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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이 목마른 사람, 예수를 가진 사람>의 줄거리:
교회의 이천 년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성공적인 전도 현장에서 작동하는 전도 시스템이 최초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장면입니다. 즉 '고넬료-베드로 만남 시스템'입니다. 하늘 갈증을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고넬료들과 그 하늘에 이르는 길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을 내 것으로 삼은 베드로들의 만남을 통해 복음은 전파됩니다.
하늘이 목마른 사람 예수를 가진 사람
(사도행전 10:24~48)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이 목마른 사람 예수를 가진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이 목마른 사람 예수를 가진 사람’
욥바에서 출발한 베드로는 50km를 이동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를 만나게 됩니 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한 경위를 설명하고 이에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합니다. 본문은 베드로가 증언을 하는 중에 일어난 성령강림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이 하나의 고정된 시스템으로 작동하면서 2000년 동안 교회의 전도는 이루어져왔습니다. 예수님과 전혀 관계없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들은, 반드시 고넬료와 같이 하늘에 목마른 사람과 베드로와 같이 예수를 가진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본문에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이 완전히 성취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집안에서 일어난 성령강림 사건은 제2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오순절 대신에 가이사랴의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특별한 이유는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곳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고 식민지의 지배를 담당하는 군대가 주둔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있던 백부장 고넬료 또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고넬료의 집에서 제2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와 그와 함께 갔던 할례 받은 유대인으로써 교인이 된 사람들에게는 예상하거나 기대할 수도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사마리아 같은 경우는 이방인에 속한 자들로 개들이라고 불렀지만 이들이 혼혈민족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나름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아주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경우는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고넬료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식민지배하고 있는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제치하에서 일본군 장교를 대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당시 교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여겨졌기에 성령을 받는 것 또한 유대인들에게만 허락될 수 있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성령강림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된 일입니다. 따라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베드로 사도나 교인들은 결코 달가워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45절에서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고넬료 한 사람만 성령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기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못지않은 강력함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 담긴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선민의 구분 기준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넬료-베드로 만남 시스템”이 최초로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선민의 구분 기준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선민과 선민이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입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 중에는 마술사 시몬과 같은 사람들의 계열이 있는가 하면 에디오피아 내시 계열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마술사 시몬 계열은 세상 안주형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고, 에디오피아 내시의 계열은 세상 탈출형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인 내용으로 보자면 마술사 시몬 계열의 사람들은 진정한 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 예수님 이름만 부르는 무늬만 교인인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제 선민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선민의 기준은 아브라함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선민의 기준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의 피를 받은 사람들을 선민으로 인정하시게 된 엄청난 사건입니다.
두 번째로 이 사건을 통해 “고넬료-베드로 만남 시스템”이 완성됩니다. 이 시스템은 이후로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동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공적이고 진정한 전도는 반드시 이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을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이 전도가 상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전도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하늘에 대한 목마름을 준비시키시고, 한쪽에서는 예수님을 자기 예수님으로 가진 베드로를 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통하여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셨고 고넬료로 하여금 이 증언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땅을 탈출하여 하늘에 이르는 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늘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하게 됩니다. 고넬료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하게 되었고 이제 베드로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증언해야 할 다른 고넬료들을 준비시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고넬료-베드로 복음전파 시스템”입니다. 하늘을 소원하던 고넬료의 입장에 있던 사람이 나의 예수님을 가진 후에는 베드로가 되어서 내가 가진 예수님을 다른 고넬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는 지금까지 반복되어 왔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무수히 반복되어 갈 것입니다. 본문의 고넬료 집안의 성령강림은 바로 이 시스템의 완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목말랐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이 전해지자 성령강림과 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46절을 보면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료를 비롯한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이방인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늘이라는 세계 속에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실재하심에 대해서 어떠한 확증도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현실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높였다는 것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나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과 마찬가지로 영화로운 광채이신 하나님이 이들의 마음에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을 자기 것으로 가진 베드로가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증언함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땅을 탈출하여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길에 대한 증언을 듣는 동안 고넬료를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인자 예수님 안에 마음을 보내는 중에 성령님이 임하셔서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마치 성령께서 하나님을 보는 감각기관이 되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던 사람들이 드디어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좋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증언해야 할 예수님은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유는 하늘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 위함입니다. 