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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에서 싫은 것을 대하는 방식>의 줄거리:
싫어함은 없기를 바라는 것이고, 좋아함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둘다 바람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정말 싫어해야 할 것과 좋아해야 할 것의 분별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그 대하는 방식이 오로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모든 바람이 잘못이고 바랄수록 생은 혼돈 공허 흑암으로 채워집니다.
세상에서 싫은 것을 대하는 방식
(사도행전 5장 33절~42절)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에서 싫은 것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에서 싫은 것을 대하는 방식’
본문에서는 지난시간에 말씀드렸던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의 정면충돌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아웃세상 파와 인세상 파의 충돌의 이유는 싫어함과 좋아함의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33절을 보면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로부터 인세상 파인 산헤드린공회가 무엇을 싫어했는지 잘 드러납니다. 앞서 산헤드린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예수를 전하지 말 것을 요청한 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대답하며 예수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맞는 말이기에 산헤드린공회원들은 더욱 화가 났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유대사회의 최고의결기관으로써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의 결정에 토를 달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공회의 결정을 곧 하나님의 결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들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언급합니다. 사도들이 산헤드린공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있음을 느꼈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더는 산헤드린공회가 하나님의 뜻을 주장할 권리가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의 존재감보다 사도들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본래 이러한 말은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이었던 사도들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형교회를 보면 담임목사님이 있고 그 아래로 많은 부교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만 그 발언권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존재감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과 신념과 소신은 묻히기 일쑤입니다. 사도들 또한 산헤드린공회 앞에서는 신념과 소신을 주장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도들은 당당히 예수님을 전파하였고 이에 산헤드린공회는 분개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특히 이들을 분개하게 했던 것은 부활 때문이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의 주축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속해있는 사두개파였고 이들은 부활과 내세를 부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입만 열면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는 곧 산헤드린공회가 십자가형을 내리도록 의결하여 죽게 한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승천하게 하셨다는 내용이었고 부활과 내세를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은 이를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활동은 정말 대단합니다. 저 또한 십자가를 전파하는 사람입니다만 사도들에 비하자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도들은 입만 열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도들의 활동은 사두개인들을 극히 분개하게 하였고 33절에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라고 기록된 대로 이들은 결국 사도들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누가는 계속해서 있음과 없음의 문제에 주목하여 말씀을 전개해왔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없이하고자 하였다는 말에 담긴 무게감은 상당합니다. 사두개인들은 지독한 현세주의였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크게 노하여 원수로 여긴 사람들에 대한 해결법 또한 단순했습니다. 자신들이 유일한 실재라고 믿는 인간세상으로부터 없애버리면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것이야말로 원수에 대한 최선이자 최종적 해결법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공회의 주축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었기에 이들의 문제해결 방식은 언제나 외통수처럼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 방법이 없었고 선택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과 산헤드린공회의 충돌은 결국 좋아함과 싫어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싫어하는 대상에 대한 대응방식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차이점으로부터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산헤드린공회의 싫어함의 방식을 따를 때 인생은 흑암으로 빠져버리고 영생도 잃게 되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소원과 바람을 갖는 것보다 해로운 일은 없습니다. 실제로 소원과 바람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그에 대한 바람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달렸습니다. 이것은 인생과 영생에 영향을 끼치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산헤드린공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소원과 바람을 갖는 일은 중단되어야만 합니다.
흔히 소원과 바람은 좋아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싫어하는 일이 없어지는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좋아함은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싫어함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없애고자 하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본문에서는 싫어함에 대한 문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하여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산헤드린공회 소속이었으나 사두개인이 아닌 바리새인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말리엘은 당장 사도들을 죽일 것처럼 분개하고 있던 사두개인들을 중재하고 회유합니다. 가말리엘의 변론으로부터 좋아함과 싫어함을 근간에 둔 바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원수와 변수와 방해입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사도들이 원수이고 변수이고 방해였습니다. 원수였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사도들이 부활을 전파하며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들의 활동은 예수님의 죽음의 책임을 사두개인들에게 돌림으로써 이들이 백성을 지배하는 일에 방해가 되고 장애가 초래되고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근간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원수와 변수와 방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보자면 장애, 차질, 위협, 비난, 올무, 함정, 실패,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요소들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없애고자 합니다.
