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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상달되는 기도, 그럴 필요 없는 기도>의 줄거리:
쉽게 말해볼까요.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께 상달 되었습니다. 고넬료에게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가르쳐 준 유대 종교인들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께 상달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고넬료에게 예수님 이름을 전한 베드로 사도의 기도와 구제는 어떨까요? 상달 될 필요가 없는 기도와 구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달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상달되는 기도, 그럴 필요 없는 기도
(사도행전 10장 1절~8절)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상달되는 기도, 그럴 필요 없는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상달되는 기도, 그럴 필요 없는 기도’
기도에는 상달되는 기도가 있고 상달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달될 필요가 없는 기도도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욥바에 머물고 있습니다. 욥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지중해의 해안도시입니다. 욥바로부터 다시 50km 정도 더 북쪽으로는 가이사랴가 있는데, 이 가이사랴에는 사마리아와 유대 땅 전체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고 또한 로마군도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군은 약 600명 정도를 대대로 삼고 다시 100명씩을 중대로 나누어 백부장을 세워 관리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는 바로 이러한 백부장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1~8절은 고넬료에 대한 앞부분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내용이 있다면 9장으로부터 이어져온 맥락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선 9장에서 욥바에서 살고 있던 도르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에서 지난 설교를 잠시 돌이켜 봅니다. 히브리식으로는 다비다라고 하였던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던 여제자였습니다. 도르가가 병들어 죽자 과부들이 슬퍼하며 사도들에게 알렸고 소식을 들은 베드로가 욥바로 와서 도르가를 살려냅니다. 도르가의 이야기 속에서 핵심 주제는 바로 “심히 많은 선행과 구제”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선행과 구제의 의미는 무엇이며, 도르가가 예수님을 믿는 여제자로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음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도르가의 다시 살아남은 결코 선행과 구제에 따른 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벌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도르가가 죽었다 살아난 것은 또 한 번의 기회가 제공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른다는 것은 마음이 천국에 계신 예수님에게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어떤 면에서도 상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서 사십 일을 계셨지만 이 세상에서 다른 일을 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일들을 성취하지 않으셨고, 세상에서 좋다는 가치들을 갖고자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좋게 여기셨던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천국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가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연쇄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날마다 반복하는 사람은 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상으로 여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르가가 다시 살아난 것은 결코 심히 많은 선행과 구제에 대한 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도르가의 심히 많은 선행과 구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해 긍휼이 많았던 것입니다. 도르가는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가운데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이식되어 나타날 수 있을 뿐입니다. 권선징악은 모든 이방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면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는 사상은 복음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방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에 바로 이 점을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도르가라는 여인의 삶을 주관하셨고 이 사건을 하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은 본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본문 4절을 보면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앞서 살펴본 도르가의 사건과 비교할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고넬료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였습니다. 고넬료는 이들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소개를 받고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하는데 불특정 다수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가복음 7장에 등장했던 백부장의 모습과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는 사건이 나타나는데,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면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즉, 고넬료의 구제는 유대인들에 대한 의도적 구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도적이라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목적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명기 6장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뜻이라는 것도 바로 의도입니다. 이것이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기에 고넬료의 의도적 구제 또한 그 목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고넬료는 유대인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 안에서 뜻하는 바가 있어서 유대인들을 도왔습니다. 고넬료가 도르가처럼 자비와 긍휼로 구제를 베풀었던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도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고넬료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차이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의 기도와 구제행위가 위선적이기에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함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적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는 어떤 것이었기에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유대인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거리두기였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죄인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영광스러운 분이시지만 마음으로 봐서는 안 되는 어둠속에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대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마음으로 보았던 것은 찬란한 이 세상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루어질 번영과 형통을 꿈꾸며 비전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정성을 보임으로써 다윗 왕국과 같은 번영을 누려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하나님은 어둠속에 계시며 세상일이 잘 풀리도록 능력만 보내주시면 되는 분이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 구제도 열심히 하고 율법도 지키며 하나님께 정성을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생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어떤 구제와 기도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해 신앙을 배운 고넬료 또한 이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천사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상태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2절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경건과 경외가 제시됩니다. 고넬료는 유대인들에게 배운 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마음의 어둠 속에 계실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도 그 배움에 포함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단계로부터 고넬료와 유대인들의 신앙에 차이가 생깁니다. 유대인들이 마음에서 하나님은 어둠 속에 모셔둔 채 찬란하게 보고자 했던 것은 이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어둠 속에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응시하는 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마음으로 찬란한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어둠을 향해서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 대감 집에서 머슴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머슴은 곤장을 맞고 곳간에 3일 동안 갇히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감은 이 머슴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주는 자는 두 배의 벌을 내리겠다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이제 머슴은 곳간에 들어가서 견뎌야만 합니다. 