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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예수 이름 불러 구원받음의 진짜 내막_태승철 (사도행전 2장 19절~36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5.06|조회수9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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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이름 불러 구원받음의 진짜 내막>의 줄거리: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주'는 당연히 예수님이시지요. 특별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구절만 보면 언뜻 듣기에 구원받음이 참 쉽게도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 부르면 그다음 즉시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먼저 마음에서 이 세상이 없어져야 합니다.

 

예수 이름 불러 구원받음의 진짜 내막

(사도행전 2장 19절~36절)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이름 불러 구원받음의 진짜 내막>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이름 불러 구원받음의 진짜 내막’

본문은 베드로에 의해서 교회역사상 공개적으로 행해진 첫 번째 설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해서 성령충만의 상황이 묘사되었습니다. 오늘은 이어서 19~21절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22~36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즉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충만과 재림과 종말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다는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교회는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설교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과는 다른 내막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막이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다르게 안에 감추어진 내용이 있음을 의미하듯이, 이 말씀에는 우리가 그동안 일상적으로 구원과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무척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령충만을 통한 예언과 환상과 꿈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뒤로 이어지는 19~20절을 보면 말세에 일어날 무시무시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세는 곧 그리스도의 사역을 마치신 뒤로부터 재림 때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말세에 나타나는 일로써 땅에서는 피와 불과 연기가 언급됩니다. 피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을 의미하고 불과 연기는 모든 물질의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또 해가 빛을 잃고 달이 피로 변한다는 것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죽음이 이루어지라는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하였고, 또 12절에는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주의 날”이 본문에서 말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의 날이란 재림의 날로써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시는 날입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관심의 첫 번째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만 보게 될 것이고, 설령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일지라도 예수님만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옆에 아내가 있든 남편이 있든 주님 외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몸이 안 좋아서 죽을 지경이든지 돈이 없어서 큰일이 생겼을지라도 예수님께만 집중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입니다. 인도의 힌두교도이든지 태국의 불교도이든지 중동의 이슬람교도이든지 아프리카의 토속신앙을 믿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 한 분에게 의식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게 되는 날이 바로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주의 날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200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재림의 때를 묘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결코 우리와 무관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한 이후에 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앞서 성령충만을 말했고 19~20절에서 재림 때에 주의 날이 임하면 온 세상이 없어질 것을 언급했습니다. 이 말씀이 단지 재림의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2000년 동안 이 말씀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해석은 결코 이렇게 표면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과 한 개인이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질 때 마음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이 온전히 예수님께 집중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부르기는 주의 날인 재림 때처럼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주의 날이 이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이 주님께 집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남반구에 있든 북반구에 있든 동쪽 끝에 있든 서쪽 끝에 있든 누구나 동시에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고 누구도 예수님 외의 다른 대상에게 주의를 분산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재림 때의 광경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재림 때와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관심사가 있을 수 없는 상태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하고 오직 예수님께 주의를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부르기는 결코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 일들에 신경을 쓰면서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매일을 주의 날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에는 세상은 우주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없어지게 될 것이지만, 재림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주님의 날을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피와 불과 연기가 상징하듯이 나의 마음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어 없어질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단에 바쳤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마음에 담고자 했던 이삭을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을 때는 마음에서 가족부터 시작해서 세상의 어떤 대상도 남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담긴 내막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은 살아있는 대상뿐만이 아닙니다. 좋든지 나쁘든지 마음에 담길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가치와 사건과 사물들이 다 불에 타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의 날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지금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 세상은 사라지고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구원은 주의 날인 재림 때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듯이 주님께 집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세상이 사라진 상태에서만 성령은 충만하게 임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에 예언과 환상과 꿈이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관심과 주의를 집중할 때에 세상이 마음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성령충만에 이어 재림의 날에 세상이 사라지리라는 말씀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날을 언급한 후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개별적 차원의 구원을 언급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되 재림 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주의 날을 염두에 둔다면 주님께만 집중되는 상태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이것저것 관심거리가 가득한 상태에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날처럼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지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하셨는가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22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에 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불러야 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바로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 사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사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한 첫 번째 사건입니다.

22절에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사와 표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고, 23~24절에서는 버림당하심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25절부터는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렇게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재림의 때에 주님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개별적으로 주님을 부르면 마음에서 세상은 없어지고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지게 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세상을 탈출하는 별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해왔고 앞으로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이것이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설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연쇄 사건의 과정이 처음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서 세상을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밖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날처럼 주님에게만 주의를 집중해서 불러야 할 주님은 바로 그리스도로서 세상 탈출의 연쇄 과정을 이루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동일시할 때에 나의 마음 또한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예수님만을 주의를 집중하여 불러야 할 대상으로 여길 때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내가 동일시해야 할 예수님을 담은 사건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자리에 이르면 내 마음에서 더 이상 세상은 있음을 느낄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피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죽음을 의미하고, 불과 연기는 모든 물질의 사라짐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족을 포함하여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내 마음에서 죽어야 하는 대상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어떤 사람도 내 마음에서 있음의 느낌이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불러야 할 예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을 탈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마음이 다른 대상에 분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재림 때에는 힌두교도들 불교도들 이슬람교도들도 예수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러한 상황으로 만들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동일시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성령이 임하시면서 구원이 온전히 성취되게 됩니다.