저도 여러분들의 삶에서 원수와 변수와 방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남에게는 가질 수 있을지언정 나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삶에서 원수와 변수와 방해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음이 세상에 머물러 갇혀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갇혔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 있음의 느낌을 갖고 좋음을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상에 대한 소원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우선적으로 마음이 이 세상에 갇혀있는 상태를 제일 싫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것은 원수도 아니고 변수도 아니며 방해나 장애나 어려움이나 실패나 좌절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아웃세상 파의 마음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로 대표되는 인세상 파의 마음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거꾸로 일어납니다. 마음은 세상의 붙박이가 되어서 원수와 변수와 방해만 없어지기만을 바랍니다. 내가 가장 싫어해야 마땅한 죄악의 상태를 가장 좋아하고 바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음을 붙박이로 해놓고 이 세상에서 마음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위하여 원수제거, 변수제거, 장애제거, 차질제거, 비난제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죄악의 결과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가장 싫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두개인들과 같은 인세상 파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이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것은 신앙의 기본전제입니다. 이러한 기본전제에서 원수나 변수나 방해는 마음이 세상을 떠나기 위한 유익한 조건이 됩니다. 세상에 마음의 배를 붙이지 못하도록 자극을 주는 요소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수가 나타났다고 느껴진다면 원수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원수를 없애려 하고 변수를 없애려 하고 방해를 없애려고 합니다. 세상만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마음을 떠나보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두개인과 같은 현세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고 싫어하는 대상들을 없애고자 하는 것은 인생과 영생을 동시에 망치는 자충수가 됩니다.
반면에 사도들과 교인들은 마음이 세상을 떠나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에서 원수를 만나고 변수가 발생하고 방해가 생길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삶의 어려움을 없애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움 때문에, 원수 때문에, 장애 때문에, 마음의 평강이 깨어지고 고통을 느낄 때면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이 지금 세상에 머물고 있음을 알려주시는구나!”라고 여기며 원수와 변수와 장애로 인하여 마음이 세상을 떠날 계기로 삼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이 공백으로부터 채움을 갈구하는 소원이 발생하게 됩니다.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대상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실제로 갖고자 소원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바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따라서 비어있는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써 있음과 좋음과 소원의 단계가 원활하게 작동하게 되면 삶에는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게 됩니다.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기쁨과 만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풍랑 만난 배에서의 예수님, 감옥에 갇힌 베드로와 바울의 예가 이와 같습니다. 육체가 처한 상황이 마음의 고통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의 평강이 깨지는 삶의 어려움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원수로 인해 고통스럽고 변수로 인해 평강이 깨지고 방해로 인해 불안하고 초조하다면 마음이 이 땅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사두개인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로 인해 마음이 불안해졌다면 그것을 하나님을 향하는 계기로 삼아야만 했습니다. 사도들로 인해서 위협이나 불안을 느꼈다면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세상 파로서 세상을 사랑하던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마음에서 세상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도들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돈문제 때문에 마음의 평강이 깨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돈 문제를 없애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시돼야 할 것은 돈 문제를 있음으로 느끼고 있는 마음을 세상에서 없애야만 합니다. 또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직장동료들과의 문제가 삶의 변수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은 문제를 없애거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하고 마음이 세상에서 없어져야만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없어지기를 바랄 대상은 나의 마음입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원수나 변수나 방해가 없어지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사두개인 같은 현세주의자들은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기에 마음에서 세상을 잃으면 삶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마음이 없어지면 나의 마음이 있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주권을 모조리 받아들이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오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성령님께서 나를 움직여 가시는 원칙과 추진력이 되어주실 수 있음도 전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세상 파인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역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바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면서도 이 놀라운 은혜를 모른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사두개인들처럼 살아갑니다. 원수와 변수와 방해가 마음의 평강을 깨뜨리고 고통과 불안을 준다고 생각해서 없애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문제로 여겨진다면 그만큼 마음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마음을 없앨 계기로 삼으라는 것이고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아닌 원수와 변수와 방해를 문제시하며 없애기를 시도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이 세상에 머물게 된 상태가 바로 제일 싫어해야 마땅할 죄악의 상태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깨달음을 가진 자에게 원수의 등장은 오히려 고마운 일입니다. 어떤 일을 골칫거리로 여겨서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자주 접하게 되는 오해가 한 가지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로 이 세상 삶에서 떠나지 않고 나 대신 하나님을 세상에 투입하며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프로레슬링 경기에서 선수교체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시는지 관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과 승천을 떼어놓고는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해 죽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세상 것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소원하는 것이 악입니다. 이러한 죄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의 기능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소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실제로 마음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삶에는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났으니 더는 세상에 쏟을 마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떠난 자리에 성령님께서 오셔서 지정의와 말과 행동을 장갑 삼아 움직여 가시는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세상의 기준에서 삶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한데도 사도들처럼 잡혀서 매를 맞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데도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데도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힐 수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세상 형통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이 세상에 원수들이 들끓고 변수가 둘러싸고 모든 방해와 장애들이 폭풍처럼 일어나도 하나님의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십니다. 