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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진짜 회심은 눈이 멀어야 하는 이유>의 줄거리:
사울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교인을 잡아 감옥에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가까이 왔을 때가 정오였습니다. 중동 땅 정오의 햇빛을 삼켜버리는 큰 빛이 그를 둘러 비치게 됩니다. 그 빛 속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면 그 빛은 하늘빛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늘빛 세상이 사울의 햇빛 세상을 감쪽같이 삼켜버렸습니다.
진짜 회심은 눈이 멀어야 하는 이유
(사도행전 9장 1절~9절)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진짜 회심은 눈이 멀어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진짜 회심은 눈이 멀어야 하는 이유’
회심은 회개를 달리 일컫는 말입니다. 돌이킬 회(回)에 마음 심(心)을 써서 마음을 돌이켜 방향을 바꾸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의 전환, 개종, 전향을 뜻하는 컨버션(conversion)이라는 단어에도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 있습니다. 방향을 바꾼다는 것이 회심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방향을 바꾸어 지속적으로 나가야 하는 회심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로서의 회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사 다니는 사람들에게 승진이 가장 기쁜 일이라면,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무척 기쁜 일입니다. 회개하게 되는 동기는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슬퍼하며 과거의 죄를 뉘우치는 아픔이 동반됩니다. 그러나 방향을 돌이켜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는 회심이라는 말을 통하여 회개의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돌이키고 방향을 바꾸는 회심으로써의 회개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줍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의 인격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방향을 띠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방향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마음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움직임이 바로 인격입니다. 그리고 마음 채움을 위하여 방향을 정하는 것이 인격의 존재양상이고 인격의 실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에서 나타나는 회심은 마음 채움을 위하여 기존에 달려가던 방향을 중단하고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을 채워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이때 방향을 바꾸는 회심이란 마음을 채워 주리라 믿어지는 믿음의 대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회심은 마음으로 보는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축구선수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골대입니다. 골대로 방향을 정하고 열한 명이 힘을 합쳐 돌진합니다. 농구 골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골대로 방향을 정하고 공을 던져 넣어야만 합니다. 마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보는 대상을 향하여 사람의 인격은 방향을 띠게 됩니다.
마음이 본다는 것은 곧 채워짐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을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보았던 자들만 불 뱀의 독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만 이 바라봄은 육체의 눈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마음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마음을 채워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에 대한 바라봄입니다.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것이 곧 믿는 것이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회심이란 마음이 보고 있는 목표물을 바꿈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만약에 마음이 보는 목표물이 없이 방향을 바꾸는 것은 회심이 아니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모습을 부유(浮游)한다고 합니다. 공기 중에 미세먼지가 떠도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도는 부유는 결코 회심일 수 없습니다.
기존에 마음이 보고 있던 목표물에서 다른 목표물을 봄으로써 방향이 바뀌는 회심은 영적인 의미에서 출세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며, 형통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고, 대박이 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심에는 상식적이고도 절대적인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회심이라는 말의 뜻처럼 방향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방향에 있던 목표물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기존에 취하고 있던 방향의 목표물을 곁눈질로라도 보고자 한다면 마음은 반드시 보는 쪽으로 치우치게 됩니다. 회심은 결코 술주정뱅이처럼 좌우로 치우치는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복음이 요구하는 회심의 전형적인 모습 또한 이러한 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사울을 통해 나타나는 회심의 장면을 날마다 생활 속에서 반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사울이 예수를 믿는 사람을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와서 옥에 가두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체포영장을 받아 가던 중 다메섹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내려와 사울을 둘러싸게 됩니다. 사도행전 22장과 26장을 보면 이제는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이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데 그때를 정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도에 가까운 중동 땅에서 정오는 해가 거의 수직으로 내리쬐는 시간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위 23.5도에 있기 때문에 정오가 되어도 완전히 해가 수직으로 내리쬐는 일은 없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즉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과 장소는 지구상에서 가장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쬐던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마주하게 된 것은 그러한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었습니다. 22장 6절에서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라고 하였고 26장 13절에서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적도에 위치한 중동지방의 정오에 내리쬐던 햇빛을 촛불로 비유하자면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 큰 빛은 초대형 LED전구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5와트의 LED전구는 125와트의 백열전구만큼이나 밝습니다. 그 LED전구가 열개 모여 있다면 촛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빛을 발할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늘빛이 햇빛을 삼켜버리는 상황을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 하늘빛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햇빛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빛입니다. 이와 대조되는 하늘빛은 하늘에 있는 존재를 보이게 하는 빛입니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을 남녀를 막론하고 잡아다 옥에 가두려고 다메섹 가까이 가던 중에 햇빛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하늘빛을 마주하게 됩니다. 촛불은 비록 약하지만 어두운 곳에서 켜면 방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미 25와트 LED전구가 10개나 켜진 환한 방에서라면 촛불은 더는 무엇인가를 밝힐 수 없습니다. 그저 촛불이 켜져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정도이지 촛불에서 나오는 빛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지금 사울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빛이 햇빛을 완전히 삼켜버린 상태를 더욱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 8절 이하에 이어지게 됩니다. 8절을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라고 하였습니다. 사울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햇빛이 보이게 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늘빛에 둘러싸였다는 것은 이제 사울이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은 하늘빛이 보게 하는 하늘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회심장면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눈이 멀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회심은 곧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바라보는 목표물이 없다면 방향이 바뀌어질지라도 그것은 회심이 아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목표물을 보는 이유는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돈에 대한 믿음, 배우자에 대한 믿음,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성질이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보고 있다는 것은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채워짐을 믿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믿음이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마음에서 작용하는 원리는 똑같습니다. 회심은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 믿어지는 대상을 바꾸어서 믿는 것이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의 의미를 염두에 둘 때 햇빛이 하늘빛에 삼켜져 버렸다는 것은 바라봄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사울에게는 햇빛 아래에서 보이는 어떤 것도 마음의 목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더는 세상에서 마음 채움을 위한 믿음의 대상으로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그저 육체의 눈이 멀게 된 것이 아닙니다. 햇빛으로 보는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늘빛으로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서 일어난 회심의 의미입니다.