재림은 우주적으로 일어날 사건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개인적으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가면 피와 불과 연기가 뜻하는 대로 마음에서 세상이 완전히 없어지게 됩니다. 더는 세상을 있음의 느낌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시고 비로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마음에서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은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이고 성령충만으로 살아가는 삶이 완전한 데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상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삶을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요? 세상에 속한 것들로부터 있음의 느낌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가족이든 물건이든 마음에서 없는 것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일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탔다고 가정해봅니다. 알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몸과 몸을 부딪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몸이 닿고 있더라도 그 사람들을 마음에 담지는 않습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직장에 가서 할 일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지하철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있음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있을 때 가족이나 나와 관련된 일들조차도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재림이 이루어지는 주의 날처럼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에 온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예수님과 동일시와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마음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마음에 가족이 살아있고 회사가 살아있고 건강에 대한 염려가 살아있고 돈에 대한 걱정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세상이 없어지기는커녕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더 얻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를 안 믿었다면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바라지 않을 일조차 바라면서 더 많이 세상을 끌어안았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에게 있을 수 없는 난센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누구도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뗄 수 없을 재림의 때처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세상을 빠져나가셨듯이 우리의 마음도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셨기에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의 마음도 세상에 남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있음의 느낌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채로는 결코 주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를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충만과 재림을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보아도 짜임새 있는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마음에서 세상은 없어지고 성령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없어지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성령충만의 증거로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것이 일상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곧 하나님의 계획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악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 이후로 유전 죄를 갖게 된 사람은 이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자 합니다. 여기까지는 죄의 체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소원하는 단계부터는 책임이 따릅니다. 세상을 소원하고자 할 때 악령이 임하게 됩니다. 악령이 임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고 말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제가 언젠가도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러한 모습은 마치 카메라의 구조와 닮았습니다. 카메라 안에는 비어있는 필름이 있습니다. 렌즈를 통해서 들어온 바깥의 상을 비어있는 필름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기에 사진을 찍는 작가의 의도가 개입됩니다. 우리 또한 육신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며 비어있는 마음을 채워가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악령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의지를 갖게 합니다. 이러한 악령의 의도대로 말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 악령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반면 성령충만의 상태에서는 카메라의 반대인 영사기와 같은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충만의 상태는 마음에서 세상이 죽은 상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의 날처럼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세상에 대해서 마치 방수처리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있음의 느낌이 마음에 스며들어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일들이 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마음에 스며들어오지 못하는 세상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뜻이 성령님 안에 필름처럼 담겨져 있습니다. 카메라가 렌즈를 통해 세상을 필름에 받아들이는 것과는 반대로 영사기는 렌즈를 통해 필름 안의 내용을 세상으로 비춥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서 세상이 없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내 안에는 세상에 대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있음의 느낌을 갖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좋음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나’라는 사람의 자아의식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입니다. 매일 매일이 재림의 날처럼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은 내가 지금 방수처리 되어서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세상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미지를 담은 필름과도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육체를 영사기 삼아서 발산해가십니다. 그 발산하는 과정 중에 나타나는 것이 예언과 꿈과 환상입니다.

내가 직접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담은 필름의 역할을 하시며 나의 육체를 영사기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로 만나는 대상들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발산해가십니다. 이것이 예언과 꿈과 환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사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 대상들에 대해서 스스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상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뜻은 성령님께 담겨져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산시키십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예언이고 환상이고 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내막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의 의미와 반대되는 상태의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자다운 삶의 모습이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내일 하게 될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예언이나 환상과 꿈에 대해 좀 더 깊이 다뤄볼 것입니다. 예언을 그저 미래에 있을 일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기는 정도의 인상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참 예언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에서 말하는 예언과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결코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 예언의 목적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구원의 핵심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만 재림 때에 부르듯이 지금 예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시작되는 첫 번째 설교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강조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주의 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밖에 없고, 남편도 아내를 젖혀둔 채 예수님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자녀들도 부모를 젖혀둔 채 예수님을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의 날은 주님 한 분만이 내 관심의 주인공이 되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 재림의 때를 언급하며 ‘누구든지’라고 개인적 차원의 구원을 연결시킨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재림의 때와 같이 불러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 치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모든 제자들 또한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성령은 임하시고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주의 날처럼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성령이 충만히 임하실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첫 번째 설교에서 성령충만과 재림과 구원을 연결하여 말하였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받을 것입니다. 단 주님이 주인공이 되시는 재림이 이루어지는 주의 날처럼 각자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는 세상이 없어지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과 환상과 꿈과 같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일들이 일상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부터 전적으로 주님께 집중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내 마음에서 세상이 없어지게 하시며, 없어진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필름처럼 성령님께 담겨짐으로써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가장 합당한 말과 행동들만 하고 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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