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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온라인교회

녹취문: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함께하기 상원교회 말씀축제_태승철 (대하 20:1~3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0.02|조회수119 목록 댓글 0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함께하기

상원교회 창립50주년 말씀축제

(역대하 20:1~30)

 

20.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24.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25.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

26.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27. 유다와 예루살렘 모든 사람이 다시 여호사밧을 선두로 하여 즐겁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 적군을 이김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28. 그들이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에 나아가니라

29.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30.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의 하나님이 사방에서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함께하기”

제가 방송을 시작한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전에는 성도님들을 모시고 말씀을 전하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말씀을 전하려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뉴스 앵커들이 카메라맨을 앞에 두고 뉴스를 전하는 심정으로 하다 보니 익숙해졌습니다. 이렇게 성도님들이 앞에 앉아계시니 오랜만에 쫄리는 기분이 듭니다. 양복도 오랫만에 입으니 단추가 채워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도님들을 뵙고 말씀을 전하니 긴장이 되면서 동시에 마음이 즐겁습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내세울 만한 성과를 이룬 사람이 아니기에 무슨 말씀을 드리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나 하나 올바르게 믿다가 죽으면 그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업적이다.”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어떻게 믿고 사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해결했다는 식의 간증은 아닙니다. 성경을 토대로 해서 믿음으로 사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것이 혹시 여러분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바라건대 많은 기대는 하지 마시고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목을 “하나님을 여호와로서 함께하기”라고 지었는데 시시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이 제목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는 뜻이 있으며, 우리는 여호와라는 이름에 맞게 보여야 할 태도와 마음가짐이 있고,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다면 여러분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들은 모두 이론과 교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는 예배당에 갇혀있는 것에 불과한 신앙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에 맞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나님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에서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경험하고 살고 있으니까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제가 믿음으로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뜻은 멀리 신학자들한테 가서 물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정한 본문에서 읽지 않은 6절을 보면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며 모든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삼라만상을 지으셨고 여러분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성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호흡을 주장하고 계시기에 이 자리에 앉아 계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따로 갖고 계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여쭙기를 13절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하나님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셔서 지금도 우리의 호흡까지 주장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려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까? 이것은 성경공부 시간에 말하는 임마누엘 같은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한 구분이 되십니까?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려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씀의 의미에 맞는 합당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당에서 충성 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본격적인 출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주신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선민이 선민인 이유는 모든 이방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유독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이름 이외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더 가르쳐주셨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인데 이것을 선민에게만 가르쳐주신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민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왜 선택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온 나라를 다 만드시고 관장하시고 우주를 지으신 분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셨습니다. 부부처럼 애인처럼 혹은 주인과 종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선택하셔서 관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덧붙여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공부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 대중 앞에서 세례 받으면서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싶으시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에 맞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절대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무슨 소리냐? 내가 지금 믿은 지가 얼마인데. 내가 장로이고 권사이고 목사이고 구역장이고 권찰인데.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니 그럴 리가 있는가?”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직분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에 합당하고 알맞은 마음가짐을 갖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착각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여호와라는 이름에 맞는 마음가짐을 모르거나 가진 적이 없다면 직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과 함께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고 하나님을 몰라도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모르고 살아도 일본처럼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도 장수 마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보다 특별히 못 살지 않습니다. 문제는 지금 저와 여러분이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함께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그리고 함께한다는 것은 무엇이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관계하고 싶어 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이 바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이 이름을 모르면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라도 하나님과 관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드린 제목의 의미는 분명히 전달이 되었을 줄로 압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라고 합니다. 선민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여호와라는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름의 의미가 여러분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할까요? 여러분이 시장을 볼 때, 여러분이 직장 생활을 할 때, 남편과 아내가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할 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에 대한 믿음은 적용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여호와로 믿는다는 믿음은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실제 삶에서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나님을 여호와로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관계하려면 관계할 사람에게 가르쳐주신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그 의미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에 맞게 살고 태도를 보이고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것을 앞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의 뜻이 동전의 앞면이라고 한다면 뒷면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면 저는 어떤 자일까요? 