이제 머슴의 가족이나 친한 동료들은 곳간을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떠한 도움도 줄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고넬료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마음의 어둠 속에 가둬둔 채 찬란한 세상을 보며 능력만 받을 수 있다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믿었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어둠속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경건과 경외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곳간에 갇힌 머슴이 빨리 나오기만을 바라는 가족의 마음처럼, 고넬료는 어둠 속에 가려져 계신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에 사무쳐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하나님으로부터 선민들처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받기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유대종교에 입교하는 형식적 절차가 있었지만 고넬료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님이 자신을 받아 주실지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넬료가 유대인들을 통해 이론으로나마 배운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었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넬료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 관계하기를 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구제하였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넬료의 구제는 도르가의 구제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단지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자비와 긍휼이 아니라 어둠속에 가려져 있는 하나님을 보고 싶어서 행한 구제였던 것입니다.
어둠속의 하나님을 그리워함에 대한 반면교사로서의 대표적 예가 있다면 시내산 사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사십 일간 금식하며 하나님을 만나 돌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산 아래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한 채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이 애굽에서 자신들을 이끌어낸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숭배합니다.
자신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과 관계하던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이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어둠에 가려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가리고 있는 어둠의 상태를 응시하며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둠을 바라보기를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고자 합니다. 금송아지가 상징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번영입니다.
사십 일이 지난 후 모세가 내려와서 이 모습을 보았을 때 분노하여 돌판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을 시켜서 하루에 수천 명을 도륙합니다. 하나님 보기를 포기한 마음이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손인 유대인들의 마음에서도 동일한 일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그러한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웠음에도 그들의 태도를 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하나님이 계신 마음의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고, 하나님 마음에 들고자 기도생활을 하였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혹시나 살아계시고 주권자라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선민들에게 나타나신 사건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고넬료는 하나님께 구애하는 자였습니다. 고넬료가 바랬던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넬료의 모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세상에서의 번영을 원하며 하나님은 어둠 속에 계셔야 할 분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선민인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면서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씀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세상의 번영이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을 부르면서도 유대종교를 답습해왔던 것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마술사 시몬 계통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고넬료의 구제와 도르가의 구제의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마음에서 보았던 것은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을 이웃으로 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제를 하는 고넬료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최우선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좀 봐주셨으면 좋겠고 내게도 나타나 주셨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이 상달되었던 것입니다. 상달 되었다는 것은 위로 올라가서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다음 시간에 살펴볼 9~16절을 보면 베드로가 본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환상을 통해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연관성 하에서 고넬료의 마음 상태를 베드로와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상달될 수 있었던 것은 고넬료가 어둠속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구애하는 자였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유대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의 마음에서 찬란한 세상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 계신 하나님께 능력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참 대조적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머슴이 곳간에 갇히기만 해도 그 가족들과 동료들은 머슴을 보고 싶어 할 터인데 유대인들이 마음의 어둠 속에 모셔둔 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도 괜찮으니 찬란하게 바라보는 세상을 위한 능력만을 보내주시면 된다고 여겼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기도나 구제도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었습니다. 설령 원하는 대로 세상 것들을 얻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도가 상달된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버리신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기도가 상달되었다는 것이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은 고넬료가 세상을 등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세상이 아닌 어둠속에 계신 하나님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기도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가 이루어졌기에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써 베드로의 기도와 구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백부장 고넬료와 같이 구제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도 없었거니와 인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비교를 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것까지도 폭넓게 구제에 포함시키면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상달된 것이었고 유대인의 기도와 구제가 상달될 수 없는 것이라면, 베드로의 기도와 구제는 상달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 존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있었습니다. 기도와 구제라는 행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베드로라는 존재가 통째로 하나님께 상달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재차 기도와 구제가 상달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연합하여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간 사람이 모두 이와 같습니다. 마음은 인격 즉 존재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의 몸은 땅에 있었지만 마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올라간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통해서 나오는 말과 행동 또한 따로 하나님께 도달해야 될 필요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미 존재 자체가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 상달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기도는 인자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 또한 베드로와 같은 것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상달되는 것이 아니라 상달될 필요가 없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연합함이 지속됨으로써 마음이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기도와 행동이 따로 상달된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마음을 보내는 사람들에게서 삶과 관련된 기도가 나온다면 그것은 하늘로 상달되어야 할 기도가 아닙니다. 존재가 이미 상달된 상태에서 이 땅을 향하여 하달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마음을 보냈다는 것은 인자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은 땅에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일이 있을 때 기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상달되는 기도가 아니라 하달되는 기도입니다.
