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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차감 신앙이 승차감 신앙을 박해한다>의 줄거리:
"사울은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산헤드린 공회가 미처 사형을 의결하기도 전에 분노한 군중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 죽였는데, 이렇게 모든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도대체 스데반 집사님의 어떤 점이 청년 사울을 그토록 분노하게 한 것일까요?
하차감 신앙이 승차감 신앙을 박해한다
(사도행전 8장 1절~3절)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차감 신앙이 승차감 신앙을 박해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차감 신앙이 승차감 신앙을 박해한다’
본문 3절에 “잔멸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커다란 멧돼지 한 마리가 잘 정돈되고 가꾸어진 포도원에 들어가서 마구 뛰어다니며 짓밟아서 일순간에 황폐하게 하는 모습의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울이 교회를 황폐하게 하는 멧돼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하차감 신앙을 가진 자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차감 신앙을 가진 자들은 승차감 신앙을 가진 자들을 근본적으로 싫어하여 박해하게 됩니다. 현재 기독교라 불리는 예배당 모임들의 현실을 보면 하차감 신앙이 승차감 신앙을 몰아내고 승리한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년 사울은 바리새인으로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말리엘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가 사도들을 잡아들여 심문을 하게 되었을 때에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이었던 가말리엘이라는 랍반이 이들을 중재하였습니다. 랍반이란 우리의 스승이란 뜻으로 랍비들 중에서도 크게 여겨지는 자였습니다. 사울은 바로 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곧 왕가의 후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울은 누구보다도 유대교를 향한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울은 미래를 책임지고 짊어질 촉망받는 기대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러한 사울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듣고 극히 분노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하차감 신앙과 승차감 신앙이라는 비유를 통해 이해해 보겠습니다.
제목에서 언급한 승차감이란 주로 자동차를 평가할 때 쓰는 말입니다. 차를 새로 사면 촉각을 곤두세워서 승차감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편안함과 안정감이 느껴지는가, 지면에 바퀴가 닿는 느낌이 몸에 전달되는가, 커브를 돌 때는 어떤가, 가속할 때는 어떤가를 몸으로 느끼며 승차감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요새는 하차감이라는 말도 쓰인다고 합니다. 저도 하차감이라는 말을 어떤 분을 통해서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새로 생긴 말인지 이미 있었던 말인지 궁금하여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이미 등재되어 있었습니다. 사전을 보면 “하차감(下車感)은 승차감(乘車感)에서 파생된 말로, 차에서 내릴 때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에서 받는 느낌을 이른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차가 그만큼 삶의 필수품이 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대상이 되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차감이 나 홀로 받는 느낌이라면 하차감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받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차감은 사실 차를 타고 있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 차를 보며 나의 사회적 입지를 평가하는 것으로부터 받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내 차를 보고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긴다면 하차감이 좋은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내 차를 보고 별거 아니라고 여긴다면 나 또한 별거 아닌 사람으로 느껴지게 되고 이러한 차는 하차감이 나쁜 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새는 차를 구입할 때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더 중시한다고 합니다. 보통 승차감이 좋은 고급 차일수록 하차감도 좋아지기 마련입니다만 애초에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신앙에도 승차감 신앙이 있고 하차감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차감 신앙은 승차감 신앙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경멸하고 거리를 두려 하고 그렇지 않다면 아예 무관심합니다.
