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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땅에 내팽개쳐진 교회 다시 찾기_태승철 (사도행전 2장 37절~42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5.08|조회수91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땅에 내팽겨쳐진 교회 다시 찾기>의 줄거리:

예수님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다 성취하시고 승천하신 바로 그 길을 따라서 성령께서 강림하신 뒤 수제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3천 명이 교인이 되면서 바야흐로 본격적인 교회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첫 번째 설교가 그 이후 모든 교회의 설교에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듯이 3천 명의 신도가 생긴 그 날 교회의 가이드 라인이 제시됩니다.

 

땅에 내팽개쳐진 교회 다시 찾기

(사도행전 2장 37절~42절)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땅에 내팽개쳐진 교회 다시 찾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땅에 내팽개쳐진 교회 다시 찾기’

본문을 보면 참 부럽고 놀라운 내용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41절을 보면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교회역사상 처음 있었던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나타나고 다시 이에 대한 베드로의 권면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권면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게 됩니다. 이 놀라운 역사는 목회를 하시는 모든 목사님들의 로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삼천이라는 숫자가 아닙니다. 본문의 사건은 삼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이해하기 보다는 개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일이 삼천 번 일어났다고 이해하는 편이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삼천 명의 신도가 생겨날 수 있었던 분위기와 토양의 정체를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저 삼천이라는 숫자에 치중해서 막연히 “우리도 이런 부흥이 일어나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갖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삼천 명은 직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던 무리에 속한 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민란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빌라도를 압박하였던 무리에 속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설교를 하고 후반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강력하게 증언을 합니다. 21절을 보면 이러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자들에게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로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더할 나위 없이 큰 존재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생생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와 제자들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승천 길의 시작이고 강림 길의 종착역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붙잡는 만큼 성령은 강하게 임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삼천 명에게도 십자가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군중 틈에 끼어있던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인상은 강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베드로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루 삼천 명의 신도가 더해질 수 있었던 토양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진짜 부흥의 조건이 무엇이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로 강력하게 나의 사건으로 자리 잡게 되는가가 부흥의 핵심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 느끼는 존재감의 크기가 부흥을 결정합니다. 우리 시대의 어려움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가장 다급하고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십자가복음방송을 날마다 들으시고 십자가온라인교회에 참여하시는 분들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다소나마 가깝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나 자신을 볼 때는 십자가 사건이 자꾸 잊히기에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실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십자가 사건이 마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의 핵심이자 성령강림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존재감이 크고 강렬할수록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됩니다.

삼천 명 신도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존재감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성립과 존립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알고 있던 교회와 연관된 성찬의식, 세례의식, 각종 다양한 모임과 행사, 그리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은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마음에서 갖게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존재감의 크기야말로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크고 무겁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느끼고 있느냐, 얼마나 다급하고 절실하게 지금 나의 사건으로 붙잡고 있느냐가 교회의 성립과 존립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존재감이 마음에서 약화되거나 없는 상태라면 이 세상의 존재감이 커지게 됩니다. 예배당에서 갖는 직분이나 행사에 대한 관심조차도 이 세상의 일입니다. 아무리 직분에 충실하고 행사에 적극적이라도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존재감이 없다면 교인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임 또한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라는 이름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교회는 버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삼천 명 신도는 교회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오순절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리스도 연쇄 사건의 목격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사람은 많았으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목격자들이 바로 교회의 태동을 이루게 됩니다. 한편 삼천 명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되었던 것입니다.

삼천 명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오고 오는 세대에 교회의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음으로 마음의 찔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찔림의 이유는 베드로가 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잘 드러납니다. 36절을 보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하는 군중들 틈에 끼어서 동조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베드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동일하게 보았고 듣는 사람들 또한 변명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죄가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결국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자 이미 50일이 지난 십자가 사건이 다시금 이들의 마음에서 강렬하게 재현되었고 마음을 후벼 파는 찔림을 받게 됩니다. 이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다른 일에 마음을 둘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증언되자 새삼스럽게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고 찔림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설교의 본질적인 기능이 드러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교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지금의 사건으로 재현시켜서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설교의 기능입니다.

정리해봅니다. 교회역사상 베드로를 통해 처음 이루어진 설교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십자가 사건의 재현이었습니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찔림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신도가 됩니다. 이처럼 설교의 기능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유를 나에게서 찾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 세상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람이나 일과 사건보다도 가장 큰 사건이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가장 큰 존재로 느끼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존재감이 차지하는 크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성립과 존립의 기준입니다.

우리 또한 삼천 명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느끼는 존재감이 생기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모일지라도 교회일 수 없고 교인일 수 없습니다. 교인은 단지 예배당에 모이는 사람들의 통칭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교인이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시장에서 교인이어야 하며, 회사에서 일을 하는 동안에도 교인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도 교인이며 잠을 잘 때도 교인이고 화장실에 갈 때도 교인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장소에서 그 누구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가장 큰 존재감으로 의식되고 있고, 어떤 일보다 중차대한 사건으로 의식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교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가장 우선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삼천 명 신도처럼 느낄 수 없다면 교인이라 할 수 없으며 예배당에 만 명, 십만 명이 모였을지라도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한 유일한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이 재료 외에는 다른 재료가 없습니다. 마치 두부라는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요리가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재료로 다양한 방식의 활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만 핵심은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하나뿐입니다.