무엇인가를 빨아들여 채워지고자 하는 공백의 마음을 하늘에 도달하게 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가 이루어지는 전제는 하늘에 대한 갈증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대한 갈증을 준비시키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을 빼버리고 공생애 때에 기적을 일으키시던 예수님만을 전한다면 세상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만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마술사 시몬 계통의 기독교 종교인들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제대로 전했다면 설령 듣는 사람이 세상에 대한 목마름에 가득 차 있을지라도 마술사 시몬 계통의 교인이 생기는 것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을 빼놓은 채 공생애 때의 기적을 일으키시던 예수님만을 전하거나 죽은 뒤에 천국에 간다고 전한다면 세상 안주형 가짜 교인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를 하는 입장에서는 가짜 교인들이라도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요즘 개신교계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전제하에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이나 그 목사님의 설교를 전달하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 되었습니다. 설교 잘하는 목사님을 선전하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인터넷에서도 교인들은 설교 잘하는 목사님을 찾아다니는 일에 분주합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질문이 생겨납니다. 이처럼 탁월한 설교를 하는 목사님의 이름을 알려주고 그 설교를 듣게 했을 때와, 비록 어설플지라도 내 것으로 삼은 나의 예수님을 전하는 증언 중에서 성령께서는 어느 쪽에 더 강하게 역사하실까요? 어느 쪽이 진짜 예수님을 믿게 될까요?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강림은 오직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과 묶여있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의 언변과 실력과 학력과 외모나 재력이나 신분 등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전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의 예수님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날마다 반복하여 따라감으로써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땅에서 목말라 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대한 목마름을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통하여 해결하는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예수님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당에 있는 펌프에서 끌어올리는 지하수는 온전히 나만 쓰는 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의 예수님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증거는 세상에 대한 목마름이 없고 하늘에 대한 목마름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해결됨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반드시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서 나를 기다리는 고넬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베드로 만남 시스템”이 최초로 완성되는 모습이 제시되는 이유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배우자나 자녀가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넬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셨고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가 되셨다면 예수님을 내 것으로 가진 것입니다. 그럴 때 바라게 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셨듯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남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여러분 각자를 만나기 원하는 고넬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살아있는 이유는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해 들어야 할 고넬료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죽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 대해 소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소원할 것이 없는데 세상을 더 살아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여러분의 증언을 기다리는 고넬료들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넬료를 어떻게 만날 것이며, 나의 고넬료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하늘에 대한 목마름을 주셨고 베드로 사도를 초청하도록 환상까지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도 하나님께서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면서 이방인 선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십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었던 고넬료는 일제치하의 순사와 같은 존재였기에 유대인들은 결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주도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늘 목마름이 준비된 사람, 하나님에 은혜 속에서 예수님을 내 것으로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만나게 됨으로써 전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늘 목마름을 해결하게 되었다면 이제 나는 베드로의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고넬료를 만나기 위해서 환상을 보게 된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0~13절을 보면 베드로가 환상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동물들을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어서 14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거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어지는 15절을 보면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베드로의 이방인에 대한 인식이 깨어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실제로 고넬료를 만난 후에 깨달은 내용을 말하게 되는데 34절을 보면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고백은 베드로가 이제까지 외모를 보았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란 이방인이자 로마의 장교라는 신분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군인이라는 신분조차 선민의 자격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베드로는 유대인인 자신과 로마 군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 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며 깨닫게 하신 바에 따르자면 그것은 아무 차이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35절을 보면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무엇인가가 있게 될 때 느끼는 두려움이 공포라면, 무엇인가가 없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입니다. 그런데 본문 35절의 표현만을 보자면 애초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없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외를 이제까지 사용해 왔던 표현으로 대체해보자면 하늘 목마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늘에 대한 목마름은 의를 행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 속에서 살아갑니다. 