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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당신이 속한 유일한 참 교회의 속성>의 줄거리:
당신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교인입니다. 즉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가 매일의 일상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의식되는 사람들, 이들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입니다. 역사상 첫 번째 설교인 베드로 설교를 듣고 신도가 된 3천 명에 의해서 제시된 이 기준이 충족되면 나타나는 교회의 속성을 살펴봅니다.
당신이 속한 유일한 참 교회의 속성
(사도행전 2장 43절~47절)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당신이 속한 유일한 참 교회의 속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당신이 속한 유일한 참 교회의 속성’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교인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지역 예배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 예배당을 보면 교회를 개척하시는 목사님의 의도가 담긴 교회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말씀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교회에 이름을 붙이자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일상적인 삶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의식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시작된 교회가 유일무이한 참 교회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서 신도가 된 사건의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삼천 명은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을 직접 목격한 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연쇄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이 목격자들에서 증언을 듣고 신도가 된 자들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태동하게 한 사람들이라면,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 교회를 이루게 된 삼천 명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존재할 교회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던 사람들에게 동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뒤늦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알았고 또한 예수님이 구원의 주인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뒤에는 이들의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큰 사건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기준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의식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를 가진 자들이 바로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인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분명한 특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교회의 속성입니다. 그 증거가 유무상통, 모임에 힘씀, 떡을 뗌, 기도의 네 가지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모든 내용을 다루지 못할 경우에는 저녁 7시 30분에 십자가온라인교회에서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재현되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믿음의 반열에 서게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하나이기에 교회 또한 단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43절을 보면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다는 것은 땅과 하늘 사이에 연결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 있는 십자가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를 연결하는 승천의 길과 강림의 길이 사도들의 마음속에서 굳건해진 것입니다. 사도들의 마음은 지속적으로 십자가로부터 하늘의 보좌로 흘러들어가고 또한 보좌로부터 성령의 생명수가 끊임없이 내려오시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기적과 표적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기적과 표적은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교회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라는 말은 굉장히 오해의 소지가 큰 표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루살렘 교회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라 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교인들의 모임을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지금은 없어져버린 교회,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만의 교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흔히 초대교회라고도 불립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특정한 장소나 시기에 존재했던 특정한 모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재림 때까지 존재하게 될 단 하나의 교회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속할 수 있는 교회 또한 단 하나의 교회뿐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본문의 묘사를 정의하자면 “예루살렘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가 시작되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때의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본질적 의미에서 교회란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목격자들인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삼천 명이 회개하여 신도가 된 사건 또한 예루살렘 교회만의 특징일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란 교회역사의 초기에 국한된 교회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초대교회만의 특징으로 생각한다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적으로 교회를 구분할 때에 초대교회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의미적으로는 교회를 구분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확장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로부터 교회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 하나뿐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도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소위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님의 의도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개척된 지역의 이름을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내용적으로 교회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의식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십자가를 기억함이 예배당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를 개척한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의미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미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부터 오늘 본문까지의 이야기가 전부 교회가 개척되고 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후부터 교회는 개척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개척한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어불성설입니다. 본문의 지금 상황이 유일한 교회의 개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 한 번 개척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예루살렘에서 2000년 전에 개척된 교회의 확장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교회가 나에게까지 확장되어 온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표면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 교회는 빌립보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교회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해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란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명칭입니다. 빌립보 교회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가 빌립보까지 확장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코 빌립보에 있는 사람들이 세운 교회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나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단 한 번 개척되었고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름을 붙인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일상 속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삼천 명 신도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기준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자신의 일이 되었습니다. 내가 죽인 것이고, 나 때문에 죽으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생 동안 가장 크게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믿는 예수님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늘 기억하는 교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서도 교회에 대한 인식은 바뀌어야 합니다. 지역에 있는 예배당에 다니면서 “나는 무슨 교회의 교인이다”라는 의식을 씻어 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 하나뿐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한 오해는 교계지도자들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에 교회의 사유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유화를 위해 찢고 분열시켜서 다양한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결과 각종 종파와 교단과 예배당 단위의 조직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이 지역 예배당 조직을 “내 교회” 혹은 “우리 교회”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 하나뿐인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를 찢어서 내 것으로 삼은 결과에서 나타나는 우려할만한 상태입니다.
단 하나뿐인 교회를 사유화함으로써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기준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습니다. 최초의 목격자들인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삼천 명이 제시한 교회의 기준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각종 다양한 이름을 내세우며 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이 나 때문에 일어났으며, 내 일생에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되고 의식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주 희소합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사도행전에서 묘사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 하나뿐인 교회이기를 이미 포기하고 교회라는 이름을 남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일상 속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교인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교인들의 모임이 유지될 때에 나타나는 속성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속성이 앞서 말씀드린 유무상통과 모임에 힘씀과 떡을 뗌과 기도입니다.