저는 스스로 있는 여호와가 있게 하신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만 스스로 있는 분이고 나머지는 모두 있게 된 것들입니다. 스스로 있는 분이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 목사님도 있게 하셨고, 신 목사님도 있게 하셨고, 장로님들도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있게 하신 것들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존재감”이라는 말을 사용해볼 수 있습니다. 존재감은 곧 존재의 무게입니다. 예를 들어 권찰님들끼리 모여 있는데 권사님 한 분이 오시면 권찰님들이 다 일어나서 인사를 하시고 시선도 권사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권사님의 존재의 무게가 제일 크기 때문입니다. 일반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입사원과 대리와 과장과 차장과 부장과 전무와 사장이 모였습니다. 이 모임에서 모든 사람들은 사장을 봅니다. 그 회사 안에서 사장만 스스로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에서 시작해서 전무까지 다 사장님이 있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장님이 있는 모임에서는 사장님의 존재감이 제일 큽니다. 사장님이 제일 신경 쓰이는 사람이고 제일 의식이 많이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입사원 하나가 “사장님도 스스로 있는 여호와께서 있게 하신 분이다. 이 자리에서 존재감의 1등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사장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이러한 생각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마음에서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 중에서 최고의 존재감을 찾습니다. 존재의 무게, 신분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에 집중합니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그 사람의 인상이 어떤지, 그 사람의 심기가 편한지 불편한지를 따집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심장을 뛰게 하시고 숨을 쉬게 하시니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고 말씀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스스로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있는 분에 의해서 있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완전히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회사에 가면 사장님 눈치만 봅니다. 대리는 과장 눈치만 봅니다. 과장님의 존재감이 1등이라서 과장님이 뭐라고 하는지 신경을 씁니다. 과장님에게 잘 보여야 승진할 수 있고, 사장님에게 잘 보여야 승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지만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십니다. 회사도 사장님도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시며 최고의 존재감의 대상이심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눈에 보이는 남편이 신경 쓰입니다. 남편이 뭘 해달라고 할 것인가, 뭘 먹고 싶다고 할 것인가, 얼마나 나를 괴롭힐 것인가를 생각하며 남편의 존재감에 대해 온 신경을 씁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을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집을 있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잊어버립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만 스스로 있고 너희 모두는 있게 된 것들이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완전히 까먹어 버린 채 살아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연예인 교회에 있었습니다. 배우 최민수 씨가 유명하지 않을 때 그 교회에 다녔는데 제가 전도사를 하던 시절입니다. 어떤 청년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중앙통로 벽 뒤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찢어진 바지를 입고 있기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더니 일부러 찢은 바지라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분이 배우 최민수 씨였습니다. 최민수 씨는 지금은 대단한 존재감의 배우이지만 당시에는 전혀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한편 희한하게도 연예인 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던 목사님들이 병을 얻어 나가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강단에 서보면 TV에서 보던 배우들이 앉아있습니다. 배우들의 특징은 주연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교회에서 행사를 한다고 하면 목사님들이 어떤 배우를 주연으로 세우느냐는 문제로 비위를 맞추느라 골머리를 앓습니다. 실제로 그러시느라 목사님들이 병이 났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존재감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이 교회에 이정재 씨나 정우성 씨가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계시겠습니까? 그분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면 저는 조용히 짐을 싸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정에서 살 때도 존재감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짐 싸서 조용히 나가시는 상황이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에 대해서만 존재감을 부여하고 느낀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현장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짐 싸서 나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존재감은 뭉개져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존재하실 수는 없습니다. 가정에서 남편하고 자식하고 이야기할 때에는 남편과 자식의 존재감만 느낀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있게 된 것들의 존재감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동안에 하나님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가정에 존재하실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알려주시며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선민들에게 가르쳐주신 이후로 선민들에게는 엄청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각자가 자기 마음에서 치러야 하는 존재감의 전쟁입니다. 존재감은 곧 존재의 무게이고 있음의 무게입니다. 선민의 마음에서 누가 1등의 있음이 되느냐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바로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는 지금의 미국의 대통령보다도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선민들은 바로의 존재감보다 더 큰 존재감의 사람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와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택했다고 하니 마음에서 바로의 존재감을 하나님의 존재감이 이겨야 하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감과 바로의 존재감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의 애굽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지구 위에서 보면 한 덩어리일 뿐이고 우주에서 보면 티끌만 한 땅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에 사람의 마음에서는 바로의 존재감과 하나님의 존재감의 싸움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싸움을 도우시고자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사건을 통해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최고의 존재감의 대상이었던 바로가 초개와 같이 무너지고 애굽 전토가 쑥대밭이 되는 광경을 보여주심으로써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홍해를 가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선민들은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선민들의 마음에서 싸워서 이겨야 될 존재감의 대상은 광야였습니다. 이 광야는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따라 나온 선민들에게는 어린 자식이 있었고 연로한 부모님도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선민들을 일부러 광야로 내모십니다. 광야가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하고 쇄도해 들어올 때 선민들은 존재감의 전쟁에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사건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스스로 있는 자”임을 드러내심으로써 광야를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선민들은 목숨을 위협하는 광야의 무시무시한 존재감과 그들을 선택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감 중에서 어느 존재감을 더 크게 느껴지는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예배당에 있는 사람 중에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의 존재감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정재 씨나 정우성 씨가 들어오면 제 존재감은 갑자기 확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신 목사님께서 “잠깐 이정재 씨와 정우성 씨가 인사를 하도록 해드립시다.”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씀하실 리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말하자면 존재감이란 이런 것입니다. 큰 존재감의 대상이 나타나면 작은 존재감의 대상은 금방 작아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광야의 존재감에 져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뭉개버리게 됩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구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7절을 보면 “…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서 1등을 한 것은 광야에서 먹을 물이 없다는 상황의 존재감이었습니다.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뭉개버리고 물리쳐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심판을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광야의 훈련기간을 보내게 하십니다.

