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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좁게 살며 광활히 자유하라_태승철 (누가복음 13장 22절~24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06|조회수7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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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좁게 살며 광활히 자유하라>의 줄거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셔서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그렇게 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나 광활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자유는 가벼움입니다. 속박과 부담이 없습니다. 자유는 신바람입니다. 지치지 않는 자발적인 에너지가 나옵니다. 자유는 올바름입니다. 방종이나 자의가 없습니다. 자유는 그래서 창조적인 결실에 이릅니다.

 

좁게 살며 광활히 자유하라

(누가복음 13장 22절~24절)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좁게 살며 광활히 자유 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좁게 살며 광활히 자유하라’

‘광활히’라는 말은 평상시에는 잘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막힌 데가 없이 트이고 넓다는 “광활하다”의 부사입니다. 즉 광활히 자유하라는 것은 막힌 데가 없이 트이고 넓게 자유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2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광활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절대평강, 절대기쁨이라는 말들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절대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얻게 되는 광활한 자유란 첫 번째로 가벼움입니다. 마주 대하게 되는 모든 대상에 대해서 가벼워집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과제든 책임이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대하게 될 때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져서 마음에 부담과 속박이 사라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광활한 자유란 신바람입니다. 부담과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과 책임과 과제에 대해서 부담과 속박과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고도 자발적이고 지치지 않는 생의 에너지로 즐거움 가운데 관여하고 참여하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광활한 자유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방종과 자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광활한 자유는 세 번째 특성으로서 올바름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름이 있기에 광활한 자유 속에서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과 뜻하는 의지는 항상 올바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벼움과 신바람과 올바름을 통해 광활한 자유의 마지막 특성으로 창조적 결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헛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공허한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반드시 창조적인 결실로 이끌려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광활한 자유는 좁은 문으로 들어감을 통해 주어지게 됩니다. 좁은 문의 반대개념이라면 넓은 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넓은 문은 좁은 문과는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무겁습니다. 늘 속박과 부담에 짓눌려 삽니다. 그리고 신바람 대신에 억지 춘향이 됩니다. 죽지 못해서 살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에 하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과 뜻하는 의지는 모두 오류로 나타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창조적인 삶과는 무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광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속적 의미에서 자유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광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자유남편과 자유아내가 되어야 하고 자유부모가 되어야 하며 자유자녀가 되고 자유청년 자유직장인 등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에게는 광활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넓은 문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간다고 덩달아 넓은 문을 향한다면 무겁게 짓눌리고 부담에 깔리고 신바람 대신 억지 춘향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오류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어떤 창조적 결실도 맺을 수 없는 공허한 삶의 시간이 지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해에는 이러한 시간을 단 한 시간도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넓은 문이 좁은 문에 비해서 갖는 장점은 넓다는 것 한 가지뿐입니다. 넓기 때문에 들어가려는 마음 먹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을 신뢰의 이유로 삼아 덩달아 넓은 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새해에는 덩달아 사는 것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덩달아 넓은 문에 발을 들여놓을 때 부담과 무거움에 짓눌리고 억지 춘향의 삶을 살아가며 오류투성이의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은 공허한 계산서를 받아들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2021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을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2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선민 즉 아브라함의 자녀로 여겼습니다. 특별한 죄인이 아니라면 구원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신 유대인들의 모습은 결코 아브라함의 자녀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나 서기관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하셨습니다. 또한 앞서 갈릴리 사람들이 참변을 당하고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을 통해 그들이 특별히 죄가 더 많아서 재앙을 당한 것이 아니며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통해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에 천국의 확장을 경험할 수 없다면 천국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천국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극히 제한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은 입사경쟁에서 자주 쓰입니다. 모집은 30명인데 지원자가 300명이 모였다면 좁은 문이라고 불릴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좁은 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문자 그대로 문자체가 좁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은 경쟁률이 높거나 정원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좁기 때문에 사람들이 꺼려한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한 답변으로 문을 비유로 삼으셨다는 점이 굉장히 특이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원이란 종교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종교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구원에 대한 질문을 문으로 비유하십니다. 이는 곧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임을 정의하고 계십니다.

