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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인생 영생 동시 살기 사위일체 호흡법>의 줄거리: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만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 인생살이를 사는 내가 삼위 하나님의 일체 되심에 참여하게 되면, 이제 시간으로 한정된 인생살이와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삶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영생을 호흡하는 동안 인생에서는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집니다. 바로 사위일체 호흡법입니다.
인생 영생 동시 살기 사위일체 호흡법
(사도행전 3장 11절~26절)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생 영생 동시 살기 사위일체 호흡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생 영생 동시 살기 사위일체 호흡법’
본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숨을 쉬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호흡이 곧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숨을 쉬어야 하는 것은 육체뿐만이 아닙니다. 마음 또한 호흡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아가게 하는 사위일체 호흡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육체를 통해 살아가는 한정된 시간을 의미합니다. 한편 영생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호흡을 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에 요청되는 것이 사위일체 호흡법입니다. 인생과 영생이 동시에 살아질 때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은 사라지게 됩니다. 사람이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육체로 살아가는 인생의 시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위일체 호흡법을 통해 영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 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과 비교해보자면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사는 사람이 바로 교인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여 사십 년이 넘는 세월을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해온 장애인이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치유 받게 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성전을 출입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치유를 받게 되었으니 많은 사람이 놀라워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내에 금세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솔로몬 행각이라는 곳에 이르게 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이들을 따라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고쳤다고 생각하며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해명하는 장면이 두 번째 설교를 통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두 번째 설교입니다만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였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삼천 명이 회개하고 신도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기에 베드로는 이들을 위해서 설교를 했을 것입니다. 다만 이 설교를 두 번째로 기록했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하며 병 고침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16절을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병 고침의 역사가 예수를 믿음으로서 발생한 현상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이름”이란 가리키는 존재와 상황이 있습니다. 곧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을 가리킵니다. 첫 번째 설교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설교에서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대한 증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3~15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은 승천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승천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가 죽인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내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부활시키시고 그리고 승천하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첫 번째 설교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나오게 된 동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설교 때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외국어로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기이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이것이 요엘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으며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대한 믿음의 결과임을 드러내는 것이 동기였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걷지 못하던 장애인이 치유 받는 사건을 놀랍게 여기는 백성들에 대해 이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해명하는 것이 주된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렇듯 동기가 전혀 다른 두 사건이 모두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한편 15절을 보면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앞선 말씀들을 통해 증인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증인으로 증언을 하며 그리스도의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을 회개하여 받아들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인의 삶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3~24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양한 소재를 동원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을 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해 말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도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하며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외부모임이 힘들어지자 유튜브를 비롯한 영상매체들의 이용률이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실제로 유튜브를 보면 엄청나게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영상을 올리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설교에는 하나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나 바울이 증인의 입장에서 설교를 했듯이 우리가 듣는 모든 설교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을 증인의 입장에서 증언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초점에 두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초점에 두고 있는 설교라면 들으시면 됩니다. 두 번째 들었을 때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초점에 있다면 계속해서 들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세 번째 들었을 때 설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초점에서 사라졌다면 듣기를 멈추어야 할 때입니다. 설교를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준이 있는 설교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설령 일곱 번 여덟 번 예수님의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설교라고 할지라도 아홉 번째에 초점을 잃게 되었다면 그 설교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언급하면서도 진리에서 벗어난 설교를 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과 승천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기준을 가진 설교의 구조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완전히 분리시켜 설교를 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동일시를 처세의 수단으로 변질시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십자가에 대한 설교는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도 없고 승천도 없으며 지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계시는 하늘로 마음을 보내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진리의 길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진리의 길의 시작은 십자가이기에 증인의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설교라면 십자가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빼놓고 설교를 하는 목회자는 더는 증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설교라면 초점이 십자가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이야기하되 다양한 소재와 다양한 시각을 통해서 증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설교의 모습은 마치 원안에 중심점을 찍어놓은 모습과도 같습니다. 원주는 무한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원의 중심점은 하나입니다. 그 중심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어느 원주상에서든지 중심점을 바라볼 때 완전한 원이 그려지게 됩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든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설교입니다. 십자가 초점을 놓친 설교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교인들이 설교를 지루해할까 봐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이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한 설교는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연쇄과정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내용들은 아무리 재미있게 들릴지라도 설교일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러한 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의 표현이 독특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새롭게 되는 날”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어감을 염두에 두자면 개역한글 성경의 번역이 좀 더 낫다고 여겨집니다. 새롭다, 유쾌하다는 뜻의 아나푸시코(ἀναψύχω)는 “위를 향하다”라는 뜻의 아나(ἀνα)와 “숨을 쉬다”라는 뜻의 푸시코(ψύχω)의 합성어입니다. 즉 위를 향해 숨을 쉴 때에 일어나는 일이 새로움이고 유쾌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에 대해서 증언의 내용이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먹음으로써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가 사해지면서 위를 향하여 호흡하는 날이 이르게 됩니다. 위를 향해 호흡하는 사람이 교인이며, 이러한 교인들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라는 줄에 매달려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저쪽 끝은 하늘보좌에 이르고 다른 쪽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결코 세상에서 단체를 만들고 조직을 이룬 것이 교회일 수 없습니다.
이처럼 교인은 언제나 위를 향하여 호흡을 하는 상쾌한 사람들이고 유쾌한 사람들입니다. 호흡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쉬기의 활동입니다. 두 번째는 함께 일을 할 때 손발이 잘 맞을 때 호흡이 맞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염두에 두고 제목에서 사위일체 호흡법을 언급하였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인격자인 내가 가담함으로써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위를 향한 호흡은 당연히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호흡입니다. 마음이 위를 향해 호흡을 하게 된다는 것은 이전에는 아래를 향해 호흡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호흡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대한 있음의 느낌에 기대어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스스로 있다면 다른 있음에 기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공백이 있어서 좋음의 확신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입니다.