 

한편 그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 알게 된 사실은 가나안 칠 족속은 네피림의 후손이었고 이미 철기문화를 통해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훈련된 군대가 없는 사막을 건너온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메뚜기 같았다고 보고합니다. 가나안 칠 족속의 존재감이 선민 정탐꾼 열 명의 마음을 완전히 정복했고 그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몰아내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나 외에는 스스로 있는 것이 없으며 전부 내가 있게 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칠 족속도 스스로 있는 자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이었습니다. 다만 가나안 칠 족속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선민들과 정탐꾼 열 명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완전히 패배해버리고 쫓겨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에 합당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 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에 대해 어긋난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에서는 가나안 칠 족속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존재감은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14장 22~23절에서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장정 60만 명과 그에 딸린 식구들이 다 죽을 때까지 광야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한편 민수기의 같은 장 8~9절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의 호소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감이 가나안 칠 족속의 존재감을 깨부수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만을 함께할 수 있는 선민으로 보셨고 선언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삼아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이 꼭 그런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여호사밧 왕은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사해 북단의 요단강 동편에 모압이 있었고 그 옆으로 암몬과 세일 산을 영토로 삼은 에돔 족속인 마온이 있었습니다. 이 세 족속이 합쳐서 유다를 진멸하기 위해서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항하는 여호사밧 왕의 행동이 특이합니다. 적군이 연합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서 진을 치고 있는 쪽을 향해야 할 것은 당연히 군대입니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은 노래하는 성가대를 앞세우고 군대는 성가대를 따르게 합니다. 저는 이때 여호사밧 왕의 말을 따르던 성가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기도 없이 총알받이처럼 나가야하는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러시아가 탱크며 포를 가지고 공격을 해오는데 우크라이나가 온 나라의 가수들과 노래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서 앞세우고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똑같습니다. 심지어 군대는 이들 뒤에서 오고 있습니다. 세상에 전쟁이 없던 기간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전쟁의 역사를 읽어보아도 이런 전법을 구사했다는 전쟁은 없습니다. 칼과 창을 든 군대가 무리 지어서 씩씩거리며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무방비 상태의 노래하는 자들을 앞세우고 군대는 그 뒤에서 따라갑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바로 존재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는 쳐들어오는 적군의 존재감이 엄청나게 컸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는데 남편이 돈 못 벌어온 것을 생각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은 금식을 선포합니다. 온 백성이 성전에 모여 울부짖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는 과정 중에 야하시엘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선포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호사밧 왕은 성가대를 앞세워 나가게 됩니다.

여기서 바뀐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한쪽에는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여호사밧 왕의 유다 선민이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전장에 들어섰지만 싸움의 종류가 달랐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에게는 유다 선민들이 적으로써 존재감 1등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다를 잡아먹으려고 씩씩거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여호사밧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자가 마음의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쳐들어오고 있는 연합군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더 크게 승리할 수 있느냐에 대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에게는 그 이름을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들을 주권적으로 인도하고 계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제 유다 백성들에게서 일어나야 될 전쟁은 각자가 마음속에서 무리 지어 오는 적군의 존재감보다, 국가가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상황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어떻게 내 마음에서 이길 수 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먼저 의식되고, 하나님이 먼저 내게 가까이 있는 분으로 느껴지느냐에 대한 전쟁을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이미 끝나 있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성가대를 앞세운 것은 적들의 존재감을 이기신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을 하게 되자 적들에게 반응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분이고 적들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있게 한 것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있게 하시는 분에게 반응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칼과 창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적군에게 반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가대를 앞세움으로써 하나님께 반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 봅니다. 여러분에게 심각한 돈 문제가 생겼다고 해보겠습니다. 남편이 하는 장사가 부도의 위기를 맞아 장사를 끝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직 아이들도 어려서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남편 벌이가 이렇게 되었으니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돈 문제의 위기가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존재감의 강도는 강력합니다. 다른 일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온통 마음이 돈에 사로잡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에도 돈과 관련된 이야기만 들립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의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나는 여호와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나님께서 이름을 가르쳐주셨으니 이제 그 이름에 반응해야만 합니다. 이제 내 싸움은 어떻게 돈 문제를 해결하느냐가 아닙니다.

