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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천국 구원 입구를 살짝 비껴가는 사람>의 줄거리:
그 유명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이야깁니다. 두 사람이 세 시간 간격으로 사도 베드로 앞에서 온 교회가 알도록 즉사하는 불행을 당합니다. 이 부부의 죽음이 치명적으로 참담한 이유는 육체가 즉사한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누구나 육체는 죽습니다. 이 죽음으로 부부는 천국 구원의 입구를 정말 아깝게 살짝 비껴간 것입니다.
천국 구원 입구를 살짝 비껴가는 사람
(사도행전 5장 1절~11절)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천국 구원 입구를 살짝 비껴가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천국 구원 입구를 살짝 비껴가는 사람’
본문에는 아나니아가 거짓말을 해서 즉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는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도 똑같은 일로 즉사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원에 다가섰지만 도달하지 못한 채 비껴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비껴간다는 말은 비스듬히 스쳐 지나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천국 구원에 대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초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천국 구원과는 동떨어졌기에 아쉬워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 구원에 도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었기에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교훈을 줍니다.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천국 구원의 입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천국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결정됩니다. 죽은 뒤에는 천국을 위한 어떤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동안 천국 구원의 입구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는 곧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천국을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수를 하는 사람들이 물속에서 오랫동안 머물기 위해 대롱을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에 천국과 연결된 대롱을 통해서 천국을 호흡할 수 있습니다.
이전 설교에서 “인생 영생 동시 살기 사위일체 호흡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호흡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의식의 시선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면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대롱을 입에 물게 됩니다. 의식의 시선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을 때 부활과 승천과 우편까지 이르는 그 길이 대롱이 되어서 천국을 호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시선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세상에 대한 마음의 호흡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호흡이 끊어짐이 죽음입니다. 마음의 호흡이 세상에 대해서 끊어지면 하늘에 대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입구입니다. 의식의 시선이 십자가에 적중할 수 없다면 천국을 호흡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호흡은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들숨과 채움을 위하여 소원하는 날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마음의 호흡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호흡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나의 의식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에 따라 대상이 결정됩니다.
의식의 시선이 돈을 바라보고 있으면 돈으로 호흡이 이루어집니다. 돈의 있음을 느끼고 돈의 좋음을 확신하기에 돈을 갖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반대로 의식의 시선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에 더는 세상의 어떤 대상으로도 호흡하지 않게 됩니다. 배우자와 대면하면서도 배우자로 호흡하지 않고, 자녀와 대면하면서도 자녀로 호흡하지 않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있음을 느끼고자 하지 않고 좋음을 확신하지 않으며 소원하지도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천국 구원의 입구이기에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호흡하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하늘에 닿는 길이요 숨을 쉬는 대롱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교인이었으면서도 왜 구원에 이르지 못한 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야만 했던 것일까요? 본문 1~2절을 보면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땅이나 소유를 파는 것은 예루살렘 교인들이 합의해서 만든 원칙도 아니었고 사도들이 제시한 강령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바나바의 경우처럼 재산을 팔았던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재산을 팔지 않는다고 해서 따지는 사람도 없었고 따질 근거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4절에서 “땅이 그대로 있을 때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네가 땅을 팔지 않았어도 나무랄 사람이 없고, 땅 판 돈을 내든 말든 나무랄 사람은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들 부부의 문제는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재산을 팔아 유무상통하는 일은 공동체의 원칙이나 사도들의 강령에 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유롭게 한 일이었기에 거짓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는 어째서 굳이 거짓말을 했던 것일까요? 3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는 부분을 직역해보면 “어찌하여 네가 사탄이 마음에 가득하도록 허락하였느냐”라는 내용이 됩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유무상통의 기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돈이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 돈을 아무 조건 없이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납득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에게 있어서 홍해가 갈라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의 역사가 가득한 현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서 만큼은 사탄이 역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에 의해 날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증언되는 상황 속에서 사탄으로 가득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특이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들 부부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도록 허락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다면 마치 미치광이 같은 모습이 나타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에 사탄이 가득한 이들 부부에게서 나타났던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었습니다. 재산을 팔아 나누는 것은 강제된 일도 아니었기에 땅을 판 값에서 일부를 남긴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팔든 안 팔든 자유였고, 일부를 내놓든 전부를 내놓든 내놓지 않아도 추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잘못이 있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즉사할 만큼 큰 죄였을까요?
이들이 즉사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의 마음상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다는 것은 의식의 시선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부부는 땅을 판 돈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의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일부만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보기에도 예루살렘 교회의 분위기는 특별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가운데 유무상통이라는 의도치 않은 기적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유행에 참여도 하고 실속도 챙기고자 재산의 일부를 감추고 일부는 내놓게 됩니다.
물론 교인들이 유행을 따라 유무상통에 참가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한마음 한뜻이었지만 밀가루 반죽처럼 한 덩어리였던 것은 아닙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쌀 포대와 같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쌀 포대는 그 자체로 하나이지만 내부에서는 각각의 쌀알이 독자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에게서 유무상통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기에 유행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유행을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개별적이고 독자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중에 사위일체 호흡이 진행되는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재산을 팔아 나누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자면 이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보였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행에 뒤지고 싶지 않았고 바나바처럼 헌신의 사람이라는 명성과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재산도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바랐던 것은 구원이 아닌 돈과 명성과 인정이었습니다. 돈이 아깝고 좋지만 교인들 사이에서 명성과 인정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 호흡을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유지하게 됩니다. 세상 것들에 대하여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두고 사탄이 마음에 가득하도록 허락을 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 부부는 세상 풍조를 따르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같은 행동을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로 하는 것과 남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일입니다. 남들과 똑같이 땅을 팔아 내놓았지만 성령이 시키신 일이 아니었고, 남을 따라서 한 일에 불과했기에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일지라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서는 하나님으로 호흡이 이루어져야 하고 삶은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열에 아홉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성령님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홉 사람이 하는 일이 멋지고 선해 보일지라도 그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 한다는 것은 결국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꼭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살아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교인의 겉모습을 보고 따르는 것도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훌륭한 교인이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에서 성령이 역사하고 계심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에게서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7~18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본받으라고 말한 후에 곧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본받으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하여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행위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세상 풍조를 따르게 되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었고,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을 하는 위선을 떨게 됩니다.