문은 지금 있는 곳과는 분리된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구조물입니다. 이러한 문의 특징을 염두에 둔다면 구원은 지금과는 구분되고 분리된 다른 상황으로 들어가는 통로와도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에는 문이 있습니다. 문을 통해서 방과 방은 구분됩니다. 거실에서 안방으로 작은 방에서 큰 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꼭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이것을 삶에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상태에서 부요한 상태로 가고자 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등용문(登龍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직이 없는 상태에서 벼슬아치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문에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문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종교적인 일로만 생각되던 구원의 문제가 종교를 넘어선 인류 보편적 사건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문을 통과하는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상황에서 돈이 있는 상황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을 가져도 만족할 수가 없어서 또 다른 상황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찾게 됩니다. 이번에는 명예를 얻고자 정치의 문으로 들어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만족이 안 되어서 다른 문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은 끊임없이 문을 통과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의 문을 통과하고 나면 또 다른 문을 찾아서 다른 상황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반면에 구원은 더 이상 다른 상황의 문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이 너무 만족스럽고 기쁘고 행복해서 더 이상 다른 상황으로 옮겨갈 문을 찾지 않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문을 통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문을 찾을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할 수 있는 문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넓은 문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들어가기 쉬워 보여서 넓은 문을 선택하지만 결국 또 다른 문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되기에 천신만고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선호되지 않기에 찾는 사람도 적습니다. 이 좁은 문 너머에는 더 이상 문을 찾지 않아도 되는 참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바라며 문을 통과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향하여 문을 통과하려는 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종교가 절대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사람은 종교와는 관계없이 구원을 위하여 문을 통과하려는 시도를 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구원을 지향하며 살아가기에 구원은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24절 하반부를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 문을 통과하려 하지만 실제로 구원에 이른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여러 문을 거치며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도달할 수는 있을지언정 구원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또 다른 문을 찾아야 될 필요가 없을 만큼 완벽히 좋은 상태에 이르지 못합니다. 구원은 완벽하게 좋아서 더 이상 다른 것을 바라지 않게 되는 상황입니다. 너무 좋고, 완벽히 좋고, 끝까지 좋고, 날마다 새롭게 좋아서 더 이상 다른 상황으로 가기 위한 문을 찾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이 좁은 문을 통해서만 가능한 이유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공백 안으로 들어오셔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는다면 가난하다가 부자가 되어도, 부자가 국회의원이 되어도, 국회의원이 대통령이 되어도 다음 문 찾기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대통령 또한 나름대로 날마다 다른 방으로 들어가고자 문을 찾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을 향한 비난이 없는 방, 지지율이 높아지는 방, 정책에 국민들이 잘 따라주기를 원하는 방, 정책이 결실을 이루는 방을 비롯하여 마음의 문은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삶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마음의 공백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마음은 채워지게 됨으로써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더 이상 문을 찾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바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의 의미는 22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별세를 향해 가시고 계심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의 별세는 곧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의 연쇄사건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좁은 문입니다.

