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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몸이 처한 상황은 무조건 마음의 감옥>의 줄거리: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사도 베드로 사역의 마지막 부분은 특별히 교인들의 편견을 타파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일에 집중됩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중에 깊은 잠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바는. 교인은 이제부터 몸이 처한 모든 상황을 감옥으로 여기고 마음이 출옥을 하라는 것이고 그러면 편견이 뿌리 뽑힌다는 거지요.
몸이 처한 상황은 무조건 마음의 감옥
(사도행전 12:1~19)
1.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몸이 처한 상황은 무조건 마음의 감옥>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몸이 처한 상황은 무조건 마음의 감옥’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 날 아침이면 헤롯 왕에 의해서 처형당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베드로 사도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감옥에 갇혀서 죽음이 예상되는 가운데 교회가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제자들 중에서도 3대 제자라 불리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야고보 사도가 헤롯 왕에 의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을 믿지 않던 유대인들은 야고보 사도의 죽음을 기뻐하였고, 이에 고무된 헤롯 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확실하게 사기 위해서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 사도도 죽이고자 잡아 가두게 됩니다. 다만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끝나기를 기다려 아침에 처형하고자 하던 차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베드로 사도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데 기도의 내용은 본문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석들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풀려나기를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 앞서 야고보 사도가 순교할 때도 교회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서 왜 구해주시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베드로 사도에 대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풀려난 것이고, 야고보 사도에 대해서는 응답하지 않으셨기에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해석으로는 야고보 사도는 불행한 일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베드로 사도가 풀려나기를 기대하며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13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풀려난 베드로 사도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집에 모여 있던 교인들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로데라 하는 소녀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로데는 너무 기쁜 나머지 문도 열지 않은 채 집안의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어지고 있는 본문의 기록은 유난히 상세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대해 디테일이 살아있다는 표현을 하는데 소녀의 행동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디테일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로데라는 소녀가 문도 열어주지 않고 소식을 전한 것으로부터 교회가 무슨 기도를 하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단서가 등장합니다. 15절을 보면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교회가 베드로의 출옥을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베드로의 생환을 바라며 기도하였다면 베드로가 왔다는 말에 달려나가 마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에 베드로가 살아나올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가 왔다는 로데를 향해 “네가 미쳤다”라고 한 것이고 그럼에도 로데가 확신을 굽히지 않자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하며 이번에는 베드로를 산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베드로의 생환을 기도하였다면 처음에는 로데의 말을 믿지 않았더라도 혹시나 해서라도 나가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기도를 했으면 응답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애초에 베드로의 생환을 간구하지 않았기에 베드로가 왔다는 로데의 말에도 시큰둥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베드로가 계속 문을 두드리자 그제서야 나가 확인하고 정말로 베드로 사도가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는 야고보 사도가 순교한 직후였습니다. 이제 아침이 되면 베드로 사도 또한 죽임을 당하리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기도는 결코 베드로 사도의 생환에 대한 간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앞서 우리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은 순교의 현장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교회에서는 이러한 모범에 기반을 둔 간구를 했을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베드로 사도를 위해 할 수 있는 기도는 당연히 그 마음이 스데반 집사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몸이 처한 상황을 빠져나와 하늘에 계신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머물게 되기를 기도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설령 교회의 이러한 기도가 없었을지라도 베드로 사도는 너끈히 스데반 집사님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안디옥 교회 설립 이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고넬료의 만남을 통하여 편견이 깨어졌고 더욱더 하나님의 일을 위한 합당한 그릇이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로부터 베드로 사도의 마음이 몸이 처한 상황을 빠져나와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교회 또한 베드로 사도의 몸이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몸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일은 일어났고 그 증거로 베드로는 천사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7절을 보면 천사가 와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 사도를 깨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참 특이합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쳤다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단순히 건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주먹으로 쳐서 때렸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사가 주먹으로 쳐서 때려야 깰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계속해서 언급되어 왔던 베드로 사도의 사역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게 됩니다. 15장에서 예루살렘 회의를 주관하는 것으로 언급되고 그 외의 다른 언급은 없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 사도에 대한 마지막 기록인 셈입니다. 이제까지 베드로에 관한 기록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편견 타파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존재할 수 있는 편견에서 비롯되는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을 깨뜨리는 일이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사역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은 교회가 편견인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합니다.
당시의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어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로 하여금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깨뜨리심으로써 앞으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인들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해주십니다. 이 편견이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은 사람에서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 또한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엄청난 의미의 교훈들이 모두 베드로 사도를 통해 나타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베드로 사도가 출옥하게 되는 사건은 편견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편견이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지를 베드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몸이 처해 있는 이 세상의 상황을 무조건 감옥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교회가 베드로 사도를 위해 했던 기도는 생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 사도의 마음이 몸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가 머물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밖에서 옥을 지키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군은 죄수를 감시하는 일을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어 6시간씩 4교대로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군인 중 두 명은 베드로 좌우편에서 자신의 손과 발을 베드로 사도의 손과 발에 묶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바깥에서 경비를 섭니다. 만에 하나라도 탈옥을 허락하지 않는 참으로 삼엄한 경비태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강하게 몸이 처한 상황을 속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연출하셨다고 생각될 정도로 속박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7절에서 천사가 베드로 사도를 쳐서 깨운 것은 몸이 처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속박의 상황 속에서 베드로 사도의 마음이 얼마나 자유로웠는가를 상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도 된다는 듯이 베드로는 감옥을 편하고 쾌적한 잠자리로 여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속박의 상태에서 때려눕히듯이 주먹을 가하지 않으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은 그만큼 베드로 사도의 마음이 몸이 속한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하면 편견을 근원적으로 뽑을 수 있는가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사역은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을 깨뜨리는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모든 교인에게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이 받은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편견인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은 극복되고 타파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결론을 내리며 베드로의 사역은 마무리됩니다. 이를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사역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없습니다.