신앙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해서만 하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영화로운 광채의 주인공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이 있음의 느낌에서 1등이시고 전부이시며, 하나님만이 좋음의 확신에서 1등이시고 전부이셔서, 24시간 작동하는 소원이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 안에 마음이 승차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승차감이 차를 탈 때 받는 느낌을 드러내는 표현인 것처럼, 신앙에서도 하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갔을 때 받는 느낌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느낌을 받느냐를 중시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른바 승차감 신앙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과 소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신앙에는 온전한 형태로서의 승차감 신앙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차감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나를 평가해주기를 관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마음의 관심이 세상의 시선에 집중되어 있기에 정작 살아계신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차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관심의 대상은 하나님이 되셔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를 바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자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신앙의 형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세상에서 복을 받았다, 하나님 때문에 일이 잘 풀린다, 하나님 때문에 번영하고 있다.”라는 말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닌 사람들의 시선에 맞추어진 상태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상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난 상태입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하차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관심하는 것이 하차감 신앙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승차감 신앙과 하차감 신앙은 하나님과 세상을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승차감 신앙은 찬란한 하나님과 그림자 세상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차감 신앙은 찬란한 세상과 빛바랜 하나님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차감 신앙에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찬란할 필요도 없고 빛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심의 대상이 사람들의 시선이기 때문에 마음이 느끼는 찬란함과 영화로움 또한 세상에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신앙의 구분은 차를 고르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차를 이동수단으로 생각한다면 승차감을 중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차를 자랑거리로 여긴다면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중시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인구대비 슈퍼카 구입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은 승차감이 아니라 하차감입니다. 차가 편한지가 아니라 남들이 내 차를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는 것입니다. 대개 고급차가 승차감도 뛰어난 편이기에 고급차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제력이나 사용용도에 맞춰진 선택이어야 합니다. 제가 벤츠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유학하면서도 한국에서처럼 벤츠를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는 벤츠의 승차감을 원해서 타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신앙의 문제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벤츠 같은 외제차를 타는 분들을 비난하고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벤츠가 주어진다면 충분히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벤츠가 아니라 페라리를 타고 다녀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승차감보다 하차감을 중시하는 주객전도의 마음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면 본문에서 대조적으로 드러나는 인물이 스데반 집사님과 사울입니다. 1절을 보면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했던 사울이 이윽고 사도 바울이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자면 참 극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교 특히 바리새인들의 핵심 사상을 염두에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강림하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거룩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 자체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에 대한 인정이자 존경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믿음은 왜곡되어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 이유는 죄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죄인으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을 보게 될 때는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지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죽으셨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마음이 들어감으로써만 씻기고 억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에 대한 인정과 존경은 어떻게 죄를 없애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서 나타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특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대신에 아예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분이라 못을 박았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각자의 마음속에서 어둠 속에 계신 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선민들은 하나님 대신 세상을 보게 됩니다. 선민의 나라와 민족이 이 세상에서 찬란한 자리에 서서 만민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번영과 형통을 꿈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에서 크게는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바라고 작게는 개인의 형통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선민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불렀지만 마음으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소원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오직 전능하신 능력을 주심으로서 선민 이스라엘이 모든 이방민족들 위에 우뚝 서도록 번영하게 해주시면 된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종교 사상의 핵심입니다.
즉,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아서는 안 된다.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예쁘게 보신다면 다른 모든 이방민족보다 번영하게 하실 것이다. 정복자의 자리에 서게 하실 것이고, 찬란한 영광의 자리에 서게 하실 것이다. 선민의 민족과 나라에 속한 각자에게도 이 세상에서 인생의 형통과 번영을 약속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민을 의롭게 여기신 결과는 세상에서 모든 이방민족들이 부러워하며 두려워하며 무릎 꿇는 번영과 성공과 영광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유대종교 사상의 핵심이며,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에 대한 비판은 이미 구약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났습니다. 이사야서 29장 13절에서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을 어둠 속에 가두기를 멈추지 않았고 사울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청년 사울은 베냐민 지파로써 왕가의 후예였고 당시 최고의 학부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7장 58절을 보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하였는데 옷을 맡았다는 것은 순교현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공적인 책임을 자처했음을 의미합니다. 7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이루어질 때는 아직 사형언도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이 “…보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했을 때 군중들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산헤드린공회의 사형이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성 밖으로 끌어다 돌로 쳐 죽이고자 합니다. 그때 사울이 이 일을 주도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람들에게 “이 스데반이 신성모독을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보았다. 이제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법적인 절차가 필요 없다. 지금 당장 돌로 쳐 죽여야만 한다. 모든 법적인 책임은 내가 지겠다.”라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돌로 쳐서 죽이는 형벌은 증인들이 제일 먼저 돌을 들어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들은 증인들은 사울 앞에서 옷을 벗어 놓고 돌을 들어 스데반 집사님을 쳐 죽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사울을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울의 마음에 있던 하차감 신앙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어둠 속에 묻혀 계셔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감히 그 하나님을 본다고 말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관심의 대상은 민족의 미래나 개인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그림자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사울을 더욱 화나게 했던 것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해서 하나님 우편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본다고 말하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는데, 자신들이 미워했던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과 동등해졌다는 말을 듣자 폭발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믿음 속에서 움직이고 있던 사상은 승차감 신앙이었습니다. 찬란한 영광의 하나님과 그림자 세상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사울이 뼛속까지 받아들이고 있었던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의 사상은 하차감 신앙이었습니다. 찬란한 세상과 빛바랜 하나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은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이들이 바랐던 것은 단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로 이 세상 삶이 찬란하고 번영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제사를 열심히 드렸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거룩한 하나님은 어둠 속에 묻혀 계셔야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하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사울이 화가 났던 것은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찬란한 미래를 모독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사상 속에서는 세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세상은 마음에서 주인공이 될 공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하차감 신앙에서 볼 때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승차감 신앙은 세상에 대한 모독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중시하던 찬란한 미래와 번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그림자로 여기고 어둠 속에 파묻히는 사상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사울과 군중들에게 있어서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을 모독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번영을 모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철저하게 분노에 사로잡혀서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게 됩니다.