첫 번째 유무상통에 대해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교인들이 만들어낸 상황이 아닙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은 말 그대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서로 공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교인들의 노력이나 희생의 강요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유무상통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본질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유무상통이라는 현상을 따라 똑같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유무상통이 드러나게 된 이유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무상통은 교인들의 마음에서 이 세상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났다는 증거로써 유무상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생애의 가장 큰 사건으로 의식되고 있는 중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효과였습니다. 십자가가 내 생애의 가장 큰 사건이 되면 마음에서는 세상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치 재림 때에 세상이 없어지는 가운데 예수님을 맞닥뜨리는 것과 같은 일이 지금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의식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갖지 않게 되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강하게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내게 주어져 있는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전에는 돈이 귀중하고 아깝게 여겨지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애 가장 큰 사건으로 인식하게 된 뒤로는 돈이 귀중하거나 아깝게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아까운 존재였으나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특이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내게 주어진 돈을 그 누구에게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무상통에 대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에서 일어났던 일은 그 정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애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는 동안에는 주어진 돈을 아까워하지도 않지만 주어진 돈을 남에게 주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기분이 좋다고 한턱내는 일도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은 돈을 아까워할 자격도 없고 자기 뜻대로 쓰거나 기부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가장 큰 사건으로 의식하는 동안에 내게 주어진 돈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한 가지 태도는 마음이 반드시 그 돈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붙잡지도 않고 돈을 멋대로 남에게 주지도 않습니다. 돈에서 떠나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돈은 다양한 형태로 주어지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노동의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경우가 있고, 보험금이나 연금과 같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주식 투자나 증여로 주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각종 부동산이나 보물들도 이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생애 가장 큰 사건으로 인식하는 동안 마음은 이 모든 대상들에 대해 죽고 떠나게 됩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아까워서 붙잡지도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누구에게 주지도 않습니다.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돈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나의 신분이고 나의 자리입니다. 돈에 대한 나의 자리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란 곧 마음이 돈을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돈을 떠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을 아까워하지도 않으며 돈을 마음대로 쓰거나 기부하지도 않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듯이 기부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기부 행위를 통해서 내 마음을 채우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를 위해 돈을 써서 마음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을 위해 돈을 쓰는 사람을 훌륭하게 봅니다. 돈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남을 위해 돈을 쓰지 않고 주어진 돈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시는 것은 돈을 가지지 말고 쓰지 말고 기부도 하지 말라고 주신 것입니다. 주어진 돈을 기준으로 삼아서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통장에 1억 원의 예금이 있습니다. 이제 마음에서는 돈을 끌어안을지 하나님을 끌어안을지 선택해야만 합니다. 1억을 주셨다고 해서 마음대로 쓰라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기부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1억보다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서도 선택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돈을 벌고자 소원하는 대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생애 동안 일상적으로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돈을 붙잡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돈을 나눠주는 사람도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돈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고 나면 빈자리에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일어났던 일이 유무상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때에 이루어진 유무상통은 이들에게 주어진 돈에 대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교인들이 뜻을 모아 유무상통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교인들은 주어진 돈과 재산에 대해 마음이 떠나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아버지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아버지만을 좋음으로 확신하며 아버지만을 소원하는 상태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일어났던 유무상통은 돈에 대해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였습니다.
유무상통은 예루살렘에 있던 교인들의 결심이 이루어낸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돈을 쓸지 누구에게 돈을 쓸지는 우리가 마음을 두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애 동안 가장 큰 사건으로 여길 때에 마음은 돈을 떠나게 됩니다. 주어진 돈을 나를 위해 쓰고자 하지도 않고 남에게 기부하지도 않습니다. 주어진 돈은 성령께서 필요에 따라 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삶의 현장에서 어느 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하게 기억하고 있느냐가 그 척도가 됩니다. 돈과 하나님을 놓고 무엇을 더 기쁨으로 삼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돈을 기쁨으로 삼고 있음을 확인하였다면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함으로써 돈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주어진 돈이 성령에 의해 지출될 수 있도록 마음의 여건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멋대로 돈을 쓰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 것을 좋아하면 돈을 쓰다가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돈을 떠나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마음에서 하나님이 기쁨과 만족이 되시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로 마음이 바뀌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돈을 쓸 때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물론 늘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칼로 무를 자르듯이 명확하게 구분이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러한 기도가 반복되는 중에 성령의 역사는 유무상통까지 가능해질 정도가 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돈을 쓰면 쓸수록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쁨이나 보람이 아니라 주어진 돈을 성령께서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것에서 주어지는 은혜로서의 기쁨과 보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이러한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내용과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오늘 오후 7시 30분부터 진행되는 십자가온라인교회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유일회적으로 개척되었고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는 중에 나에게까지 확장되었고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지역 예배당을 개별적 교회로 여기는 인식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도록 십자가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소속된 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을 생애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고 받아들인 자들이 이룬 교회에 속하여 계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을 보내주시고 증인들을 세워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2000년이 지나는 동안 그렇게 개척하여 시작된 그 하나의 교회가 확장되어서 우리가 속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서도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참된 하나의 교회의 속성이 발견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