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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행과 구제를 회개해야 할 때도 있다>의 줄거리:
이방 지역 욥바에서 심히 많은 선행과 구제를 하며 살던 여제자 도르가가 죽자 사도 베드로가 다시 살려냅니다. 언뜻 보기에는 심히 많은 선행과 구제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별세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에게 죽었다가 다시 그 육체로 살아서 세상 안으로 들어온 것이 보상일까요?
선행과 구제를 회개해야 할 때도 있다
(사도행전 9장 32절~43절)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40.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1.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2.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선행과 구제를 회개해야 할 때도 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선행과 구제를 회개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32~35절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룻다에서 애니아라는 8년 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룻다에 사는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사건에 이어서 마찬가지로 사도 베드로에 의해 도르가라는 여인이 살아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다의 사건도 당연히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만 욥바에서 일어날 일을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바에서 일어난 사건에 중점을 두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 선교 100주년 기념식 때에 교계의 어르신들이 회개기도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께서 선행과 구제에 연관된 내용으로 회개기도를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선행과 구제를 하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목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선행과 구제를 회개해야 할 때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는 도르가가 죽었다가 사도 베드로에 의해 살아나게 됩니다. 다만 이 사건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보다는 살아나게 된 이유가 더 중요합니다. 사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을 염두에 두자면 이 사건 또한 도르가에게 회심의 기회를 주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우리에게도 같은 메시지를 주시고자 의도적으로 도르가를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제목과 연관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일이란 “예수 믿기와 하나님 소원하기”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해야 하고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선행과 구제는 택하신 그릇이 될 때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선행과 구제를 율법처럼 지켜야 할 의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심으로 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보다 우선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예루살렘 교회에 유무상통이 있었습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이 쓰도록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마음이 이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 있었던 결과였습니다. 결코 재산을 나누라는 권고나 율법이나 강령이나 원칙을 따른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서 먼저 보였던 것은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눈뜨게 될 때 나타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중에 파생되는 결과물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24절에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육체 사이에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훨씬 더 좋은 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에도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는 같은 의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소원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육체를 떠나서 승천하여 계신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는 일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가족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은 소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몸을 떠나서 하늘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사명을 다하고 죽은 뒤에 다시 살리셔서 “이제 어떤 사명도 맡기지 않을 테니 이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하며 살아라.”라고 하셨다면 사도 바울은 결코 기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말 때에 이루어질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로 살아야 하는 이 세상의 삶을 되풀이하는 부활이라면 상이 아니라 벌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라는 속담과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육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연합하여 마음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만 눈뜨고 하나님에 대해서 소원을 가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결코 상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의 기본적인 생각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욥바의 사건이 단순히 베드로가 일으킨 기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 사도 베드로는 순회전도 중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가해지고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이방지역에 머무는 교인들을 돌아보며 권고하고 또한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하고자 각 지역을 탐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인들의 인식 또한 바뀌게 됩니다. 사도들이라고 해서 단박에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선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이방인을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교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은 다음에 살펴볼 10장에서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강림하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사울의 회심 사건이었습니다. 사울은 회심하여 이방인들의 사도인 바울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이 겪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을 똑같이 경험하기를 바랐습니다. 사울의 경험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눈뜨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이 눈먼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의 회심 사건은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는 소경이 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원하기 위해서 인자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경험들을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인 선교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큰 장애가 하나 있었습니다. 문화와 사상과 종교는 다를지라도 이방세계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덕적 양심에 의한 선행과 구제를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돕는 일은 모든 사회에서 좋은 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복음 전파에 큰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이나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권선징악은 말 그대로 선함을 권하고 악함을 징계한다는 뜻이고, 적선지가 필유여경은 선행을 쌓으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선행에는 어떠한 보상이 주어진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어떤 문화권이나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통용되는 보편적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행과 구제에 대한 생각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을 선행과 구제의 보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한 사람은 별도의 믿음을 갖지 않더라도 구원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느 사회에서든지 팽배하게 존재해왔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 점을 꼬집어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문의 사건은 이방인 선교가 본격화되기 직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도들의 인식이 이방인을 향해 넓어지는 상황이었고,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된 사건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방해가 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선행과 보상의 원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문제시하고자 의도적으로 선행과 구제로 유명하던 여제자인 도르가가 죽고 베드로를 통해 살려내는 사건을 계획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히브리식으로는 다비다라고 하고 헬라식으로는 도르가라고 하는 여제자가 등장합니다. 