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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밖으로 나가야 받는 큰 은혜>의 줄거리:
대체 누가 큰 은혜 받기를 주저할까 싶지요? 아닙니다. 은혜를 적당히 받아야지 크게 받아버리면 그 여파가 감당키 어려우리만큼 전혀 예상 밖으로 나타납니다. 큰 은혜가 무엇인지 몰라서 사람들은 은혜! 은혜! 합니다. 알면 큰 은혜 받기가 살짝 주저됩니다. 큰 은혜의 장단점을 잘 알고, 단점까지도 장점으로 보이고 바람직해 보여야 합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야 받는 큰 은혜
(사도행전 4장 32절~37절)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밖으로 나가야 받는 큰 은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밖으로 나가야 받는 큰 은혜’
오늘 본문의 중심이 되는 말씀은 33절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하였습니다. 큰 권능으로 행해진 부활에 대한 증언과 큰 은혜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무리가 큰 은혜를 받은 결과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필요에 따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나타난 이유는 바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부활을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전제 없이 부활은 증언될 수 없습니다. 죽음은 곧 부활의 대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행했던 부활에 대한 증언 또한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이라는 말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유는 곧 세상 바깥으로 나간 상태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부활은 그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곧 세상 바깥에서 새롭게 태어남입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큰 은혜란 바로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부활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은혜를 의미합니다.
은혜(恩惠)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만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은혜란 받아서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실존하는 좋은 것입니다. 없는 것을 받아서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또 나쁜 것을 받아서 좋다고 여길 수도 없습니다. 받았다고 하지만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에서 좋음을 확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재앙이지 은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은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짜여야만 합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내 것으로 삼았다면 은혜라 할 수 없습니다. 내 것으로 삼는다는 것은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어졌는데 금방 없어지거나 다시 빼앗긴다면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받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는 것이어야 하며, 반드시 좋은 것이어야 하며, 반드시 대가 없이 내 것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33절의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는 말씀에서 나타난 큰 은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활의 자리는 세상 바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언을 통해 받게 된 큰 은혜는 세상 바깥에서 받는 것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고, 반드시 좋아야 하고, 반드시 공짜로 주어져서 내 것이 되어야 은혜라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 누릴 수 있는 은혜란 곧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다는 것은 그 증언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연합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갔으니 세상의 일들에 대해서는 있음을 느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때 성령님이 오셔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해주시고 좋음을 확신하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소원하게 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진 상태입니다.
비록 마음이 하나님으로 온전히 충만하게 채워지지는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게 되면 하나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큰 은혜를 받은 것이기에 그 증거로 마음은 유쾌해지고 상쾌해집니다. 그리고 큰 은혜를 받은 증거가 삶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그것이 밭과 집을 팔아 사도들 앞에 두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은 이를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고 예루살렘 교인들은 가난한 자들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무상통의 모습은 이미 2장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과 재산이 분리된 상태가 되었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렇게 마음과 재산이 분리된 이유를 부활의 증언을 들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연합하게 됨으로써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된 결과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언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되면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되고, 몸으로 만나는 것들 중에서 소중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교인들이 밭과 집을 내놓은 것은 소중하고 아깝게 여겨지는 것들을 남을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소중하고 아깝게 여기는 대상을 절대로 포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밭과 집을 내놓게 된 것은 마음에서 소중하고 아깝게 여겨지는 대상이 하나님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에게 하나님을 포기하라고 했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사도들을 통해 부활의 증언을 들은 덕분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밭과 집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면 부활의 증언은 듣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활의 증언을 들음으로써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세상 바깥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공짜로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세상 안에 들어있는 밭과 집을 보니 더는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렇게 마음이 세상과 분리된 상태가 중요합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된 세상 대상들의 쓰임은 성령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바깥의 부활의 자리로 나감으로써 더는 세상에 있는 대상들을 소중히 여길 수 없는 마음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밭과 집을 판 것은 대단하게 여겨지지만 이들에게는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던 것은 마음이 부활의 자리로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자리에 나가자 하나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밭과 집의 있음을 느끼고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게 되었기에 더는 밭과 집을 중요하게 여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큰 은혜입니다.