세상에서 형통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의 평강이 깨지지 않고 기쁨과 만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결코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성령의 역사는 하늘과 통하게 해주시고 하늘과 연결되게 해주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강렬하게 느끼게 해주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도들의 행적에서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간 산헤드린공회는 예수님을 죽인 전과가 있는 유대사회의 최고의결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거대한 세력 앞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있음을 더 크게 느꼈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카투사에서 복무할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에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병장들을 배려해서 머리를 다소 기르더라도 용인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도 병장으로 머리가 좀 길었는데 새로 부임한 일병이었던 헌병이 부대 내의 관습을 모른 채 규율을 강요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다른 미군이 보게 되었는데 오히려 병장이었던 제가 일병인 헌병을 압박하던 것으로 오해하여 신고하였고 저는 헌병 취조실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무서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사도들이 잡혀갔던 산헤드린공회는 스승인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리도록 의결한 곳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산헤드린공회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당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들은 세상적인 의미에서는 형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세상 그 누구보다 평강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삼각산 입구에 살았는데 그 입구에 항상 현수막이 걸려있었습니다. “성령 충만, 해결 충만, 재정 충만, 건강 충만”이라는 글귀가 적혀져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성령 충만은 이렇게 오해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도 삶이라는 경기에 하나님을 교체선수로 투입하고자 합니다만 내가 죽었다는 것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세상 안에서 바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라는 표현을 통해 싫어함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는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마음은 반드시 세상을 떠나야만 합니다. 제일 무섭고 두려운 일이 있다면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원수나 변수나 방해를 만났을 때 싫어하며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원수와 변수와 방해를 만났다면 싫어할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더욱더 굳건히 땅에 붙이기 위해서 확고부동한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원수 변수 장애들이 없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예루살렘의 교인들 중에서 이러한 마음을 가졌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 부부는 마음을 세상에 고정시키고 있었고 그 결과 하늘로 들어가는 입구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영원히 놓치게 되었고 천국 구원을 상실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마음을 죽이는 십자가 생활화는 참 기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가 주어지고 원수가 주어질 때 싸워서 이기라는 요청을 하셨다면 그것은 무척 힘들고 고단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원수와 변수와 방해를 계기로 삼아 세상을 떠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며 하늘로 가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 길의 입구인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면 될 뿐입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이 세상을 떠나면 삶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해나가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붙잡고 씨름해야 될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한편 본문에 38~39절을 보면 가말리엘이 말하기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하였고 이 말이 합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주석에서도 이러한 대응을 적절하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즉석에서 떠오른 생각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깨달음과 경험이 누적되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말리엘의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는 이유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재판 때에는 침묵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충돌의 중심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사도들의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이 주된 내용이기에 사두개인들과 충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대중들에게서 존경받던 바리새인들의 위선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고 바리새인들은 한뜻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고 가말리엘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는 침묵하였습니다. 이제야 사람에게서 난 것과 하나님에게서 난 것을 운운하며 분쟁을 억제하고자 하는 것은 이해타산적인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세상 안에서의 이해관계를 통해서 끝없이 분열한다는 점입니다. 칠십 명으로 이루어진 산헤드린공회의 대다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포함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과 대치하던 바리새인들과의 가장 치열한 논쟁점은 부활과 내세였습니다. 이것은 일반 대중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역사를 일으키고 있었고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는 사두개인들을 공격할 기회처럼 여겨졌습니다. 염려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산헤드린공회에서 열세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기회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한때는 최대의 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위선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지만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던 현세주의적 내세관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했기에 예수님께서 이들의 위선을 들춰내시자 앞장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사도들이 부활과 내세를 전파하자 이번에는 그것을 기회로 포착합니다. 그 결과 가말리엘이 사두개인들을 회유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세상 안에 마음이 머물면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면서 이해관계를 통해 끝없이 분파가 갈라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와 교인에게서는 당파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는 싫어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싫어하거나 좋아하려면 마음이 세상 안에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라가느라고 더는 마음이 세상 안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설령 정치적인 소견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저 또한 과거에 그런 문제를 겪었습니다. 정말로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면 야당을 지지할 수도 없고 여당을 지지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곧 그 당이 목표로 하는 바를 지지하는 것이고, 이는 곧 이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치권에 대해 어떤 기대나 바람이 존재한다면 아직 진정한 의미의 교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좋고 나쁨을 따지는 동안에 사람들 간에 갈등이 빚어지고 파벌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의 교회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개신교의 분열현상을 보면 얼마나 믿음이 사라졌는지 단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조차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온전히 세상을 떠났다면, 육체로 만나는 세상에서 좋고 싫음이 없었다면,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했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만 나타나기를 바랐다면 기독교는 지금처럼 갈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 싫어하는 원수가 있고 변수나 방해로 인해서 마음의 평강이 깨지고 기쁨과 만족이 사라졌다면 마음이 땅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라는 계기를 제공해주신 것입니다. 마음을 땅에 붙이려는 상태를 바늘로 찌르고 불편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옳은 응답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옳은 응답은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것은 원수나 변수나 방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수가 있는 세상에서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변수나 방해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이 점을 잊지 않고 십자가를 생활화하신다면 진정한 평강이 무엇인가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를 잊지 않으므로 원수, 변수, 방해, 장애, 비난, 어려움을 비롯한 마음에 온갖 부담을 주는 싫어하는 것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것들을 제거함으로써 세상 사랑을 확고히 하려는 삶이 중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이 주님 따라 이 세상을 빠져나가 아버지께로 가는 진정한 교인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