 

여호사밧 왕에게는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과 어떻게 싸워서 이기느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적군이 쳐들어온 상황보다도 하나님의 있음을 더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적군의 침략은 엄청난 강도로 여호사밧 왕의 마음에 밀려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더 먼저 느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이 있고 전무님이 있으면 존재감이 더 큰 사장님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적군이 있고 하나님이 있으면 여호와의 눈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문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호와의 눈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함은 곧 존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돈 문제의 존재감보다 여호와의 존재감을 먼저 느낄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쟁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성가대를 앞세우고 군인을 뒤로 세웠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꼈음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여호사밧 왕의 마음을 보자면 “모압과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들아 너희는 좀 가만히 있어라. 나는 너희보다도 먼저 계신 하나님께 반응해야만 한다. 내가 하나님께 반응하려니 창 들고 방패 든 군대를 앞세울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성가대를 앞세울 것이다.”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이렇게 존재감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야하시엘 선지자는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선포를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돈 문제가 생기면 돈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 문제의 있음을 붙잡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찾고자 했습니다. “하나님! 이 돈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건강 문제도 해결해주세요! 우리 자식이 잘됐으면 좋겠고 형통했으면 좋겠어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에 자식의 존재감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건강문제의 존재감도 먼저 들어왔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대한민국이 경제위기라고 하면 그 상황이 마음에 존재감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바람피우는 상대를 남편에게 데려와서 “이 사람과 잘 지내도록 당신이 돈도 주고 여러 가지로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선민으로 택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전부 찻잔 속에서 일어나는 태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기를 원해서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을 제공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스스로 있는 자”에 대한 반응은 하나님의 존재감이 우선시 됨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의 과제는 돈 문제의 해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문제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먼저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눈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올바르게 반응하느냐가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돈 문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판으로 끌려 들어옵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 홈그라운드 경기가 있고 어웨이 경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판이 바로 우리의 홈그라운드가 되어야 합니다.

 

돈 문제의 존재감을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해서 돈 문제에 반응해서 “나는 망했구나.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하겠다.”라고 생각해서 마음이 사로잡히고 먹혀버린 상태에서 하나님께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올바른 반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놓고 하나님께 와서 기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의 존재감에 제일 먼저 의식하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반응하지 않고 돈 문제에 먼저 반응해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면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은 언제나 2등이고 3등입니다.

 

기도를 하실 때 기도 제목이 많이 있으실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도 있고 가정을 위한 기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하나님의 눈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할 때 나라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2등으로 밀어버립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할 때에 자녀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3등으로 밀어버립니다. 남편 사업을 위해 기도할 때 사업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4등으로 밀어버립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아버지 사업이 잘될 때는 집에 식모 누나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전라도 진도가 고향인 다순이 누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성산동인 모래내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 동네에 다니면서 개에게 돌을 던지는 못된 아이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정말 욕먹을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개에 돌을 던졌는데 이 개가 끈에 묶여있지 않았습니다. 개가 막 짖으면서 따라오는데 도망가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다순이 누나!”를 부릅니다. 그러면 다순이 누나가 일을 하다말고 빨래 방망이를 들고 쫓아 나와서 개를 쫓아냅니다.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존재감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돈 문제가 생기고 건강문제가 생기고 자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문제를 껴안으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를 물려고 쫓아오는 개를 끌어안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끌어안으면 개는 마음 놓고 물어뜯을 것입니다. 돈 문제의 존재감이 여러분을 사로잡았다면 여러분을 물어 죽이려는 개를 스스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돈 문제가 생기면 돈 문제라는 개로부터 도망을 가서 다순이 누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를 끌어안고 밤새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을 보면 적군의 침략을 안 여호사밧 왕의 반응이 나옵니다. 3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밤새 철야기도를 해도 내가 끌어안고 있는 문제를 보려 합니다. 그 문제의 존재감 때문에 밤새도록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은 겉돌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있는 분이시기에 돈 문제나 건강문제나 자식 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는 있게 하신 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마음에 끌어안고 마음이 빠졌다는 것은 개를 끌어안고 물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돈 문제를 끌어안고 자식 문제를 끌어안으니 내가 편할 날이 없고 괴롭기만 합니다. 문제가 개가 되어 마음을 물어뜯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돈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하나님과 내가 함께하는 새로운 판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돈 문제가 놓여있는 판만 바꾸면 됩니다. 어웨이 경기를 하지 말고 홈그라운드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홈그라운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여호와라는 의미를 아버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라는 이름 속에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만 우리의 아버지로서 개인적으로 관계하시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를 비롯한 인생의 문제들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뭉개버릴 정도로 강렬하게 마음에 쇄도해 들어올 때 그 문제에 달라붙어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판인 홈그라운드로 끌어들일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감에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게 닥친 문제는 전부 하나님의 문제가 되어버립니다.

