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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의 정면충돌>의 줄거리: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 이런 말은 없지요. 그러나 이왕 만든 김에 그 의미를 새겨보자면 출(出)세상 파와 애(愛)세상 파가 되겠습니다. 두 파 간의 정면충돌이 시작됩니다.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교인의 정체성 표현을 위해 힘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별세'(엑소더스)입니다. '아웃세상'이고 '출세상'이지요.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의 정면충돌
(사도행전 5장 12절~32절)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의 정면충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의 정면충돌’
앞서 사도들에 의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고 교인의 수가 늘어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부터 산헤드린공회가 본격적으로 교회와 사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는 오늘 본문의 내용과 연관하여 만든 말입니다. 아웃세상 파가 출(出)세상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인세상 파는 애(愛)세상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나 교인은 수없이 다양한 파벌 중에 어느 하나의 교단이나 교파로 분류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반적으로 파벌이라 함은 자신들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당파에 불이익을 끼치는 배척행위도 서슴지 않는 집단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나 교인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파벌집단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유일한 참 진리와 그 진리에 입각한 말을 함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적대시 당할 수 있을 뿐입니다.
교회와 교인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들이며,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유일한 삶의 원칙이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교회와 교인은 파벌로 분류될 수는 없지만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룬다는 신비한 기적의 은총을 모르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교회와 교인을 다양한 파벌 중의 하나로 인식합니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시각을 염두에 둘 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와 교인들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아웃세상 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의 정면충돌이 시작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로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기점으로 하여 엄청난 박해가 주어지면서 모임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예루살렘 교회는 사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 박해의 시작이 어떤 이유에서 주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누가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와 교인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못을 박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와 교인이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십자가를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의식 속에서 첫 번째 사건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16절까지는 앞서 밝혔던 예루살렘 교회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이고, 둘째는 믿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지지하지만 아직 믿음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며, 셋째는 그 외의 나머지 사람들로써 교인들을 경계하고 꺼려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언급된 이유는 이들 중에서 박해를 시작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박해는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일까요?
산헤드린공회의 주축을 이루던 사람들 중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약에 나오는 사독 제사장의 계열이라는 의미에서 사두개인이라 칭해지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교회의 박해는 주로 로마에 의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실제로 박해의 문을 연 것은 산헤드린공회의 유대종교 핵심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속해 있던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와 사도들을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선구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 전체에 대한 박해로 이어졌고 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박해했다는 역사적인 기록은 영적으로는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박해의 원인은 사두개파의 사상과 신앙의 특징에 기인합니다. 이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점을 특별히 의식하여 본문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잡혀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에 대해 1~3절에서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 그들을 잡으매…”라고 기록하며 사두개인들의 사상이 이유가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에 의해 증언되는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이해이긴 하였으나 부활과 내세를 믿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애초에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 자들이었고 그것을 자신들의 주요한 정체성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도들에 대한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사회적인 충돌로 여겨집니다.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공회의 주축을 이루던 사람들로써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로 모의하고 결정한 장본인들이었습니다. 군중들과는 또 다릅니다. 이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이어지면서 예수가 부활했고 승천하여 지금 천국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증언을 받아들일수록 사두개인들은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죽음의 책임을 피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8절에서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증언으로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사회적 책임의 문제를 넘어서 영적으로 큰 의미를 갖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몸으로 접하는 이 세상 외에 실재하는 다른 세계는 있을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몸으로 접할 수 없다면 다 헛소리고 망상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말씀과는 다르게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동시에 부활과 승천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미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사도들로써는 부활과 승천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두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활동은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 끝나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연관된 다른 가능성이나 일은 존재할 수 없었고 벌어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서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증언하고 있었고, 지독한 현세주의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는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갔으며 또한 예수 이름으로 성령이 오셔서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표적과 기사들이 갈릴리 출신의 사도들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것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표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고 있었기에 부인할 수도 없었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에 증언 자체를 막고자 박해를 시도하게 됩니다.
