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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은 내 삶의 주인 나는 예수의 증인>의 줄거리:
삶의 현장에서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면, 언제 어디든 그렇게 하면 언제 어디든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벌어지는 삶은 성령님이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십니다. 그러면 나는 뭐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증인은 예수님 자신과 그리스도 연쇄 사건의 팩트를 증언합니다. 증언은 말로도 하고 존재로도 합니다.
성령은 내 삶의 주인 나는 예수의 증인
(사도행전 1장 8a절~8b절)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은 내 삶의 주인 나는 예수의 증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은 내 삶의 주인 나는 예수의 증인’
본문은 지난 시간에 미처 다루지 못한 사도행전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까지를 전반절이라 한다면, 그 이후의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부분은 하반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하반절에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해주신 성령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던 것처럼 제자들과 같은 상황이 되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잃은 대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위에 세워졌던 인생의 미래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습관과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내게 주어져 있는 이 세상 권한을 가지고 앞으로도 살아가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성령의 임재는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자들은 세상을 잃고서야 십자가를 볼 수 있었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알고 있기에 세상을 등짐으로써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등진다는 것은 곧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있다.”라는 의식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가정도 아니며, 회사도 아니며, 자동차의 운전대도 아니며, 장사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을 등지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성령은 임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삶의 현장은 내 의식과 몸이 성령과 조합을 이룬 상태에서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의 임재를 통해 이루어지는 삶은 증인이 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삶은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증인은 증언하는 자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목격한 대로 증언함으로써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나의 인격 자체가 증거물이 됩니다. 즉 입으로만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아닌 나의 존재 자체로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격 자체가 세상을 등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이 임하여 나타나는 변화를 증거물로 제시함으로써 증인이 됩니다. 이렇게 나 스스로가 증거물이 되는 내 존재가 증언할 수 없다면 힘들 뿐만 아니라 해도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증인으로서 증언을 해야 되는데 말로 하는 증언이 있고 존재로 하는 증언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 아니라 존재로 증언하는 증인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의 인격자체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이 주어졌다는 증거물로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증거물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입을 열어 하는 증언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8절을 읽어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 증인들이 활동할 장소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곧 구약성경의 배경과 문화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유대 땅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전혀 문외한인 사람들과 민족들에게까지 예수님을 알리는 증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지역인 사마리아로부터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발칸반도를 지나 로마와 유럽과 극동아시아와 동북아시아까지의 모든 사람들에게 증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증인의 증언은 사실(fact)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지금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8절에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예수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일련의 과정을 사실로써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언되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상이나 교훈이 아닙니다. 증인으로서 본 사실을 전하면 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바로 당신 때문에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로서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장사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이나 사상을 분석하여 가르침을 이끌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이 해야 될 전부입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을 접하며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마는 저는 나름대로 불경을 깊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 유교경전을 익혔으며 노자의 도덕경도 몇 번이고 정독하였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교회사를 통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던 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였으며 특히 교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신학과 과학의 연관성을 대학에서 가르쳤던 적도 있고, 독일의 고전철학에 대해서도 깊이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접해왔고 앞으로도 무한히 접하게 될 수많은 사상과 지식들이 구원과 관련하여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이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것이 바로 구원과 연결되는 길임을 본문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새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도대체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해온 것일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뉴턴 같은 대학자조차도 스스로의 지식을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퍼내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뉴턴이 대합조개껍데기로 바닷물을 퍼내려고 했다면 저는 바지락조개껍데기 같은 것으로 바닷물을 퍼내려고 했던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시는데 이 증인이 무엇일까요? 이 증인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있는 의미가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이 땅에 있었고, 그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분이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는 사실이 전부입니다. 이 사실을 전하고 들을 때에 구원의 사건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오늘 제가 하는 말이 난해하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경공부다 뭐다 하며 많은 공부를 강요해왔고, 어디를 가든 성경 읽기는 절대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라는 말씀을 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 대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하셨던 말씀들을 가르치라 하신 것도 아닙니다. 물론 마태복음 28장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지만 바로 앞의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는 말씀이 전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이 지속될 때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구원의 사건은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증언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삶에서 해야 될 일은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이 사실을 반복하여 기억함으로써 복음이 약속하는 모든 은혜 또한 내것이 됩니다. 결코 사상이나 가르침이나 교훈이나 기독교 종교의 우월성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손꼽아 기억할 수 있는 기초 중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에 대한 사실들을 증언하고 그것을 듣는 것만이 구원과 연결되는 길입니다.
증인은 증언하는 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증인은 증언을 통해서 과거의 사건을 지금 재현하는 사람입니다. 법정에서도 증인이 하는 일은 과거의 재현입니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증인은 법정에서 증언을 통하여 사건현장을 재현합니다. 증인에게서 재현된 사건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면 증언은 효력을 갖고 증거로 채택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실과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사건들을 증언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셨던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마주 대하고 있었습니다.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곧 승천 또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직전까지 예수님의 사건은 예수님의 사건이었고 제자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청하셨던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바로 이 상태를 만들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지금 너희들이 오순절 직전에 나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도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과 마주하는 상황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사건이 될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 연쇄사건의 증언을 통하여 재현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만 한다면 증언을 들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자들 또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연쇄사건과 진정한 연결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언을 통하여 듣는 사람들을 성령에 의해서 연결되기 직전의 제자들과 같은 상황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는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독일과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한국에서도 무려 7년이나 신학공부를 하였습니다만 그때 사람이 압사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무슨 신학자와 사상가가 그렇게 많고 교회사 속에 누적된 신학이론이 그렇게 많은지 도무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나 칼빈이나 츠빙글리가 한 일에 대해 무슨 논문과 논쟁이 그렇게 필요한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논쟁을 벌이는 것도 아닙니다.
