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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

녹취문: 변수에 무관하게 내 일정 살기_태승철 (누가복음 13장 31절~33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1.08|조회수76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변수에 무관하게 내 일정 살기>의 줄거리:

외부 변수와 외부 자극 그리고 외부 도발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휘말리지 말고 그냥 무심하게 나만의 일정을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변수에 당황하고 자극에 흥분하고 도발에 휘말리느라 정작 내 인생을 나답게 사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실속 있게 나를 살기 위해서는 일상적으로 정해진 내 일정에 예수님의 일정표를 덮어쓰면 됩니다.

 

변수에 무관하게 내 일정 살기

(누가복음 13장 31절~33절)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변수에 무관하게 내 일정 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변수에 무관하게 내 일정 살기’

외부의 변수, 외부의 자극, 외부의 도발이 둘러싸고 있을 때 민감하게 반응하고 휘말린다면 내 인생을 나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변수에 당황하고, 자극에 흥분하고, 도발에 휘말린다면 더 이상 내 인생은 없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일주일을 살아도 일 년을 살아도 공허합니다. 마음에 들어차는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외부환경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반응하고 산다면 내실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마치 기계처럼 반응하는 동안 나를 잃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나타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의 삶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은 위험을 지각하면 움츠리든지 도망가든지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러한 반응으로 일관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삶은 인생의 항로를 잃고 표류하는 삶이 됩니다.

그렇다면 외부적인 변수나 자극이나 도발에 휘말리지 않고 나답게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의 일정표를 덮어씌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일정 위에 예수님의 일정을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일정표는 만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만납니다. 나의 일정에 예수님의 일정표를 덮어씌우게 되면 더 이상 외부의 변수나 자극이나 도발에 휘말리지 않고 내가 나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일정 또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만남의 실질적인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만나서 하신 일이란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들어와 계시는 상태를 드러내시고 알리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면서 당신의 일을 하심으로써 드러내실 때가 많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본문에서 언급된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일정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고 계심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도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경우에는 사진기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영사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진기는 외부에 있는 물체의 상을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반면 영사기는 내부에 있는 필름 속의 영상을 밖으로 투사합니다. 사진기 안에 들어있는 필름은 외부의 상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비어있습니다. 그러나 영사기의 필름은 바깥으로 투사하기 위하여 영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외부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민감하다는 것은 내 속이 사진기의 필름처럼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가득 차 있으면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내 속이 비어있기에 외부에서 발생하는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제가 언젠가 아들아이와 함께 맥도널드에 갔습니다. 아이가 자꾸 옆에 사람들이 움직이거나 앉거나 하면 쳐다봅니다. 마주 앉은 저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옆의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해주었던 말이 앞서 말씀드린 내용과 같습니다. 속이 차 있지 않기 때문에 자꾸 옆의 사람을 신경 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큰 소리로 이야기한 것이 아님에도 아들은 다른 사람들이 대화를 들을까봐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의식하게 되는 이유는 내 안이 차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외부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고 눈치를 보는 삶에는 자유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한 직장생활의 비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의 성격이 아주 고약하다면 외부적인 변수고 자극이고 도발입니다. 그 사장님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고 무심한 채로 나대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물론 제 말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일정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에 직장에 나가면 사장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일정에 예수님의 일정을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장에서도 사장님을 상관하지 않고 사장님의 눈치를 안 보고 나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선한 뜻으로 예수님께 와서 헤롯왕의 살해계획을 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들은 악의로 헤롯과 결탁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32절에서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헤롯의 심부름꾼이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본래 바리새인과 헤롯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는 한 마음이 되어서 작당을 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비겁한 종자였고 헤롯은 꾀가 많은 여우였습니다. 헤롯이 원한 것은 자신이 관할하는 통치영역 안에서 예수님으로 인한 소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자기주장을 쉽게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왕 한 사람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은 소요나 분란으로 여겨졌습니다. 헤롯이 다스리던 영역은 갈릴리와 요단강 동편의 베뢰아 지역이었습니다. 헤롯은 이 지역에서 예수님이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바리새인들 또한 예수님이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라 비난하셨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은 보일 수 없었던 능력과 권세 있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대중들의 인기와 존경과 권세가 약화됨과 모독을 느꼈기에 예수님이 떠나기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헤롯은 정치적인 이유로 바리새인들은 사회적인 이유로 예수님이 자신들의 지역을 떠나가기를 바라는 동안 일치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비겁하게도 평소에는 적대시하던 헤롯의 왕권을 등에 업고자 하였고, 헤롯은 헤롯대로 꾀를 내어 바리새인들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겁박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헤롯의 협박이 예수님께 효과를 발휘하리라 믿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붙잡혔다가 참수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살해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은 단순한 공갈이 아닌 실질적인 위협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비겁하게 헤롯의 권력을 등에 업고 예수님께 와서 떠나라고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바리새인과 헤롯의 작당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헤롯을 여우라고 비난하십니다. 잔꾀를 부리고 있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원하는 대로 이 지역을 떠나는 대신에 앞으로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일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33절을 보면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의 일정을 말씀하실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해당 지역의 통치를 위한 전권을 지닌 왕에게 살해를 당하실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앞으로 하실 일을 말씀하시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헤롯의 예수님 살해계획은 예수님의 일정에 대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헤롯이 죽일지도 모른다는 변수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본래의 일정표 그대로 유지해나가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예수님이 사람을 만나게 되는 모든 일은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은 정해진 일정을 소화해나가심에 있어서 조금도 굽힘이 없으십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예수님은 정해진 일정을 소화해가십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을 변수로 여기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의 사형을 결정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가 사형집행을 인가하고 실행하게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만남들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해 가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만남과 일을 당신의 일정으로 소화해가십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만나야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만남과 상황들을 대할 때에 외부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지 않고 나의 일정을 소화해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남편을 만날 때에 남편이라는 외부 요인으로부터 발생하는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지 않고 남편과의 만남 속에서 나의 일정을 소화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를 만날 때에도 자녀로 인해 발생하는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지 않고 나의 일정을 소화해가는 과정으로써 자녀를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의 상사나 동료들을 만날 때에 이들로부터 발생하는 변수나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지 말고 나의 일정으로써 나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일정을 살아가시는 모습으로부터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정표를 받아들이고 나의 일정표에 덮어씌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2절에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오늘’이란 변수가 닥쳐있는 지금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헤롯이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변수에 반응하지 않고 본래의 일정을 소화해나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또 내일과 제삼일을 언급하셨습니다.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하여지리라’는 말씀은 일을 끝내고 완성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별세를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별세의 과정은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이어집니다. 이 일련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늘이란 변수가 발생한 헤롯의 살해협박과 제삼일로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의 사이에 내일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오늘과 내일과 제삼일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예수님의 일정을 소화해나가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일정표를 나의 일정표에 덮어씌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일정을 소화해 가시는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는 일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시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현상에 집중합니다만 예수님이 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셨는지를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한 사람 안에 현존하고 계시는 상황을 알려주시고자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 안에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성령으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꼭 침 흘리고 옷 벗고 미치광이처럼 뛰어다니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이 또한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말씀들을 떠올려보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하고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세상을 소원하는 것이 바로 죄로서의 빗나감의 체질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오감에서 비롯된 주체성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시키고 찬탈하는 악으로써의 빚지는 체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빗나감의 체질과 빚지는 체질은 사탄의 개입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소원하지 않고 돈 벌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귀신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제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 참여하신 분과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분께서는 평소에 주식을 하고 계셨는데 주식투자를 멈추라는 말씀을 따라 주식을 다 팔고 주식에 대한 관계를 끊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식투자를 하는 분들은 하루에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주식현황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귀신이 들린 상황입니다. 제가 그분에게 주식투자를 멈추라 말씀드렸고 받아들이신 상황은 적어도 그분에게서 주식투자에 관심을 쏟도록 만드는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는 최대의 관심사일 수 있습니다. 그때 십자가에서 자녀에 대해서 죽으라는 말씀을 따라 자녀에 대해 죽을 수 있었다면 자녀에게 집착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 전 병원이나 약국도 없던 시대에 웬만한 사람은 크고 작은 지병을 앓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안에 창조주이시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삼일에 그리스도 별세 사건을 언급하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별세 사건을 받아들이고 따라오는 자들에게 예수님과 똑같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일정표에 예수님의 일정표를 덮어씌울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실 때처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 고약한 사장님을 대할 때에 사장님이 뭐라고 하든지 나는 내 안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사기 속의 필름에 영상이 가득한 것과 같습니다. 이전에는 사진기와 같은 마음으로 외부의 변수나 자극과 도발을 받아들이기에 바빴습니다. 사장님을 받아들여야 할 외부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로 여기는 동안 삶은 한없이 휘말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게 되면 하나님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이려 계획하던 헤롯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듯이, 고약한 사장님을 스크린으로 생각해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투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누구나 외부의 변수와 자극과 도발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속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속을 무엇으로 채우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은 사람은 속을 돈으로 채우게 됩니다. 일단 채워졌기에 돈으로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돈은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오히려 못돼먹은 행패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으로 차게 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은 하나님을 표현하게 됩니다. 이것이 아니면 온전히 나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이 유식함을 드러내고, 돈 많은 사람이 재력을 드러내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 권력을 드러내듯이, 우리는 마음을 채운 대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채우면 채우는 대로 악취를 냅니다. 한편 이 세상 것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남들의 눈치를 보며 복종하고 굴종적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악취를 내며 살든 눈치를 보며 살든 온전히 나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으로 속을 채우게 되면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삶에서 본연의 일정을 소화해나가게 됩니다.