교회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사도들을 통해 많은 표적과 기사들이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못 본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본 사람들은 제자들을 비롯한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증언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았는데, 그 부활과 승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교인들과 우리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로 확인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이 지내다가 정치범으로 몰려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렇기에 그 증거로써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일이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들은 이러한 일들이 자신들의 힘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나면서 못 걷게 된 장애인을 고치며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증언하였고, 성령께서는 그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건들이 사두개인들의 정체성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이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잘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증언하며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니 사두개인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사두개인의 당파의 존립 여부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17~18절에서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마음과 뜻과 힘이 세상 안에 갇혀있었던 인세상 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와 교인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있는 아웃세상 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은 별세 즉 출세상의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바로 사도들의 증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 어떻게 건강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업을 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의 내용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사역을 사도들의 몸으로 지금도 연장해나가심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증언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께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 지금 천국에 이르는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증언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부활도 천국도 내세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몸으로 만나는 세상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도 이 세상에서 축복받고 잘 살기 위함이었지 결코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로 마음을 보내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이러한 사두개인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입만 열면 하는 이야기가 세상에서 잘사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길을 만드셨고 십자가가 그 길의 입구이고 그 입구를 통해서 마음을 세상 밖으로 탈출시키자는 이야기만을 하고 있으니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증거로 표적과 기사가 쏟아지고 있으니 사두개인들의 입장에서는 망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는 본문에서 지독한 현세주의자들이었던 사두개인과 사도들의 충돌을 박해의 배경으로써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 사두개인들과의 갈등은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물론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예수님과 주로 갈등을 빚었던 것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는 사두개인들과의 갈등이 첨예해집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잘못된 이해이긴 하였으나 적어도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가 존재한다고는 믿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증언에 대해 막무가내로 비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현세주의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내세도 믿지 않았기에 사도들과의 관계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보다 훨씬 더 악화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바리새인들이 라이벌 이었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의 라이벌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박해의 배경이 된 부활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란 마음을 세상에 묶어둔 채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있음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있음을 느낀 대상들 중에서 좋음을 확신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좋다고 믿는 대상을 실제로 갖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기능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구조가 이러하기에 행복과 평강과 기쁨과 만족은 모두 마음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증언을 듣는다면 마음은 세상 바깥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바깥에서 기쁨을 찾고 만족을 찾고 행복과 평강을 찾는 것이 교인의 정체성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교인들은 아웃세상 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인들과 첫 번째로 충돌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인세상 파라고 할 수 있는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평강은 오직 인세상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두개인들은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대상을 세상 안에서만 붙잡고 찾는 모든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사람들은 교인들의 주적입니다.
그런데 어느덧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서 예수 이름, 예수 부활, 예수 승천을 믿는다는 사람들로부터 사두개인들의 유전자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교인을 자칭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의 대상을 찾습니다. 인세상 파로 살아가기를 고집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은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모였으니 사두개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흔히 잘못된 교인들을 비난할 때에 바리새인에 비유하고는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에 근거를 두자면 바리새인의 특성보다도 경계해야 할 것은 사두개인의 특성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모두 누가입니다. 앞서 누가복음을 살펴보며 중심이 된 어휘가 있다면 별세 즉 엑소도스(ἔξοδος)였습니다. 구약의 선민들의 정체성은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광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애굽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한편 광야는 기쁨과 만족을 위해 추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그 광야에는 바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즉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사는 사람들이 선민이었던 것입니다.
광야는 세상 바깥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광야에 비교합니다만 세상 안에서의 삶은 결코 광야가 아닙니다. 광야로 비유될 수 있는 삶이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간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자리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자리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 한분만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고 평강을 누리고 기뻐하기를 소원하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운명으로 삼은 사람들이 바로 교인입니다.
이러한 교인들을 제일 싫어하는 부류는 이 세상만이 실재한다고 믿는 인세상 파입니다. 교회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인세상 파는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인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교회의 무서운 적대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가가 본문을 기록한 이유를 가슴 깊이 새겨야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의 내용이 세상 바깥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것입니다. 세상 것들에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 것들에 대해 좋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세상 것을 소원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 죽음을 우리에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기만을 바라는 사두개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으로써의 별세는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중심입니다. 누가가 별세를 붙잡았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별세를 붙잡을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에 대해 죽을 때에만 이 세상의 삶은 철저하게 유일한 원칙이신 성령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다만 성령의 역사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든지 그것은 우리의 기쁨거리도 아니고 만족의 이유도 아니고 평강의 근거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의 유일한 이유는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합은 오직 예수님을 따라 아웃세상 파가 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인의 특징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이야기되어왔던 별세가 사두개인에 의한 박해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9장으로부터 사도행전에 이어서 별세를 살아있는 단어로써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반드시 아웃세상 파여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도 우리와 똑같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구나!”라고 여기는 상태가 된다면 너무나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본문을 말씀드리며 바리새인은 잘못된 이해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부활과 내세를 믿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좀 더 나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현세에서 누리던 삶을 내세에서도 연장하여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현세의 삶을 내세에서도 이어가기를 바랄 만큼 세상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은 모두 현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과 내세가 있고 없고를 두고 싸웠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누가 더 현세를 사랑하는가를 두고 경쟁했을 뿐이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육체로 접하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현세의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며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사두개인이 지독한 현세주의자들이었다면 바리새인들은 현세주의적 내세관의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이나 천국을 믿었어도 내세주의 입장에서 믿었으니 이들의 믿음은 결코 올바른 것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발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성령의 원칙에 맡기고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평강을 위해서는 아웃세상을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인세상 파에서는 기쁨도 만족도 행복도 평강도 주어질 이유가 없고 근거도 없음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보더라도 “저 사람은 진짜 아웃세상 파다.”라고 인정할 정도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소원하며 이 세상에 대해서는 성령님만이 삶의 원칙이 되셔서 살아가는 아웃세상 파가 될 수 있습니다. 아웃세상에서 내 마음은 하나님을 소원하고, 인세상에서는 성령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살아가시는 투 트랙의 삶이 뚜렷하게 그려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 그 자체로 더 드릴 말씀이 없을 만큼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서 십자가를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마음은 아웃세상의 부활자리에서 하나님을 소원하며 상쾌함으로 유지되게 하시고, 마음이 떠나간 인세상의 삶의 자리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지정의와 언행을 온전히 지배하시는 땅과 하늘을 향한 투 트랙의 삶이 명확하고 뚜렷하게 이루어져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