 

유다에 암몬과 모압과 마온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지 이미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들이 성가대를 앞세우는 결단을 하지 못했다면 어떨까요? 다시 말해서 적군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붙잡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승리를 계획하셨더라도 함께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은 그 문제에 대해서 당신이 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문제를 처리해나가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여호와에 대한 올바른 태도만 보이면 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닥친 문제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사밧 왕이 성가대를 통하여 하나님께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을 드리게 한 것처럼 하나님의 스스로 있음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반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지금까지 겪어왔던 모든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들은 다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문제의 존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장님 앞에서 전무의 존재감을 더 높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리가 과장이 직속 상사라고 해서 사장님 앞에서도 과장의 눈치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사장은 둘 다 쫓아낼 것입니다. 신하가 왕 앞에서 다른 신하의 존재감을 먼저 느꼈다면 반역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동안 이 세상에서 당한 문제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여호와라는 이름에 맞는 태도를 보일 수만 있었다면 당하고 지나온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계획들은 다 이루어지면서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내가 여호와라는 이름에 맞는 태도를 보인 적이 없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여호와 이름에 맞는 태도 보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이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눈에 보이는 것처럼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다면 믿음이라는 말은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보좌에 계신 모습을 드러내셨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려져 계십니다. 이 가려져 계신 하나님에 대해 나타나셨을 때와 똑같이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돈 문제나 건강문제를 비롯한 심각한 문제들이 내 앞에 나타나더라도 하나님이 보인다면 그것은 더는 문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는데 돈 문제는 문제일 수 없습니다. 건강문제도 문제일 수 없습니다. 당장 하나님 품에 안기기만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가려져 계신 하나님이 보이는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라면 무엇도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서 죽게 하냐며 원망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있는 일은 무섭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생겼더라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이유는 돈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로부터 피해서 다순이 누나를 찾듯이 돈 문제로부터 피해서 하나님의 존재감에 마음을 다 드리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움을 아시기에 여호수아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시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이끌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칠 족속을 물리칠 전법을 가르쳐주시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곧 하나님의 있음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있음을 표시해주는 것이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이기에 가나안 칠 족속보다 더 우선적으로 존재감을 느껴야 하는 분이심을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전쟁은 여호수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1장 9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오늘 본문에서도 발견됩니다. 15절을 보면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이름에 맞는 태도를 보이려 하다 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당장 자식이 말썽을 부리면 자식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자며 자식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동안 하나님의 존재감이 뭉개져 버립니다. 참 힘들고 안 됩니다.

 

이렇게 여호와 이름에 맞는 태도를 보이기 어려운 이유는 죄적 체질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기에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고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를 뜻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빗나감을 의미합니다. 내 마음이 스스로 있는 자이신 여호와께 가야 하는데 돈 문제로 향하는 것이 빗나감으로써의 죄입니다. 이 빗나감이 체질이 되어있기에 오늘 말씀을 들었어도 집에 가서 의식적으로 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당장 자식이 말썽을 부리면 자식의 존재감이 우선이 되고, 돈이 없으면 근심이 생겨서 돈 문제의 존재감이 우선이 됩니다. 몸이 이상하면 혹시 암이 아닌가 하며 건강의 존재감이 우선이 됩니다.

 