36절을 보면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과부들이 도르가의 죽음을 슬퍼하며 베드로에게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지은 속옷과 겉옷을 보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속옷과 겉옷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옷이 아닙니다. 속옷은 통으로 짠 것이고 겉옷은 두루마기처럼 걸치는 것입니다. 도르가가 만들어 준 옷을 보이면서 슬픔과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기도하여 도르가를 살려냅니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여제자”라는 표현은 지금까지 누가의 기록에서 사용된 적이 없는 표현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없었고 사도행전에도 처음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누가가 도르가를 굳이 여제자로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의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도르가가 여제자라면 다시 살아난 것은 도르가에게 상이 아닌 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도르가에게 임한 상으로 받아들입니다. 도르가가 선행과 구제를 많이 베풀었고 그에 대한 상급과 보상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해 세상을 빠져나가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원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생각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말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도르가가 다시 살아난 것이 마냥 상급과 보상으로 여겨진다면 바울과 같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여제자라고 불렸다는 것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해 별세의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좋은 일이고 선행과 구제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을 바로 하자면 오히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상으로 죽었다.”라고 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상황만을 놓고 보자면 마치 공로사상이 언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행과 구제가 많았기에 죽었는데도 다시 살리셨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차마 그렇게 말은 못할지라도 그런 느낌을 가지고 본문을 접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공로사상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좋은 분이시고 유일한 보물이시라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야말로 상급이고 보상일 것입니다. 오히려 육체를 입고 이 세상 안에 돌아와 삶을 계속하는 것은 벌로 여겨져야 정상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당시에는 아직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성취하시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모른 채 죽은 것을 마음 아파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살리신 것이고 살아난 나사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생활화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구제의 문제 또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는 도르가를 여제자라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로부터 도르가가 결코 위선자의 마음으로 선행과 구제를 한 것은 아니라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러나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를 욥바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도 맞습니다.
도르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애로 구제와 선행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구원의 기준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도르가가 살아난 것이 도르가가 행한 선행과 구제나 교인들의 간청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도르가를 죽게 하셨지만 교인들이 슬퍼하며 욥바에서 18km나 떨어진 룻다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 그 선행과 구제를 알리고 간청하니 원래의 계획을 취소하고 살리셨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 밖의 일들이 일어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도르가를 죽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사도 베드로를 통해 살리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도르가의 사건을 통하여 이방선교가 본격화되기 직전에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문제를 잡초 뽑듯이 뽑아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방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선행과 구제가 보상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 생각을 뿌리 뽑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르가는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게 된 것과 같은 기회를 부여받기 위하여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직 온전히 회심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도르가가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선행과 구제에 있어서 착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하는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르가에게는 회심의 기회를 주시고 우리에게는 혼돈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강조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처럼 회심했다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기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심지어 주석들을 보아도 그러한 점은 전혀 염두에 두지 못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린 것은 처음이었다. 다시 살아난 도르가뿐만 아니라 베드로 사도의 마음도 기뻤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 의해 쓰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눈뜨고 하나님을 소원하고 하나님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이러한 표면상의 내용만을 다루는 주석을 썼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도르가를 살려낸 것으로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도르가를 다시 살리려고 하셨는지를 의아해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베드로의 관점에서는 죽어서 하늘로 간 도르가가 부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기뻐할 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말씀은 정확히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상태를 기준으로 삼아 말씀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쁨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도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모으시고는 곧장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게 곧장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따른다는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것을 기뻐하였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종말 때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다시 죽을 육체를 입고 살아나는 것을 기뻐할 수는 없으며, 이 몸으로 오래 사는 것도 기뻐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직 사도 베드로와 같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을지라도 말씀은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풀이되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우리 수준에 맞추어 해석한다면 말씀에 담긴 본래의 의도도 비뚤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을 마냥 좋게 풀이하는 주석에도 문제가 있음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르가에게 이렇게 하신 이유를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맥락과 연관하여 생각해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10장에서는 고넬료 집안에 성령이 강림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공식적으로 이방인 모두가 선민이 될 자격과 권한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이 확정됩니다. 