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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안에 있으면서 사람 상대하기>의 줄거리:
가정, 직장 등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사람을 상대합니다. 이처럼 사람을 대할 때 나는 주로 어떤 상태인가요? 별의별 사람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예수 안에 있으면서 상대하면 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서 사람 상대하기
(사도행전 4장 23절~31절)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안에 있으면서 사람 상대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서 사람 상대하기’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고친 사건을 계기로 3장과 4장에 걸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살펴봄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때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가 시작하는 단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이렇게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교인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지역의 예배당에 속해있다고 해서 그 예배당의 교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교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이 의식 속에서 언제나 첫 번째 이슈로 남아있는 사람이 교인이고 이러한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이렇게 교인과 교회의 시작단계에서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굉장히 어색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안으로 마음을 들여보낸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대하는 일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우리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라면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 있는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사람을 만나고 세상일도 해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상태에서 살아본 적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관전 포인트가 바로 이 점입니다. 본문에서는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가 유지되면서 사람을 만나고 세상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알기에 이러한 내용을 짐작할 수 있지만 당시의 예루살렘 교인들에게서 이러한 삶은 완전한 미개척 분야였습니다. 사도들조차도 예수님 안에 마음을 들여보낸 상태에서의 삶은 이제 막 시작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의 주축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잡혀가는 일이 벌어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형을 의결하였으며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집요하게 강요하다시피 해서 기어코 결행한 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갔을 때 교인들의 염려는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공회에서 풀려났고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는 돌아온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교인들이 그 말을 듣고 반응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로부터 무사히 돌아온 모습을 보자 교인들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론이나 교리를 배워서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25~26절을 보면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열방은 이방세계를 말하고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을 말합니다. 이방이 힘을 합치고 이스라엘 민족이 힘을 합쳤습니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지만 예수를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일치단결하였습니다. 또 세상의 군왕들이란 빌라도와 헤롯을 의미하고 관리들이란 이스라엘 사회의 최고 지도자층이었던 산헤드린공회원들을 말합니다. 이들 또한 본래는 단결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는 일치단결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 모든 일을 보고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자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당당하게 예수를 전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예루살렘 교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권력과 힘을 모아도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결코 그들의 의도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 교인들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세상을 대면하며 살아가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미개척 분야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관점이 확고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사회적 저항세력에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무사히 돌아온 사건은 세상이 어떤 힘을 규합하더라도 그 의도는 허사로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들의 모든 행위를 재료로 삼아서 원하시는 뜻을 정확하게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초기단계를 구성하는 예루살렘 교인들이 확고하게 깨달은 바였습니다.
또 27~28절에서도 이와 연관된 내용이 나타납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의 구성이 참 재미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있던 모든 힘이 규합하여 예수를 거슬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과 뜻에 의해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파견된 것이나 헤롯을 분봉왕으로 세운 것도 표면적으로는 로마 황제의 권한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것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자 했던 일은 완전히 허사로 돌아가게 되었고 너무나도 치명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우리에게 밝혀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힘을 재료로 삼으셔서 구원의 역사와 보시기에 좋은 창조적 역사를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교인 즉 그리스도인은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여보낸 사람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을 대적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대적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의 방해와 억압을 재료로 삼으셔서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서 선하신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기만 하면 어떤 원수나 대적을 만날지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허사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3장과 4장에서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특히 사람을 만날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문의 관전 포인트는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하고 그 죽음을 먹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55절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지금 이 세상을 향한 나의 죽음으로 믿을 때 예수님의 죽음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이 세상을 살 때 사람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대해 3장과 4장이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우리가 읽었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노력을 재료로 삼으셔서 오히려 계획하셨던 창조적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부터 거꾸로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에 모습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살아야 될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으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본문에 기록된 사건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 안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을 만나고 일으켜 세우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에 대해 3장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말하며 이 일이 자신들의 권능이나 경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은 베드로와 요한과 무관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서 분명히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장애인을 고치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대답은 앞선 6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6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없음의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부각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탈출하여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도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신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이 가득하셨기에 예수님 안에 들어간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만을 있음의 대상으로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들숨이 되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이 날숨이 되면서 하나님을 호흡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있는 상태에서 성령이 운행하시고 태초의 상황이 재현됩니다. 태초에는 성령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무(無)의 상태에서 운행하셨습니다. 한편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 위에서 성령이 운행하시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기적은 이들의 권능과 경건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자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끼는 상태가 되었고 좋음의 대상으로 확신하고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더는 마음에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성령님께서 이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위에 운행하시게 되었고 그 결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 성전 미문에 앉은 장애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들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 위에 운행하시던 성령님께서 장애인을 향해 가지고 계시던 하나님의 뜻을 받으셔서 일어나 걷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마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라는 말씀에 따라 장애인이 일어나는 제2의 창조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을 상대할 때에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이 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의 자리에 배우자를 대입할 수 있고, 자녀를 대입할 수 있고, 직장동료 등을 대입할 수 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해야 될 일이나 사건까지도 그 자리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대하는 기본입니다. 