사울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주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교인들을 향해 살기와 위협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결코 비열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교인들을 미워했던 것도 아닙니다. 사울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와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절대 죄인인 인간들이 결코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화롭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뿐이지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둠 속에 모셔두고자 하였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보고자 하지 않으니 보는 대상은 언제나 햇빛 아래에 존재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의 특성이었습니다.
그런데 7장 55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하였습니다. 보아서는 안 되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56절을 보면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일개 목수로 여기던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영광의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증언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이 죽어가는 것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에서는 햇빛이 하늘빛에 삼켜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마음의 대상은 하늘빛 아래서 보이는 영광의 하나님과 인자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서 오직 햇빛 아래의 세상을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이러한 스데반 집사님이 죽어 마땅하고 여겼던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늘에 올라가 있고 그 나사렛 예수 덕분에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을 본다고 떠들고 다니는 교인들 또한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빛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예수님이 나타나셨고 사울의 마음속에 존재하던 햇빛이 비추던 세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사울이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던 것은 바로 마음에서 회심이 일어났음을 상징합니다.
이제 사울은 햇빛 아래에서 보이는 어떤 것들도 마음의 목표물로 삼아서 달려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육체의 눈으로는 볼 수 있을지언정 마음의 눈은 세상에 대해 장님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마음은 하늘빛이 보여주는 대상만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서도 반복되어야만 하는 회심이고 진정한 의미의 회개입니다.
죄는 곧 잘못된 방향입니다. 인격은 방향성을 띤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죄가 인격을 썩게 하는 이유 또한 죄가 잘못된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음 받았기에 마음을 채워야만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은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향하는 방향이 생기게 됩니다. 회심은 햇빛 아래에서 보이는 세상에 대해 눈이 멀고 하늘빛 아래에서 보이는 것들을 향한 전환입니다.
회심 전에는 배우자가 믿음의 대상일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배우자를 향하게 된 이유는 배우자로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고 돈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본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았기에 세상의 대상들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회심은 하늘빛이 햇빛을 삼켜버림으로써 더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는 배우자를 보지만 마음에서는 배우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의 채움을 위하여 배우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배우자가 훌륭해도 마음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보이지 않아야 회심이고, 배우자가 부족해도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불평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보이지 않아야 회심입니다. 돈이 있어도 마음에서는 돈이 보이지 않아야 회심이고, 돈이 없어도 마음에서는 돈이 보이지 않아야 회심입니다. 마음에서 여전히 세상이 보이고 있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선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고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채워주실 수 있다고 믿을 때 마음의 방향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것을 보고 있다면 그것들로 마음이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고작 컴퓨터가 고장 났을 뿐인데 마음이 컴퓨터를 향할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가 온전해지면 만족이 주어질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작다고 무시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작은 방향성과 작은 바람들이 합쳐져서 마음을 세상에 젖게 하고 세상을 향하게 됩니다.
회심은 이렇게 햇빛 아래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늘빛 아래에 보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방향성을 띠는 것입니다. 회심과 믿음은 분리된 개념이 아닙니다. 회심의 단계가 끝나고 믿음의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회심과 더불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세울 때는 기초부터 쌓지만 건물을 다 짓고 나면 기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건물이 존재하는 한 기초는 언제나 함께하고 있습니다. 회심과 믿음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사울은 큰 하늘빛에 의해서 햇빛이 삼켜지고 육체의 눈이 머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햇빛 아래에서 보는 모든 것이 중단되고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 죄악에서의 돌이킴이 지속돼야 할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는 햇빛 아래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마음의 눈이 멀기 위함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하늘빛을 마주하고 하늘에 계신 인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눈멀기는 시작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회심하여 사도 바울이 된 이후에 이를 더욱 구체화하며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으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회심으로부터 시작된 십자가 생활화의 구체적 개념들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기점으로 진정한 십자가 생활화의 달인이 탄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사도들과 집사들과 교인들이 실천적 의미에서의 십자가 생활화의 달인이었다면, 사울은 바울로 회심하면서 개념적 의미에서까지 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햇빛 아래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서 눈멀기입니다. 마음에서 세상이 안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이고, 이 세상 것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면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일도 잘 해결해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햇빛 아래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안 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오늘 본문에서 소개된 전형적인 회심의 모습을 지속하면서 하늘빛이 비춰주는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수님만을 목표로 삼고 방향성을 정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회심은 항상 밑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이 회심 위에 우리의 신앙의 역점을 쌓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햇빛 아래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려는 죄의 경향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회심을 기초로 삼을 때에 신앙의 삶은 진행될 수 있고 마음은 하늘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 회심이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있게끔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경험한 회심의 사건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빛에 햇빛이 삼켜짐으로써 마음에서 햇빛이 비추던 세상에 대해 눈이 멀고 이제 하늘빛이 비추는 하나님만을 목표로 삼고 그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나를 몰아가는 일이 십자가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이 세상을 보게 하는 햇빛이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게끔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빛만이 활성화되어서 하늘빛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 매진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언제 어디서나 기억하게 하여 주심으로 삶의 현장에서 햇빛 아래에 보이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나의 마음의 눈이 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음의 방향이 하늘을 향하게 하시고 하늘빛이 비추는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사울이 바울이 된 전형적 회심의 모습이 우리의 삶에서도 반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