넓은 문은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에게서 마음 채움을 기대하는 것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아주 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만져지는 대로 세상에서 마음 채움을 기대합니다. 이것이 넓은 문을 통과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내를 문 삼아서 기분이 좋은 상태로 넘어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런데 아내라는 대상은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입니다. 아내를 문 삼아서 나은 상황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아내는 본래 마음 채움과는 무관한 존재이기에 기쁨과 만족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부담과 억눌림과 스트레스만 생겨나게 됩니다. 행여나 잠시나마 아내 때문에 기분이 나아졌다고 할지라도 지속되지를 않습니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다른 불만이 생겨납니다. 아내의 문으로는 기쁨과 만족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으니 이제 다른 문을 찾게 됩니다. 이번에는 친구를 문 삼아서 조금이라도 기쁨과 만족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친구 또한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기쁨과 만족을 요구할 때에 부담과 억눌림만 남게 되고 짜증만 납니다. 그 짜증에서 비롯된 친구에 대한 모든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오류가 됩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 창조적인 어떠한 일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손에 만져지는 대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려는 것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이기에 문 안으로 들어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참 기쁨과 참 만족은 생겨나지 않고 천근만근 무거운 삶, 억지춘향의 삶, 생각마다 느낌마다 의지마다 오류투성이의 삶이 이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스트레스를 참고 진땀을 흘려도 창조적인 결실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 삶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든 넓은 문을 차단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대상마다 문으로 보이니 세상의 문은 넓어 보입니다. 그러나 발을 들여놓을 때 삶은 지옥의 예고편이 됩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넓은 문이 펼쳐집니다. 세상의 넓은 문은 우리를 들어오라고 환영합니다. 기쁨이 없는 상태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족이 없는 상태에서 만족이 있는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마치 문마다 스피커를 달아놓고 “이 문으로 들어오면 기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라고 떠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소리를 듣고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며 세상의 넓은 문으로 들어간다면 지옥의 예고편은 시작됩니다.

우리는 오감으로 포착하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기쁨을 기대하고 만족을 기대하는 넓은 문이 열릴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며 차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치 문을 닫고 못질을 해서 들어갈 수 없게 하듯이 폐쇄시켜야만 합니다. 주님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배우자라는 문, 자녀라는 문, 돈이라는 문, 건강이라는 문을 비롯한 세상의 넓은 문들을 모두 닫아버리고 부활의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부활의 자리는 마음이 하나님만으로 채워짐을 소원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마음을 채워주십니다. 이 상태에서 십자가 너머의 세상을 마주대할 때 비로소 자유가 나타납니다.

배우자에게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지 않을 때 비로소 배우자와의 관계가 가볍게 느껴집니다. 신바람이 생겨납니다.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올바름이 존재하기에 배우자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에 오류가 없게 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결실이 맺어지기 시작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문으로 생각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기쁨과 만족이 없는 상태에서 자녀를 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녀라는 문을 폐쇄시켜버리고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의 자리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부활의 자리에 머물며 자녀를 보면 자녀와의 관계는 가벼워집니다. 자녀는 신바람의 대상입니다. 자녀에 대해 오류가 없는 올바른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와의 관계에서 결실이 맺어집니다.

 

이처럼 좁은 문은 광활한 자유를 얻게 합니다. 넓은 문이라고 쉽게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엄청나고 막중한 부담에 짓눌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넓은 문들을 모두 닫아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쁨과 만족이 없는 상태에서는 세상의 대상들이 문으로 여겨집니다.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유혹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면 내 마음을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 너머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해서는 광활한 자유가 펼쳐지게 됩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백 가지 천 가지 대상들에 비하면 구원은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넓은 문을 젖혀둔 채 의식으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따라가는 좁은 문의 삶을 살아갈 때 상상할 수 없는 광활한 자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좁은 문 인생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고 주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당당하고 단호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만 그 안에는 자신(自信) 즉 자기를 믿는 마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걸고 있고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쁨과 평강과 만족을 다 걸고 예수님 없으면 살 수 없는 이 사람이야말로 온 지구를 향해서 가장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주저함 없고 지체 없이 올바른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으로 신바람 나게 깃털처럼 가볍게 오류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오감이 포착하는 모든 대상에서 우리의 의식은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과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이 세상을 향한 광활한 자유를 만끽하실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새해에는 좁은 문 인생의 광활한 자유를 만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한 해 동안 오감으로 포착하는 수만 수백만의 모든 대상들 앞에서 넓은 문을 닫아버리고 십자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반복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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