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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별세하는 개인들을 조직으로 묶지 말자>의 줄거리:
교회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을 탈출하는 개인들 전체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집단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모임을 가지게 되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유혹이 있습니다. 바로 조직화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조직화는 이 세상을 탈출하려는 각 개인의 발목을 잡는 천적으로 작용합니다.
별세하는 개인들을 조직으로 묶지 말자
(사도행전 6장 1절~15절)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별세하는 개인들을 조직으로 묶지 말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별세하는 개인들을 조직으로 묶지 말자’
별세는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날마다 세상을 떠나는 개인들을 조직으로 묶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조직이 된다면 별세하는 개인들의 발목을 붙잡아서 세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별세하는 삶과 교회의 조직화는 천적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직화된 교회 내에서 교인들의 별세의 삶은 중단됩니다. 개인들의 별세의 삶이 교회 안에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교회는 조직화되는 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개인들의 별세의 삶과 교회의 조직화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여러 방면에서 교회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본문은 교회는 조직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웃세상 파의 모임입니다. 이전 말씀에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예수님과 연합하는 사람들이 교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는 모든 교인은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탈출하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과의 연합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집단에 속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 또한 모임이기에 집단으로서의 끊임없는 유혹에 부딪히게 됩니다. 본문은 바로 그 유혹을 경계할 것은 요청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경계하는 유혹이란 바로 조직화입니다. 교회는 모임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그 모임이 지속될 때는 반드시 조직화의 유혹이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의 모임이 아무리 왕성하더라도 그 모임의 근간에는 반드시 개별적으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연합함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연합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자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가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을 보물로 확신하며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사이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직화되기 시작하면 이와는 반대의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조직은 반드시 유지되고 확장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확장되기를 원하는 조직의 생리적 욕구는 조직원들의 참여를 요구합니다. 개개인들의 마음과 뜻과 힘을 쏟아붓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교회를 이루는 것은 별세를 해야 하는 교인들입니다. 교인은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전심으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며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직화된다면 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조직화된 교회의 정체성은 반드시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조직화된 교회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교인들의 고혈을 빨게 됩니다. 교회가 조직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부할 수 없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교인의 별세를 못하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임을 갖되 조직화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에서는 교회가 조직화를 시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3절을 보면 교회 내에서 히브리파의 과부들과 헬라파의 과부들 사이에서 그룹이 생기게 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유무상통을 통해 헌납된 헌금으로 구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루살렘 교회에는 귀환한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가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외국에 나가 살던 사람들이 고향이 그리워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와서 살다가 죽기로 희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남편이 죽은 헬라파의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척이나 연고지가 없었기에 먹고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당연히 구제의 대상이었으나 교인이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어느덧 구제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모임에 속한 사람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자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계층의 사람들이 소외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확장되어도 모임은 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세 사람만 모여도 모임의 성립요건은 충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들이 계속해서 하나의 모임으로 뭉치고자 하였고 그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자 사도들은 교회의 조직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 있게 될 교회에 전하는 커다란 교훈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교회는 이 메시지의 교훈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조직화를 반복하며 2000년을 보내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비교회화 되었고 교인들은 비교인화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특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앞서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기록된 박해의 내용과는 상반되게 제사장의 무리가 교인이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 존재하던 제사장은 무려 8,000명에 가까웠습니다. 산헤드린공회가 7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소수이기는 하지만 바리새인과 장로들도 포함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비록 그 권한이 막강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제사장들과는 동떨어진 집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제사장들이 산헤드린공회와는 무관하였고 수입이 전혀 없어서 생계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구제의 대상이었기에 이들 중에 교인이 된 자들도 적잖게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증언하는 복음의 사역이 예루살렘 안에서 광범위하게 도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과부 같은 취약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사장 같은 종교지도자의 계층까지 다양한 사회적 계층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단계 중에서 예루살렘의 단계가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인식은 아직도 다음 단계로 나갈 준비가 되지 못한 채 예루살렘에만 묶여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히브리파 과부들은 구제의 대상이었지만 헬라파 과부들은 구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된 것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갇혀있던 복음의 영역이 이제는 예루살렘 바깥으로 나가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전도사역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단계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교회 조직화의 금지로 이어지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을 전도하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조직화는 교회의 천적이라는 것이 본문의 사건들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식탁 봉사를 위해 일곱 집사가 선출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식탁 봉사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을 충실하게 직역을 한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과 교회내의 일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가 분리되면서 교회의 조직화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집사들의 행정적 업무에 대한 기록들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이나 빌립 집사님이 대체 어떤 행정적 일들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집사님들이 한 일은 사도들을 방불케 하는 말씀 사역이었고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행정을 맡기고자 하였으나 사도와 똑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 사건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였습니다. 이윽고 교회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되고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자 집사들은 더는 행정적으로 무엇을 할 필요도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와 원하시는 교인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조직화를 시작하며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스데반 집사님이 말씀을 전하다 순교할 것을 아셨고 그렇게 되도록 결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박해가 임할 것이고 그로 인해 교인들이 흩어짐으로써 조직화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것임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통하여 사도들과 온 교인이 한마음이 되어서 조직화를 시작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조직화를 허락하셨음에도 그 조직을 박해를 통하여 부수시고 멈추게 하신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 전체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땅에 있게 될 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의 메시지로 삼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좀 더 부연을 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으로 조직화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시점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조직화를 이루도록 허락하시고 집사들을 선출하는 것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일곱 집사의 봉사의 내용은 사도들이나 교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행정적인 일들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집사들에게 