내 권능과 경건과 노력과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오직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탈출하셨기에 예수님 안에는 세상은 없고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러한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을 때 하나님의 정신이신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육체의 오감과 연결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 위에 운행하시다가 하나님의 뜻을 받으셔서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들을 향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제2의 창조를 해나가시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란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함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두 번째, 성령께서 일하실 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베드로와 요한이 장애인을 일으켜 세우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산헤드린공회원들과는 다르게 베드로와 요한을 선망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호의적이고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존경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러한 우호적 태도를 마땅한 것으로 여겨서 즐기거나 누리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의 심리를 좀 더 파헤쳐보면 이들은 수혜자가 되기 위해 호의적이었습니다. 장애인이 고침을 받은 것처럼 자신들도 베드로와 요한으로부터 무엇인가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수혜자가 되고자 욕구하는 마음을 이용합니다. 세상에서 존경받기를 원하고 관심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대중을 향해 수혜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수혜자의 자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똑같은 수여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상쾌하고 유쾌한 하늘 호흡을 통해 일상적으로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아갈 수 있음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러한 내용을 사위일체 호흡법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사위일체 호흡법을 이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할 때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산헤드린공회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층이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사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화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환대받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변함없이 존재합니다. 이 시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유튜브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튜브에 영상을 투고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느냐”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관심을 끌기 위해 끊임없이 차별화를 시도합니다. 차별점이 있어야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여겨서 관심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보이는 태도는 이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존경과 환대를 발생시키는 차별점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이 타인을 상대할 때에 나타나는 특징이고, 특히 나를 환대하고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게 된 사람들의 특징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갖는 다른 사람에 대한 궁극적 목표의식이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생애 처음으로 누리는 가장 좋음을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도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오히려 차별점을 계속해서 강조하며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나를 따라오면 당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겠다.”라는 확신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의 제안은 “당신들도 나와 똑같이 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차별점은 나를 필요로 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지금 인생에서 최고의 것을 누리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최고의 것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사람을 상대할 때에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6장 29절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이 최고의 상황이기에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상황이 되도록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에 붙잡혀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돈의 있음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낌으로써 성령이 운행하셔서 돈 문제를 맡으시고 하나님만 소원하는 상쾌하고 유쾌한 상황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자 합니다. 무슨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상태에서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상쾌하고 유쾌한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관계하게 됩니다.
여기에 사람관계에서 누리는 진정한 자유가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보람이 존재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관심을 얻으려 하지 않고 가장 좋은 하나님을 제시해주고자 합니다. 마음이 돈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돈으로 호흡을 하는 상태입니다. 돈으로부터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들숨을 쉬고, 돈을 소원함으로써 날숨을 쉬는 것입니다. 이 호흡을 중단시키고 하늘의 호흡으로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든 사람에게 하늘기운으로 인공호흡을 시켜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의 숨을 불어넣어줌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늘을 호흡하게 해주는 것을 관계의 목표로 삼게 됩니다.
세 번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인생은 원수나 대적들에 의해서 결코 침투되지 않으며 손해가 발생하지도 않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무사히 돌아왔고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산헤드린공회조차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인 탄압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설령 육체적으로는 탄압이 이루어질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 최선을 향해 이끌고 가시는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대적들의 영향력은 제로가 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갈 때 이러한 일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를 대적하는 것은 예수를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어떤 원수의 대적도 인생과 영생에는 조금도 해를 끼칠 수 없게 됩니다.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있었지 산헤드린공회 앞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산헤드린공회를 있음으로 느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원수를 대할 때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원수를 호흡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원수의 있음을 느끼면 원수로부터 좋음의 확신을 얻고자 하게 됩니다. 원수에게 좋음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원수가 사라지는 것을 좋음으로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원하게 됩니다. 나를 대적하고 방해하고 해를 끼치려 하고 억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산헤드린공회처럼 나의 거취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은 직장 상사일 수도 있고 판검사나 경찰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나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모든 결정권은 허사가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결정권과 어떤 힘도 적대적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갇혔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분명히 나에게 법에 따른 처벌을 구형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인생과 영생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면 재판관이 어떠한 판결을 내리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 최고의 길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상황이 되는 것이기에 법률에 의한 처벌이 진정 나를 위한 일로 작용하게 됩니다.
원수를 만날 때에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은 절대로 원수를 호흡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원수의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며 좋음을 확신하여 들숨을 쉬며, 하나님을 소원하며 날숨을 쉬게 됩니다. 원수의 있음을 느끼고 원수가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며 그것을 소원하는 호흡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있음만을 호흡하고 있으면 성령이 운행하시다가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 사람들에 대해서 할 말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고 간 산헤드린공회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공회에서 당당하게 예수를 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는 말에서는 판단하는 사람과 판단 받는 사람이 뒤집혀 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역사 속에서 판단하는 자의 입장이 되어 산헤드린공회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수가 아닌 하나님만을 호흡할 수 있는 길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죽음을 원수에 대한 나의 죽음으로 믿는 믿음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함이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유지될 때에 삶은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스스로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관계가 존재합니다. 꼭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장애인의 자리에 배우자, 자녀, 부모, 직장동료 등을 대입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나를 환대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느끼는 하나님의 좋으심을 똑같이 느끼도록 해주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목표가 됩니다. 하나님을 호흡하는 사위일체 호흡법으로 유쾌하고 상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나를 적대시하고 반대하고 억압하는 결정권자들이나 원수들을 만날 때에는 그들의 있음을 절대로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원수를 느끼고 원수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소원하는 호흡을 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호흡함을 유지할 때에 어떤 대적이나 어떤 결정권자의 무지막지한 방해와 결정도 다 허사가 됩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사람을 상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음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람을 상대하며 일상적으로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