유무상통은 대단한 일로 여겨지지만 진짜 대단한 일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큰 은혜로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부활의 자리로 나가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심으로써 그렇게 소원하던 하나님을 공짜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 이전에 마음이 부활의 자리로 가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큰 은혜라면 이 세상에서 주어진 것들은 은혜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에는 주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몸도 있고 땅도 있고 집도 있습니다. 아무런 재산이 없는 사람도 최소한 몸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갖는 것을 작은 은혜를 팔아 큰 은혜를 사거나 혹은 새 은혜 받고 헌 은혜 내주기 정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은 은혜가 아닙니다. 내 땅, 내 밭, 내 집, 내 돈, 내 몸, 내 건강, 내 가족, 내 직업, 내 사업 등의 모든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내게 주셨지만 내 것으로 삼으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은혜란 내 것으로 삼아야 될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상들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써 이러한 대상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큰 은혜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소원하게 된 상태에서 실제로 하나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더 사랑함”으로써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드러날 수 있었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주어진 대상들을 기준 삼아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좋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한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갖고자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소원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원은 언제나 “더 사랑함”으로써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밭과 집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보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자가 내게 합당하고, 아들이나 딸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자가 내게 합당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기준으로 가족을 주셨습니다. 가족들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강하게 느끼고, 가족들보다도 하나님이 더 좋으심을 확신하며, 그래서 가족들로 마음을 채우기보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소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사랑함”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자녀가 없다면 자녀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없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38~39절을 보면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4장 26절을 보면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한 구절로 압축시키며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을 안했다면 자기 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몸은 은혜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대상은 있음을 느낄 대상이고 좋음을 확신할 대상이며 소원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은혜의 대상은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받게 하시고자 주신 가장 기본적인 대상이 바로 몸입니다.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대상들은 은혜로 여길 대상이 아닙니다. “더 사랑함”을 위한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것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준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 기준보다 “더 사랑함”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배우자나 자녀나 몸은 내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은혜는 하나님을 좋아하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거나 부흥회에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말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부흥회에 가서 “예수 잘 믿고 충성하면 사업이 잘될 것입니다.”라고 하는 설교를 듣자 마음에 희망이 차오르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런 경험을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은혜가 아닙니다. 오히려 멸망을 가속화하는 저주에 가깝습니다. 진짜 은혜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 바깥에 계시기에 우리의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만날 수도 없습니다. 세상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면 마음은 세상의 대상들에 붙잡혀서 진짜 은혜이신 하나님을 가질 수도 없고 소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좋아할 때 내게 주어진 것들이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의 모든 대상보다 “더 사랑함”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은혜로 받았다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주어진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아까워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더 사랑함”의 기준이 되는 배우자나 자녀나 몸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입장이 됩니다.
배우자를 볼 때 배우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확인하면 배우자는 큰 은혜를 낳는 계기가 됩니다. 행여나 배우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았다면 마음이 세상 안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붙들고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배우자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고 세상 바깥으로 나감으로써 다시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배우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고 몸도 마찬가지이며 하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보다 몸보다 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대상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써 큰 은혜라는 황금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황금알인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배우자를 주셨고 자녀를 주셨고 직업을 주셨고 가장 근본적으로 몸을 주셨습니다. 몸을 주신 것은 몸을 은혜로 여겨서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서의 기준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몸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동일시하며 세상 바깥으로 나가 부활에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배우자도 자녀도 일도 결국 몸에 기인한 관계이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을 주시고 가족을 주시고 일을 주시고 재산을 주신 이유는 그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표현하기 위한 기준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라는 큰 은혜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삼을 수 있습니다. 큰 은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할 때에 유쾌함과 상쾌함이 생기게 됩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고, 또 말라기 4장 2절에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삶은 피곤하지 않고 지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대상들은 은혜가 아닌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상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드러낼 수 있고 큰 은혜로서 하나님을 황금알로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몸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어진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은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임하시고 몸에 대한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가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밭과 집을 팔아 가난한 자들과 나누는 것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밭과 집은 더는 소중한 대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몇몇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러한 사건과 관련하여 한 인물이 언급됩니다. 36~37절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다는데 굳이 바나바라는 사람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바나바는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의 공동체에 연결시켜 주었던 인물입니다.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각지로 흩어졌을 때 사도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여 교인들을 돌보게 합니다. 바나바는 또한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동행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나바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세상 바깥에서 하나님을 큰 은혜로 붙잡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나바를 통해 하실 일들에 대한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바나바에게는 밭이 전혀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나바 자신은 그것을 몰랐지만 성령께서는 밭을 처분하게 하셨고 그 결과 바나바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차질 없이 수행되어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무상통을 이야기할 때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희생과 박애정신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희생이나 박애정신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바나바를 통해 밭을 팔게 하신 것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의 인생여정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시기 위한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는 바나바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임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고 안디옥까지 뻗어나가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이 유무상통을 시작했을 때에는 큰 박해에 의해 밭과 집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라 예상해서 팔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해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들은 밭과 집을 버리고 각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어차피 잃을 밭과 집을 일찌감치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까지도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또 이미 다 팔았으니 예루살렘을 떠날 때도 아쉬움도 없었고 아깝게 여길 것도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큰 은혜를 받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 부활의 자리에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바깥에서만 큰 은혜이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는 더 이상 소중하고 아까운 대상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삶의 주도권을 쥐시고 마음대로 역사해 나가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앞으로 나에게서 일어날 모든 일을 아시고 주관해가시기에 처분할 것은 처분하시고 쓸 것은 쓰게 하시고 가져야 할 것은 가지게 하실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핍박이 가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유무상통을 시도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무상통의 사건이 온전히 성령의 역사였음을 염두에 두자면 우리의 삶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밭이 있고 집이 있고 재산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핍박이 일어났다면 막상 예수 믿기를 포기하는 사람들 또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다 팔아 나눈 상태였기에 이들은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예루살렘을 떠나 각지로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유무상통을 단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과 나누었다는 희생과 박애정신으로 본다면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 하나님이라는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것들은 큰 은혜를 위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사용되거나 또한 성령의 역사 안에서 합당한 쓰임새를 찾아나가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왜 성령께서 그러한 일을 하게 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모두 알고 계시는 성령께서 역사하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외 없이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하나님이라는 큰 은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언제 어디서든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큰 은혜로 가지게 하여 주시고, 이 세상에 남아있는 몸과 주어진 것들은 하나님을 더 사랑함을 드러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사용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모든 것들을 성령께서 주관하셔서 가장 적절하게 쓰임이 이루어지는 큰 은혜 받은 자로서의 축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