제가 얼마 전에 각혈을 해서 병원 응급실로 가서 CT 촬영을 하는데 동그란 하얀 점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폐렴은 좀 더 지저분하게 사진이 찍히기 때문에 폐암일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집사람의 얼굴이 한순간에 노랗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가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단 폐렴약을 일주일간 먹어보고 추후 다시 진단을 내리기로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히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물론 저도 무서웠습니다. 폐암일 확률이 높다는 말 한마디에 집사람은 주저앉았습니다. 암이라는 말은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신을 차리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전쟁을 이기고 나서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로 나가면서 감사를 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금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가짜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실제 삶의 현장에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편이 암일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기도 안 하던 권사님도 새벽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우리 남편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폐암만 아니게 해주시고 폐렴이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기도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는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하는 홈그라운드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남편의 폐암이라는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뭉개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가 없어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와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인정하면서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죄의 체질 때문에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이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이 유일한 있음이고 우선적인 있음임을 알고, 다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임을 아는데도 무슨 사건이 터지면 마음은 있게 된 것들에 빼앗깁니다. 이처럼 죄적 체질은 우리를 자꾸만 빗나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출애굽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세대도 결국은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망한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마음에서 첫 번째로 붙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서도 바벨론에 망하고 앗수르에 망하고 다 망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이 가나안 복지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배우자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붙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붙잡지 못한 채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의 존재감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고 믿어졌던 신입니다. 바알을 우상숭배 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부자 되고 돈 많이 벌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즉, 바알숭배는 종교적인 우상숭배가 아니라 당시의 재테크 방법이었습니다. 주식 하는 분들을 보면 투자해놓고 눈을 떼지 못합니다. 얼굴만 보면 올랐는지 내렸는지 드러납니다. 마음이 완전히 빼앗겨 있습니다. 바알숭배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결국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안 되기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먼저 이스라엘의 상번제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의 구조를 보면 가장 안쪽에 성소가 있고 그 앞에 번제단이 있는 제사장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깥쪽으로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한 “새 뜰”이란 바로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의 뜰과 이스라엘 남자들의 뜰 사이를 말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모여서 상번제가 드려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상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일 년 된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전쟁의 위기에 처했어도 상번제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상번제는 하나님이 아침과 저녁으로 양 한 마리씩을 드셔야 만족하시기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번제의 의미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 대신에 양이 죽는 행사입니다.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양이 각이 떠져서 번제단 위에서 불타 죽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양이 죽는 모습은 내가 죽는 모습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번제가 매일 두 번씩 이루어졌던 이유는 죄적 체질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마주 보고 있으면 아내의 존재감과 남편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이겨버립니다. 그럴 때 “내가 또 빗나갔다. 또 죄를 짓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갈릴리에 살고 있을지라도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지금도 제사장들이 양을 죽여 번제를 드리고 있음을 떠올립니다. 그 성전을 떠올리면서 아내는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남편의 존재감을 먼저 받아들인 내가 번제단에서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또 남편도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아내의 존재감을 먼저 받아들였습니다. 또 빗나갔습니다. 지금 제사장이 드리는 번제에서 죽는 양은 나 대신 죽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상번제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붙잡지 않고 여호와의 존재감을 1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돈의 존재감, 건강의 존재감, 형통의 존재감이 1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존재감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사만 드렸을 뿐이지 제사의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에서 하는 일은 이 상번제를 날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브엘세바에 살든 갈릴리에 살든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런데 눈에 안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감은 멀리멀리 내쳐지고 뭉개져 버리고, 마음은 세상의 피조물들의 존재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생각하면서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 양이 죽는데 나 때문에 죽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감이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을 1등으로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의식되지 않는 나를 죽였어야 마땅한데 이러한 나 대신 양이 죽고 있다는 것이 상번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또 직장에서 승진이 안 된다고 해서 속상했습니다. 제가 승진이라는 문제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인정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있음에 마음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담겼어야 할 마음에 승진이 담겨버린 이러한 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내가 주님과 함께 죽게 해주셔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승진 문제에 대해서 내가 죽게 해주세요. 그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나의 마음이 보좌 우편까지 따라가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해주시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해주세요. 돈 문제 안 보게 해주시고, 승진 문제 안 보게 해주세요. 하나님만이 있는 분이시고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들입니다. 있게 하신 것들에 내가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해주세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게 해주세요. 세상에 있게 된 것들은 끊임없이 나의 마음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마음을 세상에 빼앗긴다면 내가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어서 지금 내 마음을 빼앗고 있는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서 죽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도 바로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적군에게 빼앗기는 마음이 번제단에서 죽고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내 속에 자식이 담겨 있구나. 나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 자식을 끌어안고 있는 죽은 것이다.”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을 하늘로 보내서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자식 문제는 아버지의 나라 안으로 끌려 들어오게 됩니다. 내가 해결해야 되는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 중의 바보는 자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는 부모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또 세상에서 제일 바보 중의 바보는 내가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돈 벌고 싶어 했지만 원하는 만큼 벌지 못하셨을 겁니다. 안 벌렸으니 여기 앉아 있는 것 아닙니까? 오히려 다행입니다. 벌렸다면 어디서 뭐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또 바보 중의 바보는 건강하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죄악은 몸이 건강할 때 다 나타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이 돌아다니며 악한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도 돈도 건강도 마음대로 되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존재감 말고 다른 있음을 먼저 마음에 받아들인 상태로 사는 것을 막으시기 위함입니다. 계속 막으셔서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붙잡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엇일까요? 자기 십자가라고 하니 시어머니가 떠오르는 분도 계실 것이고 남편이나 자식이 떠오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셔야 될 이유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내게서 이유를 찾을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십자가가 됩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나 보니 2022년 9월 26일 오늘 내 마음에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이 들어와 있기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는 사건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죽음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면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절 전 고난주간에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생각은 나의 자아의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신분에 맞는 자아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라면 아이 앞에서는 아빠이고, 부모님 앞에서는 아들이고, 동생 앞에서는 형이고, 사회에 나가서는 직장인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어지는 신분마다 그에 맞는 자아의식이 동반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아의식은 성별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여자다.” 혹은 “나는 남자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이다.”라는 자아의식은 성별이라는 자아의식보다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 자아의식이 없다면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마음을 둘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이 아닌 “있게 된 것들”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는 수밖에 없습니다. 남편을 마주할 때 “여보!”라고 부르기에 앞서 “나는 아내이기 이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라는 생각을 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고 보면 나와 하나님이 하나로 묶인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남편을 대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우리”라는 말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우리” 속에는 누가 들어있습니까? 우리 가족, 우리나라, 우리 교회, 우리 아내, 우리 남편 등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아내, 우리 남편 같은 표현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지만 관용적으로는 사용될 수 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분들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떠올릴 때는 이제 “나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우리”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가족이 들어와 버렸다면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가족의 존재감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 목사님 옆에 사모님도 계시는데 두 분이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되어야 하고, 사모님은 사모님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과 사모님의 관계는 가나안 복지가 되기 시작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가족관계가 힘들고 불화가 생기는 것일까요? 왜 가족이 행복하지 못합니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가진 “우리”라는 개념 속에서 가족이 빠져버리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토대로 저는 감히 사위일체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삼위일체가 되어계시기에 거기에 여러분이 들어가 “우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자식과 부모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자식을 담은 내가 죽어야 합니다. 아내를 담은 나도 죽어야 합니다. 남편 담은 나도 죽어야 합니다. 부활한 예수님과 함께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일체를 이룬 상태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위일체를 이루고서 아내를 만날 때 하나님 일이 됩니다. 돈 문제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일이 됩니다.