이렇게 외부로부터 있음의 느낌을 갖고 좋음의 확신을 갖는 것이 마음의 호흡에서 들숨의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들숨의 단계를 지나면 날숨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갖게 된 대상을 실제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 위한 소원과 바람과 욕구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의 호흡은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확신을 통해 숨을 들이쉬고 소원함을 통해 숨을 내쉬게 됩니다.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갖게 된 대상에 대해 소원함이 반복되면서 마음의 호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의 있음을 느껴서 좋음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돈을 실제로 갖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돈을 통해 마음이 호흡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과 관계된 일이 잘 안 풀리기 시작하면 숨이 막히기 시작합니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마음의 숨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돈이 생기면 숨통이 트였다고 합니다. 다시 마음이 돈으로 호흡을 하게 된 것입니다.
위를 향한 호흡도 과정은 똑같습니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그동안은 아래로 향한 호흡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구하고 찾음을 통해 마음의 숨을 들이마셨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소원함을 통해 마음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렇게 들숨과 날숨을 쉬면서 살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소원하는 것들이 불확실하고 막막했기에 마음은 언제나 답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증언을 따라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인정하고 고백함을 통해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56절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방법은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이고 죽음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더는 세상을 향해 호흡할 수가 없고, 약속대로 성령이 오시면서 있음의 느낌이 필요한 마음에 하늘을 제시하십니다. 육체의 오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또 하나님이 유일한 보물이심을 성령께서 알려 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들숨으로 들이쉬고 이제부터 인격적 주체로써 하나님을 소원하는 날숨을 내쉽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나타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풀어보자면 “항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쉬지 말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범사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게 된다.”라는 의미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마음의 들숨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함으로 이루어지자 하나님을 소원하는 형태로 날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마음의 호흡을 통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새롭게 됨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체험이 이루어져야 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행은 세상을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소원만 없애도 불행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의 구조상 소원을 안 할 수는 없기에 소원의 방향성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소원하게 됨으로서 마음은 새로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함을 통해 들숨으로 들이쉬고, 하나님을 소원함을 통해 날숨으로 내쉬는 일이 반복되면 마음이 유쾌하고 상쾌해집니다. 이전에 마음이 땅에서 호흡하는 동안에는 불쾌함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숨통이 막혀서 걱정과 근심과 불안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예수님 안에 들여보내서 하늘을 향해 숨을 쉬게 되자 유쾌함과 상쾌함이 생겨납니다.
19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는 말씀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죄는 곧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에게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한 육체에 남아있는 죄의 체질은 예수님의 죽음의 힘에 의해서 억제되고 마음의 호흡은 위를 향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소원은 사람을 불쾌하고 침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소원은 세상과는 다릅니다. 소원할수록 마음에는 유쾌함이 생겨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소원의 내용들은 이루어져도 기쁨과 유쾌함이 일시적이며 한계가 있습니다. 숨통이 트였다 싶어도 금세 숨통이 막히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결국 다 없어질 속성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즉, 세상에 대한 소원은 이루어지기도 쉽지 않으며 이루어지더라도 별 볼일이 없는 죽은 소망의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소원은 하면 할수록 유쾌해지고 상쾌해지는 산 소망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이 모여서 문을 닫고 두려워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19절을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22절을 보면 이렇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숨은 마치 제자들을 향한 인공호흡과 같았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호흡을 나의 호흡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호흡이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가지신 것이었고 또한 소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이러한 예수님의 호흡을 우리 또한 똑같이 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고백하는 자에게는 성령이 오십니다. 이제 나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호흡을 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하시며 하나님만이 보물이라는 절대적 확신으로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하십니다. 마음이 하늘을 향해 호흡하게 되자 숨통이 탁 트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을 향해 호흡하기 때문에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라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돈 문제가 생기면 예전 같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돈 문제가 아무리 크게 닥쳐도 성령께서 예수님의 호흡을 하게 해주시기 때문에 숨통이 막히지 않습니다. 몸이 아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 같으면 건강의 있음을 느끼며 건강의 좋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건강이 안 좋더라도 걱정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성령으로 호흡을 하다 보니 건강이 아닌 하나님만 보물로 소원하게 됩니다. 건강이 안 좋은데도 마음의 숨통이 뚫려서 유쾌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은 마음의 숨통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마음이 위를 향해 호흡하게 하실 때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됩니다. 마음의 날숨과 들숨이 가능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위를 향해 호흡하며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동안에 삶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담고 계십니다. 이러한 성령께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 하나님의 뜻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았던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말하고 행동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나의 호흡이 척척 맞아 들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인격자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나의 죽음을 고백함으로써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는 약속대로 성령이 오시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게 하심을 통해 들숨을 쉬게 하시고, 또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하시면서 날숨을 쉬게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나의 인격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을 사위일체 호흡법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호흡함이 지속되는 동안 이 세상에 몸으로 대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령께서 나의 지정의를 장갑 삼아 역사해나가실 것입니다. 나와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님의 호흡이 척척 맞는 유쾌하고 상쾌한 인생이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호흡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고백할 때에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위를 향한 호흡을 통해 사위일체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있음과 좋음을 소원하면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을 숨 가쁘게 살아왔습니다. 안 이루어진다고 숨막혀 하고 조금만 이루어지면 바늘구멍만한 숨통이 트였다며 그것에 기대어 또 다른 소원을 가지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할 때에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위를 향해 호흡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 호흡이 진행되는 동안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가 이루어지며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교인이며 이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단 한 가지만을 간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히 위를 향한 호흡을 하게 하시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룸으로써 상쾌하고 유쾌한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