우리가 이들과 같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탄은 소원의 단계에서 역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있음의 느낌과 좋음을 확신하는 단계가 소원으로 발전하기 전에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러한 마음을 부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면 마음은 세상을 소원하게 되고 성령 대신 사탄이 마음에 가득하게 허락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구원받을 수도 있었지만 잘못된 선택으로 구원에서 아슬아슬하게 비껴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교인의 무리 속에 속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진리로 인정하고 옳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진리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마음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어느덧 십자가를 바라봄은 중단되었고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마음을 동일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진리라는 것에는 100% 동의하지만 십자가를 삶에 적용하는 일에는 소극적인 분들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필요했던 일은 십자가를 적용하는 일이었습니다. 돈이 좋고 아깝게 여겨지는 마음을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인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돈의 호흡함을 중단하고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대롱으로 삼아 하나님을 호흡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천국 구원의 시작점이고 입구가 되는 십자가를 의식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진리라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로부터 비껴 나감이 생겨납니다.
십자가를 보는 것과 삶을 사는 것을 다른 문제로 취급하기에 마음에서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하기가 중단되지 않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 끊임없이 나를 허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봄이 지속되지 못한다면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교인이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았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이 천국 구원의 입구를 아깝게 놓치고 빗나간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라는 입구를 놓치면 천국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 입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살아있는 동안 의식으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의식의 시선이 십자가를 향하는 동안에만 하늘을 호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이 처절하고 치명적인 이유는 더 이상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기에 죽음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살아있는 동안 의식의 시선이 십자가에 고정될 수 없어서 마음이 천국을 호흡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 부부는 사도들에 의해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대한 증언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끝내 하늘을 호흡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진리임을 인정했으면서도 삶에 대해서는 십자가로 시작하는 천국 구원의 길을 적용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땅을 보며 손에 들어온 돈을 보며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것을 중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유무상통에서 뒤지고 싶지 않았고, 바나바처럼 교인들로부터 명성을 얻고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 반응하는 마음은 의식의 시선을 십자가에 고정함으로써 부인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돈을 앞에 두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 한 가지 일을 할 수 없었고 그 결과 구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을 앞에 두고, 가정에서 가족들을 앞에 두고, 돈 문제를 앞에 두고 이루어져야 할 일은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를 할 수 없다면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진리라는 것을 믿고, 이 길만이 오직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에 동의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의식의 시선이 십자가를 향하지 않는다면 천국 구원에서 비껴 나가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벌어집니다.
고린도전서 5장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음행한 자들을 출교시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의미로 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출교는 아직 끝은 아닙니다. 적어도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은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죽었기에 모든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호흡함은 살아있는 동안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살아서 천국을 호흡할 수 없다면 몸이 죽는 순간 천국 구원의 가능성도 끝나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죽이신 것은 이들에게 더 이상 돌이킴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날마다 듣는 더할 나위 없이 구원에 가까운 환경을 허락받았습니다. 또한 주변에서는 교인들이 십자가를 삶에 적용하며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을 호흡하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유무상통의 기적이 일어나는 광경까지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에 유리한 환경 속에서도 끝내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았는데 참으로 놀라울 지경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는 처음에는 반가워하고 환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실제 삶에서는 십자가를 적용하기를 망설입니다. 의식의 시선이 여전히 세상을 향해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를 지속하면서 “왜 십자가에서 안 죽어지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십니다. 세상에 대해 살고자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호흡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더는 세상의 대상들로부터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을 호흡하기를 고집하면서 동시에 십자가에서 죽어서 구원을 받고자 하니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의식의 시선이 십자가에 올인 되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에 성령님이 오셔서 살아가십니다. 세상에 대해 죽지 않는다면 성령이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산헤드린공회원이나 비교인들과도 달랐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에 동의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내면적으로는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끝내 세상으로 호흡함을 중단하지 못한 채 십자가 입구를 빗겨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돈과 땅이 아까웠고 속한 단체에서 명성과 인정이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십자가로부터 의식의 시선이 비껴가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닙니다. 천국 구원의 입구를 영원히 빗나간 채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의 시선은 십자가를 비껴가서는 안 됩니다. 괴로움과 걱정과 고민과 어려움은 모두 비껴감에서 나타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은 교인들이 이렇게 죽으리라는 예고가 아니라 천국 구원의 입구인 십자가를 비껴가서는 안 된다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의 대상들 앞에서 의식의 시선으로 십자가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비껴가지 않고 천국 구원 입구에 적중함으로써 하루종일 하늘만을 호흡하고 진정한 유쾌함과 상쾌함의 하루를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신 이 길이 진리임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 앞에서 우리의 의식의 시선이 천국 구원의 입구인 십자가를 비껴갈 때가 많았습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오늘도 우리의 의식이 십자가 예수님을 향해 정확하게 머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