앞서 살펴본 설교에서 스데반 집사님은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말을 처음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어야 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은 언제나 어둠 속에 가려져 계셔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삼아 하나님을 그리워하거나 찾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닌 유대교와 바리새인들의 사상의 공통적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유대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종교의 신을 그리워하는 종교인은 없습니다. 모든 종교인들이 하차감 신앙을 가진 채 살아갑니다. 그렇게 신을 믿었더니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우리 또한 이로부터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벤츠 같은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디 그러한 오해는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단지 과소비나 허영의 문제로 치부해버리면 신앙의 진리는 밝혀질 수 없습니다. 승차감 신앙이나 하차감 신앙은 비유적 표현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신앙상태가 올바르지 못하여 하차감 신앙으로 벤츠를 타고 다닌다면 그것은 고쳐야만 합니다.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앙적으로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진의는 그저 개인의 허영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승차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든지 그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은 그림자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실체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마음속에서 영화롭고 찬란한 빛의 주인공이 되실 때만 세상이라는 그림자 또한 온전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승차감 신앙입니다.
7장 55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하나님을 볼 때에 사울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못 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하차감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마음에서 1등의 관심거리는 세상이었습니다. 세상 문제와 일들이 번영과 성공과 찬란함 속에서 진행되어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둠속에서 능력만 보내주시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보는 하차감 신앙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승차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는 승차감 신앙을 근본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해할 수 없다면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우리는 승차감 신앙의 주인공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삶에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과 표적이 나타날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과 찬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서도 찬란하게 여겨져서는 안 되고 그림자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과 나를 격리시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때 세상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빛을 발하시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모든 시선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부러워할 만한 일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차감 신앙입니다. 하차감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보다 승차감 신앙을 더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행여 이러한 말씀이 싫게 느껴지신다면 하차감 신앙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한 사람도 그런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승차감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들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차를 예로 들자면 모닝 같은 소형차를 주실 수도 있고 벤츠 같은 고급차를 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차를 타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마음의 자랑거리로 삼느냐는 것입니다. 고급차로 하차감을 느끼고자 한다면 위험한 일입니다. 차는 무엇이 됐든 마음에서 그림자에 묻혀 있으면 됩니다. 차를 자랑거리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고 해도 팔아버리는 것은 해결이 아닙니다. 팔고자 하더라도 먼저 십자가에서 차에 대해 죽고 나서 팔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차가 영광의 대상이 아니라 그림자가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마음은 승차감 신앙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굳이 차를 예로 들어 말씀드리는 이유는 차가 그만큼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차가 불만이라면 그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명품 차라서 좋다면 그 마음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승차감 신앙을 갖기 위한 작은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승차감 신앙은 차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승차감 신앙은 찬란한 하나님과 그림자 세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차감 신앙은 찬란한 세상과 빛바랜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유의 핵심임을 잊지 마시고 승차감 신앙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온전히 승차감 신앙에 매진할 수 있게 하여 주심으로서 하차감 신앙의 잔재들 또한 하루 빨리 제거될 수 있도록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