 무시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배우자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무시는 시선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대상들에게 마음의 시선을 두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눈으로 안 보는 것은 무시가 아닙니다. 일부러 눈을 피하는 만큼 마음으로는 여전히 엄청나게 크게 보고 있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는 보아도 마음의 시선에서 세상은 무시 되어야만 합니다.

누룩 비유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나의 지구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입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잡으면 마치 유체이탈이 일어나듯이 마음이 세상과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 마음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오게 되고 커다란 밀가루 반죽 같았던 세상은 무시되고 하나님만 보이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도 이 사람에게서 복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를 보실 때에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셨고, 가룟 유다를 보실 때에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대하실 때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고 계셨고, 들에 핀 백합화를 보실 때에도 공중에 나는 새를 보실 때에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복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었기에 육체의 죽음조차도 평강의 복을 빼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눈으로 세상의 어떤 대상을 보는 동안에도 마음으로는 하나님만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나의 지구로부터 유체이탈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유체이탈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세상은 나의 몸을 출발점으로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몸으로 의식하는 세상은 밀가루 반죽입니다. 십자가로 마음이 세상을 유체이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으면 눈으로는 수백, 수천, 수만 개의 대상을 보면서도 마음에서는 하나님만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심지어 원수까지도 복과 은혜로 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누룩의 비유로부터 성도의 교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누구나 몸으로부터 출발해서 자기만의 지구를 갖고 살아갑니다. 부부가 팔십 평생을 같이 살아도 서로 다른 지구에서 살아가는 셈입니다. 법적으로는 부부관계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보아도 남편은 남편의 지구로 자녀를 대하고 아내는 아내의 지구로 자녀를 대합니다.

한편 성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마음이 세상을 유체이탈한 상태에서 수천, 수만 개의 대상들을 볼 때도 하나님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박 집사님이 하나님을 보고 있는데, 최 집사님도 똑같은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똑같은 지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교제는 지구가 합쳐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로 살아도 성도가 아니라면 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아도 성도가 아니라면 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성도라도 십자가를 통하여 나의 지구를 유체이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꼭 붙잡고 하나의 지구를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시(有視)하는 동안 세상에는 할애할 시선의 여분이 없어집니다. 마음에서 세상을 무시(無視)하고 깔보고 업신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 또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보느라 배우자를 업신여기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안으로 배우자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부부로 살아도 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유시하느라 세상을 무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유시하느라 배우자를 무시하고, 하나님 유시하느라 자녀를 무시하고, 하나님 유시하느라 돈을 무시하고, 하나님 유시하느라 건강을 무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일 년 내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나의 지구를 유체이탈 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삼라만상 모든 대상에게서 하나님을 보고 삼라만상에서 복됨을 획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에서처럼 하나님 나라가 내가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일 년 내내 십자가 생활화를 하게 하시고 평생토록 십자가 생활화가 이어지도록 붙잡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 현실감이 최고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보는 시선만 남고 나의 지구 안에 있는 모든 대상을 무시함으로써 그 대상들이 모두 복덩어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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