죄는 곧 잘못됨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상태에서 살 때 나타날 수 있는 유일한 올바름이란 세상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시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늘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반대로 의인이 아닌 사람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돈을 벌어서 좋아하고 승진했다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돈이나 승진으로는 마음이 채워질 수 없음을 알고 끙끙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이란 이 세상의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하늘이 없음으로 인하여 결코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에서도 기쁨 찾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이러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강제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만족하고 기쁨을 찾으려는 나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김으로써 의로운 자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서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이 머물러 있는 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가질 수 없기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자들이 의인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으로 해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받아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이름을 몰랐지만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갈증을 넣어주신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이러한 하늘에 대한 갈증을 갖게 된 사람이 유대인이 아닌 바로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였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로마 군인은 기피의 대상이라는 것은 상식이자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렇게 기피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지배하는 습관적 판단과 고정관념과 각종 선입견과 편견들이 우리가 만나야 할 고넬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러한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나의 고넬료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편견과 판단이 그 사람과의 만남을 방해하여 베드로의 역할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외모가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 만남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과 선입견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방색에 대한 편견을 갖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제 친구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경상도 목사님이 전라도 사람들을 좋지 않게 보고, 전라도 목사님이 경상도 사람들을 좋지 않게 보는 경우를 봅니다. 목사라는 사람들이 고작 지방색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경상도의 목사님이 예수님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준비시킨 고넬료가 전라도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갖고 있었던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나 선입견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나도 모르게 영향을 끼칩니다. 십자가 생활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지역 얘기가 나오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로 발끈하는 경우를 봤습니다. 심지어 생전 욕이라고는 못하리라 여겼던 목사님으로부터 욕까지 나오는 경우도 봤습니다.
정치적 관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보냐 보수냐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는 중에도 작동하는 것을 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시키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과 관련된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우리나라가 하는 일이 옳고 우리나라가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맹목적 애국심이 베드로가 되기를 막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에 대해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세 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며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이라면 무조건 치를 떠는데 이것 또한 나의 고넬료를 놓치게 되는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이러한 고정관념과 편견과 선입견으로 놓치게 된 고넬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지는 상태조차도 늘 점검해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가졌다면 십자가에 대한 의식이 항상 깨어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만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하늘에 계신 인자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느끼는 감각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들보다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먼저 보고자 할 때 하나님을 갈망하고 소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지속되는 동안 지금 당장은 하나님으로 완전히 충족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원은 십자가에 근거된 완벽한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소원은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엄청난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가졌던 베드로 속에서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떨쳐버리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11장에서는 사도들과 교인들 또한 이러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깨뜨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지 않음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몸을 이용하셔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죽어야 할 대상은 가족이나 건강이나 일이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대상입니다. 편견으로 타지역 사람들을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점검해보시고, 정치권에 대해서도 보수냐 진보냐를 따지기에 앞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해본 적이 있는가를 점검해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 속에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편견이 얼마나 뿌리 깊게 남아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지는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야 하고 나를 기다리는 고넬료들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속에 남아있는 고정관념과 편견과 선입견들이 고넬료를 팽개치고 뿌리치게 한다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우리 같이 날마다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이러한 것들이 말살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입장이 되어서 하나님이 준비시키신 하늘을 목말라 하는 나의 고넬료들을 한 사람도 간과하거나 지나치거나 잃어버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가 더욱 세밀해지고 치밀해지고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배하던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편견과 판단 등이 모두 십자가에서 깨어지고 부서지고 사라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을 나의 것으로 가진 베드로의 입장에서 만나게 되는 고넬료들을 하나도 잃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