 

제가 아침마다 십자가 복음방송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설교를 잘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설교가 나의 일이 아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예수님이 일정을 소화하는 방식대로 저의 일정 또한 소화할 수 있기를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별세 사건을 앞당겨 따름으로써 예수님의 일정표를 나의 일정표에 덮어씌울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고 아직 채워지지 않았더라도 하나님만을 강력하게 소원하는 상태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삶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변수나 자극 혹은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별세의 과정을 따라가서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는 부활에 자리에 머물게 된다면 직장에 나가서 고약한 사장님을 대할 때에도 하나님이 오시고 하나님을 드러내게 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를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장님에게 휘말리지 않고 아내나 남편에게도 휘말리지 않고 자녀에게도 휘말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내 몸의 상태에도 휘말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지막 제삼일의 일정을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 안에는 이미 하나님이 들어와 계셨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마지막 일정을 우선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만나게 하시는 사람을 만나고 하게 하시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들어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만나게 하시는 가족관계나 가족의 일, 직장관계를 비롯한 모든 만남과 일에서 예수님의 일정 중의 제삼일을 우선 따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삶의 변수가 생겨난 오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만남이 계속 진행되어야 하는 내일에 대하여 예수님이 일정을 소화하시듯이 나의 일정을 소화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정을 살면 외부의 변수나 자극과 도발에 전혀 휘말림이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진기가 아닌 영사기가 되어서 하나님이 드러나심으로 나답게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살렘의 별세 사건을 먼저 따름으로써 하나님만을 강력하게 소원하는 마음상태로 준비시켜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사람과 일을 마주함으로써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나의 삶으로써 일정을 소화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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