 

지금까지 돈 문제가 생기면 우리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라는 말 속에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가정의 존재감이 먼저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문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교회의 어느 강단에서도 마음에 가족이 들어와 있음을 문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누누이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 안에 가족을 담고 사업을 담고 건강문제를 담고 “우리”로 여기기에 바빴습니다. 온갖 세상 것이 다 들어와 있는 바람에 하나님의 존재감은 들어오려야 오실 수가 없는 상태를 그대로 놔두고 기도와 충성과 봉사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수 없는 조건을 그대로 놔두고 기도를 하려니 온전한 기도가 될 리가 없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은 쫓아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세상 것들의 존재감을 끌어안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죄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설교 전에 죄 사함에 대한 찬양을 했습니다. 가사가 정말로 좋습니다. 그런데 정작 죄 사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면 실제 삶의 현장에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죄 사함 받은 사람은 사업할 때에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죄 사함을 너도 받고 나도 받고 다 받았다는데 도대체 어떤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목사님들 세미나에서도 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데 도대체 죄가 무엇이고 아담이 타락한 뒤에 죽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남편을 앞에 두고 있을 때 남편이 아닌 하나님께로 마음이 가는 상태입니다. 남편이 우선적인 존재감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가족이 하나님보다 먼저 들어와 있다면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죄 사함의 사건인 이유는 바로 이렇게 남편이 들어와 있고 회사가 들어와 있고 건강이 들어와 있고 세상이 가득 들어와 있는 나를 대신하여 주님이 죽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죄 사함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죄 사함을 받았으면 누구를 만나든 어떤 사건을 만나든 그 사건이 마음에 먼저 담기지 않고 하나님이 먼저 담기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교회의 교인들이 마음에 가족을 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영적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아들여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교리를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서 결정 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있는 자”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님에 의해 아버지라는 이름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입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교리적 수준의 고백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목사님과 구원을 받았으면 받은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잠깐 대화를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결혼과도 같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남편다움 아내다움이 끝까지 이어져 나가야 합니다. 결혼식만 했다고 해서 부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다면 사장님 앞에서 회사에서 시장에서 장사할 때에도 아버지 앞에서의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존재감이 항상 먼저가 된다면 모든 상황은 아버지가 다스리시는 홈그라운드로 끌고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시비를 걸든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건강이 좋든 안 좋든 모든 상황을 아버지가 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나를 물어뜯으려는 개처럼 달려올 때는 그것을 끌어안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가 마음에 담길 때는 “마음에 이 세상을 담고 있는 나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장사할 때는 십자가를 창고에 넣어두고, 자식을 대할 때도 십자가를 창고에 넣어두고, 남편과 아내가 만날 때에 십자가를 창고에 넣어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는 창고에 넣어둘 일이 아니라 24시간 써먹어야 할 일입니다. 24시간 십자가를 써먹을 수 없다면 우리의 죄적 체질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감은 마음에 담길 수가 없습니다.