당시 선민이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혈통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평생 그러한 고정관념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었기에 이방인을 선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교가 본격화되기에 앞서 이방세계에 보편적으로 퍼져있던 선행과 구제와 그에 대한 보상의 기준을 뽑아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결코 선행과 구제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감으로써 세상에 대해서는 눈감고 하나님께 눈떠서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소원하게 된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에 앞서서 예수님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행과 구제를 담당할 일곱 집사님을 뽑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집사님 중에서 행적이 기록된 스데반 집사님과 빌립 집사님의 경우에는 선행과 구제의 모습은 단 한 마디도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전했을 뿐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선행과 구제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께 눈뜨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보물로 소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선행과 구제가 주된 사명과 업무가 되는 일은 인격적 구조자체에서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연합한 자들의 주된 업무는 하나님께 눈뜨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부터 성령의 역사로 인해 선행과 구제가 사명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에 열중하여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다고 평가될 정도로 주된 업무가 되어버린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뒤에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께 눈뜨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자마자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수가성 여인도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을 때 예수님을 통하여 마음에 벅찬 생수의 강을 감당하지 못해서 자신을 기피하던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열두 해 혈루병을 앓다가 고침 받은 여인도 집 앞에 예수님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고 집 앞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 예수님을 전하다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께 눈떠서 유일한 보물이신 하나님을 소원하고 사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중에 기회가 있을 때 선행과 구제도 이루어질 수 있을 뿐입니다. 선행과 구제를 목적으로 삼아 열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택하신 그릇으로 쓰임을 받는 과정에서 선행과 구제는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르가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여제자로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는 것은 결코 칭찬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선행과 구제에 관련하여 그 믿음에 문제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도르가가 죽었을 때에 과부들은 도르가의 믿음을 칭찬하지 않고 그녀의 선행과 구제를 칭찬했을 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눈뜨고 하나님이 최고로 좋은 보물이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소망은 유일한 보물이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 채우기를 소원하는 상태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소망하는 나의 마음에 하나님이 허락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은 셋 중 하나를 고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랑이 믿음과 소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믿음이 없으면 시작될 수 없고, 소망이 없다면 진행될 수 없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어느 것 하나를 제외할 수 없이 하나로 묶여있는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연합하시고자 하신 사랑의 상태가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믿음과 소망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게 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눈뜸과 소원과 연합이 없으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선행과 구제를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선행과 구제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그에 해당하는 보상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상은 결코 구원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도르가는 회심을 기회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방선교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도르가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방인들의 선행과 구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이고 계획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선행과 구제라는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께 눈뜨는 것이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기회가 있을 때 선행과 구제도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내가 해야 되는 일은 오직 예수님과 연합하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좋음을 믿고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연합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약속하신 마지막 성취단계입니다.
도르가가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이루어야 할 일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의 회심이었습니다.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행하는 것을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착각을 이방인 선교가 본격화되기 직전에 도르가의 사건을 통하여 깨뜨려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도르가를 살릴 때에 “주님, 제가 도르가의 형편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어찌하여 도르가를 다시 살리라 하십니까?”라는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이방인 선교의 뜻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도르가에게 선행과 구제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주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인으로서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것이고,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을 소망 속에 확신하는 것임을 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사랑의 단계를 보증해주시는 사건입니다. 이 보증 위에서 소망의 형태로 하나님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럴 때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으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도르가가 다시 살리심을 받고 죽게 된 후에 사람들은 이제는 옷이 아니라 믿음의 도르가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내가 도르가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혼돈을 일으키기 쉬운 선행과 구제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조차도 하나님보다 앞서면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만 눈뜨고 하나님만을 소원하게 하셔서, 택하신 그릇으로써 선행과 구제를 베푸는 일도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