이 땅에서 문제를 기도하며 상달되기만을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러한 기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 중에 세상과 연관된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상달되는 기도가 아니라 하달되는 기도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곧 존재가 통째로 하늘에 상달된 상태입니다. 존재가 하늘에 상달되어 있다면 기도나 행동이 따로 상달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넬료 같은 경우는 어둠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구애하는 자였으나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을 가질 수는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선민 유대인들을 구제하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베드로나 예루살렘 교인들의 유무상통 같은 구제는 이미 존재가 하늘에 올라가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의 교제를 이루고 있는 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에 참여하는 유일한 방식은 하나님만을 지속적으로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오는 기도나 행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이식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능력이 담겨져서 구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상달되어야 할 구제가 아니라 하달되는 구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도르가의 구제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도르가의 선행과 구제가 상달되어서 다시 살아나는 상을 받았다고 이해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존재가 통째로 상달됩니다. 상달된 존재에서 나오는 모든 기도나 행동은 따로 상달될 필요가 없는 하달되는 기도와 행동이 됩니다. 존재가 상달된 상태에서 세상과 상관없이 드려지는 기도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안으로 참여하여 교제를 위한 기도가 됩니다. 더욱더 하나님을 많이 가지고, 하나님과 깊게 친해지기 위한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넬료가 대단한 점은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보고자 하지 않았던 어둠 속에 계신 하나님을 응시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보기 원해서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한 것이 상달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의 결과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 이전의 우리는 상달되는 기도의 전문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상달되는 기도와 구제를 한 고넬료는 예수님의 이름을 받게 되고 붙잡게 된 상태가 최고의 기도응답과 최종적인 기도응답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바라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제대로 가졌다면 세상 것과 연관하여 상달되어야 할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땅에 있고 이제부터 드리는 기도가 하늘에 도달해야만 하는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복음의 내용은 그저 고넬료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넬료의 경우를 보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게 된 자의 전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게 되었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무조건 하늘에 상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그러한 바람을 갖지는 못한 채 오직 우리의 기도나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기만을 바래왔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땅에 머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사건으로부터 제시되는 복음은 그러한 내용이 아님을 살펴보았습니다. 고넬료의 소원은 어둠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자 한 것이었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이었고,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도가 응답된 결과로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베드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환상을 보고 고넬료에게 예수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통해 제시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하던 어둠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온 힘을 다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르가의 사건을 통해 이방인 선교에 방해가 될 수 있는 권선징악 사상을 배제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를 통하여 이방인이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삶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상달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로 바라는 것은 기도의 상달이 아닌 존재의 상달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존재가 하늘에 상달된다면 이 세상의 삶에서 나타나는 기도나 행동들은 모두 하달되는 것이 됩니다. 고넬료가 예수님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때에, 소위 개신교라고 하는 기독교 종교가 과연 그리스도 사람들의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이제부터의 기도는 상달될 필요가 없습니다. 상달되어야 할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기도나 행동이 상달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통째로 상달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존재에서 나오는 모든 기도와 행동은 오직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달되는 기도와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항상 깨어있는 의식으로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나의 존재가 통째로 상달되게 하시고, 이 땅에 대해서는 하달되는 기도와 행동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입을 열 때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하달되는 말이 되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