 

죄는 혈압과도 같습니다. 약을 먹으면 혈압이 낮아지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다시 올라옵니다. 십자가 복음이 바로 죄의 혈압을 죽이는 혈압약입니다. 죄의 혈압이 올라오면 자꾸만 마음에 세상을 담게 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있으신데 하나님의 있음을 담지 않고 세상의 있음을 담아버리면서 자꾸 빗나갑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의 의미에 합당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하나님만을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있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담으면 내게 주어진 문제 또한 당신의 뜻대로 있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으면 내가 해결을 해야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위해서 책을 보고 전문가를 찾으려 하는 것이 당연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우선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야하시엘을 보내셔서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지금 돈 문제를 당하고 있지만 그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다. 네게 지금 건강 문제가 생겼지만 그것은 너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가만히 서서 내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라. 그 대신 네 마음에는 나만을 담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에 절대로 문제를 담아서는 안 됩니다. 문제를 담으면 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담으면 문제에 물어뜯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심령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아버지로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으면 됩니다.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이지 함께하기만 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담을 수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존재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이 무슨 말에든 “개”를 붙이는 습관이 있던데 우리도 하나님 이외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개무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무시의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제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2만 마리의 개를 풀어서 기차를 향해서 짖게 했다고 해보겠습니다. 2만 마리의 개가 짖어대면 엄청날 것입니다. 그런데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설까요? 개가 짖는다고 기차는 서지 않습니다. 그럼 100만 마리가 짖어대면 기차가 설까요? 마찬가지로 기차는 서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상황을 막으려는 사탄의 개짓는 소리와도 같습니다. 그 소리에 두려워서 떨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돈 문제가 생겼는데 돈 문제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으려면 겁이 날 것입니다. “이래도 되나? 이러다 망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은 결코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으니까 돈 문제를 어떻게 해나가시나 보자.”라고 실눈 뜨고 바라보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망하면 망하리라는 담대함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 문제가 있을 때 나는 돈 문제에서 도망가서 하나님을 끌어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문제를 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건강문제나 자녀문제가 생겼는데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증거는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자식도 끼어있지 않고 부모도 끼어있지 않고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과 직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 상태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갔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했는데 그 결과가 여호사밧 왕과 같은 승리가 아니라 스데반 집사님 같은 순교나 사도 바울의 고난과 같은 일이 나타난다면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는 더 안 좋아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일이 황금처럼 귀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남들 눈에는 망했는데 나는 이 망한 상태가 왜 이렇게 좋은지 모릅니다.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께서 본문 1~37절을 읽어보면 여호사밧 왕의 마음에 기쁨이 생긴 것은 전쟁을 이겨서 노획물을 거둘 때가 아님을 아실 수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승리 전에 적군의 존재감보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먼저 마음에 들어왔을 때 기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박국 3장 17~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있음만 붙잡았더니 그 유일한 있음이신 하나님이 나의 유일한 좋음이 되어주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유일한 좋음을 가졌기에 이 세상 것에는 아무것도 좋음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있어날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이 마음에 들어오는 상태의 나를 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보면서 세상이 들어온 나 때문에 주님이 죽으셨음을 압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는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남편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나는 아내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나는 내 몸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나는 사업이나 돈이나 승진에 대해서도 죽은 자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충족된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삶이 어떠하든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웃음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있음만을 생각하고 붙들었는데 있음이신 하나님이 좋음이기까지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사밧 왕은 그 좋음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전쟁을 이겨서 좋아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이 잘돼서 좋은 것이 아니라 좋아서 사업장에 가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돼서 좋은 것이 아니라 좋은 마음으로 자식을 대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잘 벌어 와서 좋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때문에 좋은 마음으로 남편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좋음은 따라옵니다.

 

이렇게 해서 좋아죽겠는 삶을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내가 남자나 여자라는 의식보다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있음만을 챙기기 위하여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 있음이 들어올 때마다 언제나 십자가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확인하면서 기어코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원교회는 하나님 부자들이 생겨나더라, 하나님을 많이 가진 재벌들이 생겨나더라는 소문이 강릉까지 전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50주년을 맞이한 우리 상원 교회가 달라졌어요.”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 소식을 들고 상원교회 교인들이 강릉에 오신다면 제가 무조건 점심을 사겠습니다. 화이팅!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정말 벌레 같은 우리들에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우리의 죄적 체질을 이기며 오직 아버지의 있음만을 마음에 담음으로 기필코 아버지의 좋음까지도 느끼며 이 세상에서 아버지 좋음으로 빛이 나는 얼굴들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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