개신교든 천주교든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이 증언해야 할 것은 간단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셨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복지로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전부입니다.
다만 이 사실을 순순히 내 것으로 만들어서 살기에는 우리의 죄적 체질은 너무나 질깁니다. 그렇기에 구약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잡아 상번제를 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선언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근본적으로 강조하셨던 것은 신학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신학의 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고 신학에 매진한 시간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몇 가지 안 되는 단순한 사실들에 대해 증언하는 일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전부라는 사실은 이상할 정도로 신기하게 들립니다.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함을 통해 증언 속의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다른 사건들에 대한 증언과 다른 점입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에 대한 증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을 통해서 세종대왕의 인격적 실체를 만날 수 없습니다. 단지 추론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석가모니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고 가르칠지라도 석가모니의 인격적 핵심인 마음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에 대한 만남은 증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증언하고 있을 뿐인데 재현되는 사실 안으로 나의 마음이 들어가면서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단 한 번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지만 이 과거의 사건이 다른 모든 과거의 사건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건이 재현될 때에 역사 속의 어떤 인물들과도 다르게 증언 속에 계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증인이 증언할 때에 역사적 사건이 영적인 사건으로 믿음의 사건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돌아가신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형님들에 비해서 많습니다. 그만큼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만주에서 피난 나오시기 직전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형님들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형님들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다릅니다. 증언될 때에 역사적인 사건은 영적이고 믿음의 사건으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격의 핵심인 마음과 나의 마음이 만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록이나 가르침 속에 담긴 정신을 보고 배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석가모니의 정신을 배우려 할 수는 있습니다. 위인전을 읽으면서도 그 정신을 느껴보고자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도 위인들도 실체로서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만은 실체로서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사건에 대한 증언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갖는 차별점입니다.
우리는 증언하는 증인이자 증언의 증거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계셨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당신을 구원하러 오셨으며,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셨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증언을 들을 때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사건 속의 예수님과 내가 만나서 연합을 이루게 해주십니다. 이를 통해 나의 인격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증거물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의 죽음의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부활하신 효과가 나타나게 되고, 승천하신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나의 인격 자체가 증거물이 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증언함을 통해서 제자들과 같이 오순절 전에 예수님을 마주하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라면 사건 속의 예수님과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만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으로서 할 일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자들이 오순절 전의 예수님과 예수님의 연쇄사건을 마주 대하는 상태가 되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이 증거물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연합을 경험하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나를 보며 “이 사람은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 같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추구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증인됨의 증거물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사건이 구원의 사건임을 나의 존재를 통하여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스스로 노력하여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존재가 증거물이 되는 것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때가 되면 증언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정에서 증인으로 할 일은 가정이라는 현장을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동시에 나는 증거물이 됩니다. 그러면 구원의 사건을 드러내는 증거물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통해 가정에서 때를 따라 예수님을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증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가정에서의 삶의 현장은 성령님께서 내 의식과 몸을 지배하시면서 살아가십니다.
내가 ‘나’라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증거물이 되고 증인의 삶을 사는 쪽으로 치중하는 동안에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성령님께서 나의 삶의 주체가 되셔서 살아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의 삶입니다. 증인의 삶을 더 강조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삶을 중지시키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직장과 가정과 사업장의 삶을 허락하신다면 그 현장에서 성령께서 주체가 되셔서 증거물이자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게 될 것입니다.
저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일, 아내의 남편으로 사는 일, 자녀의 부모로 사는 이러한 일들은 성령께서 주인이 되셔서 사시는 삶입니다. ‘나’라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주력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보는 것뿐입니다.
제자들은 인생의 미래를 잃어버리고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알기에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성령께서 증인이 되게 하시고 나의 인격이 증거물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이끌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증인으로서 할 일은 몇 가지 안 되는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증언함으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오셔서 사실 속의 예수님과 나를 연합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자 전부입니다. 모든 게 완결됩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도 “내가 저 사람을 믿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기에 앞서 먼저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심의 증거는 세상에 대한 소원이 없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시켜서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과 관련된 사실 중에 당신이 아직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당신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말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받을 사람이라면 성령님이 오셔서 그 사람의 마음에서도 예수님과의 연결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때가 반드시 오늘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하시지 않더라도 이 일을 계기로 삼아 내일 구원을 이루실 수도 있으며 일 년 뒤에 구원을 이루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전도는 내가 어떤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인격이 그 증언을 먼저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예수님과 연합한 증거를 보일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했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 소원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있음과 좋음과 소원이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는 동안에 성령 받아서 살면 내 삶은 성령이 주인이 되시고 나는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자들은 세상에서 인생을 잃고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을 등지고 십자가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성령이 오심으로 내 삶의 주인이 성령이 되시고 나는 성령에 의해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