 

한편 32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회개(悔改)란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채워지기 위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본래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육체로 접하는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회개란 바로 이러한 상태로부터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죄를 회개하는 것은 의식에서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즉 내 의식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하나님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죄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적대시가 죄였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는 예수님에 대해 입장을 취하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에 대해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적대시가 곧 하나님에 대한 적대시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회개할 것을 요청한 것은 곧 의식에서 예수님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적대시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지만 이제는 우대하고 환대하며 좋아하는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회개란 언제 어디서든 의식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반대되는 죄란 언제 어디서든 의식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향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등지는 것이야말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향하여 있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하나님께 적용하게 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죄가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죄 사함이 주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입니다. 물세례가 육체를 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죽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성령세례는 성령의 생명수에 잠기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의 예수님에게 잠기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연합하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죄는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따로 취해야 될 태도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향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죄는 원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수님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똑같이 진행이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등지면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한 죄의 체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억누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죄의 체질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회개의 체질이 되어야만 합니다. 돈을 좋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등진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하나님 대신 돈을 좋아함이 죄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동이 악이 됩니다. 회개의 체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의식이 예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의 체질이기에 죄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회개의 체질이 되어야만 합니다. 체질적인 회개는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계속 향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회개를 의미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마음을 돌리다”라는 뜻의 동사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체질적인 죄이기에 체질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체질적인 회개란 언제 어디서든 계속해서 의식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삼천 명 신도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이 첫 번째 의식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서도 예수님을 가장 큰 존재감으로 여기고, 십자가 사건을 가장 급박한 사건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체질적인 회개를 위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을 등지고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향하여 있기에 나로서는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내가 등진 이 세상 삶을 이끌어가시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교인입니다.

 

또 39절을 보면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회개를 하는 모든 사람은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서 외국어 방언을 말하게 되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제자들이 외국어 방언으로 말했던 내용은 결국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입니다. 각 나라와 지방에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외국어로 전달되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누구에게나 성령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의 길과 성령강림의 길은 같은 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만드신 길을 통해서 죄 사함이 일어나고 성령강림 또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을 가는 데에는 언어나 민족의 차이가 상관이 없으며 지위고하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언어와 민족과 풍습과 빈부귀천도 결국 육체로 인해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승천의 길과 강림의 길이란 이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은 육체로 접하던 세상을 떠나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라 민족 언어 습관 풍습 등을 비롯한 육체로 생겨난 어떠한 차이에도 상관없이 성립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에 잠겼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육체에서 비롯된 차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42절을 보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이들에게서 나타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이 말씀을 보고 육체로 모이는 일, 떡을 떼는 성찬식에 교회의 의미를 부여합니다만 이것은 부차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료로 변용해서 사용하는 방식 중의 한 가지입니다. 모임과 행사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실제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우선적 사건으로써 의식의 대상이 되어있지 않는데 모이기만 하고 떡만 떼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도망가고 사방으로 흩어질 때는 모임과 성찬식도 불가능했습니다. 이때의 성찬식이란 말 그대로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었지 지금처럼 특별히 포도주와 떡을 떼는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모임이나 행사 이전에 개개인의 의식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어느 정도로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삼천 명 신도들은 한때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던 군중들 틈에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고 마음의 찔림을 받고 회개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의식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강렬하게 인상지어지고 있고 기억되고 있는가가 교회 성립의 기준이 됩니다. 삼천 명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강도가 교회 성립의 기준입니다.

신학적으로는 교회의 본질을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꼽습니다.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삼천 명이 느꼈던 것과 같이 십자가 사건을 재현시켜주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고 동일시하는 것이고, 성찬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모임이나 행사를 못한다고 해서 교회나 교인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설령 홀로 무인도에 있을지라도 세례와 성찬의 의미는 충족될 수 있습니다. 삼천 명에게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기억되었던 것처럼 한 사람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의식되고 기억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행여 형식적인 절차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십자가 사건을 기반에 둔 모든 행사와 의식들의 의미는 충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를 보면 의식은 남아있으되 의식의 원재료가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삼천 명이 느꼈던 마음의 찔림은 우리에게서도 반복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강렬한 의식의 크기와 강도와 정도가 교인과 교회를 결정합니다. 십자가복음방송에서 날마다 전하는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배우자나 자녀들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먼저 의식하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모르지만 이러한 말씀을 듣고 전하며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의 우선적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자리 잡게 되기를 소원하며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사람들이 교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하나의 재료가 다양하게 변용하면서 진행되어지는 모임입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큰 사건으로 느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양한 의식이나 행사가 없더라도 교회는 유지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의식이나 행사를 지키더라도 각자의 마음에서 십자가를 잊어버린다면 교인일 수 없고 교회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직장에 가면 일이 최우선이고, 가정에서는 배우자와 자녀가 최우선이고, 예배당에 와서도 행사가 최우선이라면 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에서도 십자가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면 내팽개쳐진 교회일 뿐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삼천 명의 신도처럼 우리의 마음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인식의 강도가 강력하게 기억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긍휼히 여겨주셔서 이 패역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들을 통하여 땅에 버려진 교회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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