사도들과 똑같은 활동을 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첫 순교가 사도가 아닌 집사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교회에 박해가 임하면서 교인은 흩어지게 되어 애초에 정해놓은 행정적 일들은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조직화를 시작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은 반면교사로 삼으시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화는 하나님께서 박해를 통해서라도 뿌리를 뽑고 정지시키고 부수는 대상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사도들의 생각이 드러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였고 4절을 보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사도들의 발언 뒤에 곧바로 스데반 집사님을 비롯한 집사들에게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하였고 10절에서는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스데반 집사님의 활동은 사도들이 계획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과 교인들은 한마음이 되어서 조직화를 시도했고, 조직 내의 행정적 일들을 담당할 사람으로 일곱 집사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도 행정적 일을 수행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교회사를 통해 전래되는 이야기들을 보면 이 집사님들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 말고도 다른 집사님들도 말씀을 전하다 순교하거나 타 지역의 교회에 감독으로 파송되어서 교인들의 말씀 문제를 감당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행전 8장 4~5절을 보면 빌립 집사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더는 집사가 아닌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다 아셨고 교훈으로 삼게 하시고자 굳이 조직화의 결과로써 집사들을 뽑게 하셨고 그 조직화를 깨시고 집사들을 사도와 같이 쓰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해보자면 “다시는 조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모임을 가져야 하지만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교회를 이루는 교인의 본질이 별세이기 때문입니다. 별세는 각 개인이 죽어도 지켜야만 하는 교인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교인이라면 반드시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나님께로 가기 위해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오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무엇에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교회의 조직은 반드시 조직원들의 마음과 뜻과 힘을 요구합니다. 설령 교회의 조직이라도 그것이 조직인 이상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전도회 회장이라면 여전도회에서 계획한 프로그램과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마음을 쓸 것입니다. 이것은 조직이라는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당한 일이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도회 회장도 회장이기에 앞서 교인입니다. 교인이라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의 길을 따라 하늘에 이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를 이루는 모든 교인들에게 해당됩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든지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상을 별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조직화된 교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마음을 이 세상에 묶어두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앞서 교회의 조직화는 별세의 천적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교회의 조직화와 별세는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건은 하나님과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결혼식을 마친 뒤에 이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애굽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역을 따로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살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일인 만큼 교회의 조직화와 별세 또한 공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혹시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뽑아 백성들을 재판하게 한 사건을 떠올리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때와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상황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만인제사장이라는 말이 뜻하는 대로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름으로써 하나님과 4위일체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 때에는 모세만이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었기에 모세의 뜻을 전달할 자로써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같은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신 후에는 모든 개인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별세의 주인공이 되는 이 시대에 교회의 조직화는 정당화될 수 없는 시대역행적 발상입니다.
4절을 보면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외의 교인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또한 역설적인 교훈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지 않아도 되는 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후에 집사들을 통해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사도들에게도 깨달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에서 끊임없이 나타날 수 있는 오해를 시정할 수 있는 대표로 예루살렘 교회를 삼으셨습니다. 사도들과 교인들을 통해 조직화의 오해를 연출하게 하시고 깨뜨리심으로써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있을 모든 교회에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빌립 집사님은 베드로나 바울에 못지않게 사도직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빌립 집사님만큼만 하면 사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로 임명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 앞에서 사도나 집사의 직책의 구분은 유명무실해지고 말았습니다. 누가는 바로 이러한 일이 모든 교인에게서 일어나야 함을 본문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는 일은 모든 교인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만 말씀 사역은 단순히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것 또한 말씀 사역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요청하셨던 것은 주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1편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또 여호수아서 1장 8절을 보면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치러야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것 또한 바로 말씀의 묵상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은 말씀 사역의 일환이었고, 그 말씀 사역은 말씀을 전하는 사역이 아니라 말씀을 받는 사역이었습니다.
다윗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목동 때나 골리앗을 죽일 때나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나 왕이 되었을 때나 한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는 말씀대로 다윗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먹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어 가실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는 사람은 들음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말씀의 사역은 이처럼 하나님과 만나고 친해지기를 바라는 모든 교인들의 공통적인 사명입니다.
본문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께서 오해를 일으키게 하시고 그 오해를 깨뜨림으로써 깨닫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박해를 통해 조직화는 불가능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행정적인 일을 담당할 집사님들의 일의 내용 또한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이 모든 과정을 준비하신 채로 집사를 뽑게 하셨고 집사들을 통해 사도들보다 더 많은 역사를 일으키게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말씀과 기도를 본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게 하십니다. 이로써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고 집사들은 행정적인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오해를 깨뜨리십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조직화는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조직 속에서 분업을 이루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조직화는 교회의 유혹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조직화가 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서 목격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사도들만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모든 개인들 또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때에 이 세상의 삶은 성령이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 모습이 사도의 모습으로 나타나든 회사원의 모습으로 나타나든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나타나든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행해 나가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직 속에서 행정직을 담당할 사람으로 집사를 뽑았지만 성령께서 그 집사들을 통해 하신 일은 규정이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빌립 집사님을 비롯한 집사들은 사도들과 똑같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셨다는 것을 간과해왔습니다.
우리는 사도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별세를 본분으로 삼는 교인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조직이 규정한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셔서 필요한 일을 수행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내 삶의 내용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드시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내 삶의 내용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행정 일을 담당해야만 할 필요도 없고,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이고 우리 모두가 집사이며 동시에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내인 것은 성령께서 겉으로 드러내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이 별세하는 자들입니다. 별세하는 자들로써 언제 어디서든지 십자가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이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별세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그 현장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유일한 삶의 원칙이신 성령님께서만 알아서 결정하시고 우리를 장갑삼아 행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