편견인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의 타파는 몸이 처한 상황을 감옥으로 생각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옥에 갇힌 것처럼 우리 몸이 처한 상황을 옥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베드로 사도의 마음이 몸을 떠나 하늘에 이르기를 기도했고 베드로 사도 또한 실제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 또한 몸을 탈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11절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의 반응이 이상하게도 담담합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에 기쁨을 느끼고 감사했던 것이 아닙니다. 마치 다큐멘터리의 해설자처럼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몸이 처한 상황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출옥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했다면 앞서 이루어진 야고보 순교의 의미는 퇴색되었을 것입니다. 야보고 사도에게 기뻐할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순교가 결코 슬퍼하고 불행하게 여겨야 할 일이 아니었듯이 베드로의 출옥 또한 기뻐하거나 행복하게 여길 일이 아니었습니다. 몸이 출옥한 것은 결코 기뻐할 일도 아니며 기대할 일도 아니기에 1~2절에서 먼저 야고보 사도의 순교를 언급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살아남은 것으로 기뻐했다면 살아남지 못한 스데반 집사님은 불행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몸이 처한 상황은 조금도 기쁨이나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야고보 사도를 죽게 하셨다고 야고보에게는 불행을 주신 것이고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 사도에게는 행복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출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진행된 결과였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누가는 본문을 기록함에 있어서 야고보의 순교를 먼저 제시하고 베드로 사도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은 바로 마음의 출옥입니다. 이것은 편견을 깨뜨리는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사역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설령 이 세상에서 몸이 처하는 모든 상황은 편안하고 순탄할지라도 감옥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편견인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선입견을 깨뜨릴 수 있고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몸을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의 적용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 생활화를 어떻게 적용해나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해답이 베드로를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몸이 처한 모든 상황을 감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유대인 할례자들이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를 만난 사건을 두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이방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우선하여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일에 대해서는 십자가 생활화가 적용되고 또 어떤 일에 대해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편견이 강하게 작용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적용하기보다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을 우선시하게 됩니다. 그럴 때 십자가 생활화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묶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출옥 사건을 통해 가르쳐주시고자 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몸이 만나는 상황은 무조건 감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절대로 몸이 만나는 상황에 같이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평범한 일상도 마음이 탈출해야 하는 감옥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가족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도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 작용할만한 주제들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편견이 우선시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상태를 늘 기억하면서 몸이 만나는 모든 상황을 감옥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사역이 편견을 타파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감옥에 갇히게 하신 후에 출옥시키신 사건은 이 편견을 타파하는 것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출옥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던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상태입니다. 모든 편견은 마음이 몸을 떠나지 못할 때 발생하게 됩니다. 마음이 몸에 붙잡힌 결과로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 생활화는 중단되고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못한 채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신 세상에서 몸이 처한 상황이 마음을 불행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건강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상황에 처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이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행하게 여기는 이유는 마음이 몸이 처해있는 상황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십자가를 붙잡고 몸이 출옥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다면 인격 속에 자리잡고 있는 습관이 되어버린 편견과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에 마음이 붙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처한 상황은 개선되어야 할 것이 아니며 달라져야 할 것도 아닙니다. 몸이 처한 상황은 좋든 나쁘든 순탄하든 험난하든 무조건 감옥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감옥에서 깊은 잠에 빠졌던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는 마음이 몸을 떠나는 일에 주력해야만 합니다. 몸이 처한 상황이 순탄하다고 해서 마음이 몸에 붙어버린다면 오히려 환난의 시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순교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출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도 아니고 행복도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네 명의 군인에 의해 붙들려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헤롯 왕은 베드로 사도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적 권력자였습니다. 군중들은 베드로 사도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고, 헤롯은 군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반드시 죽여서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세상기준에서 볼 때 베드로 사도가 죽지 않을 확률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몸이 처한 상황을 감옥으로 생각할 때에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탈출시키는 것입니다. 감옥을 개선하려고 하거나 대응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몸이 감옥이라면 마음은 몸을 탈출하는 것을 목적 삼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의 상황이란 권력자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대중들의 바람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변수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우리의 삶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처럼 순교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된 것이며, 베드로 사도처럼 출옥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보다 더 좋은 생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에게 있어서는 순교가 최선이었기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망하는 것이 최선이라면 망하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향한 최선의 길이기에 마음 놓고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해 죽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은 탈출하여 인자 예수님 안에 들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회사에 계신다면 회사는 마음이 탈출해야 될 감옥입니다. 탈출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어느덧 회사에 묶이고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이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가족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편견이 나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이 적용되는 삶은 괴롭고 힘들고 우울합니다. 이러한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몸이 처한 상황을 무조건 감옥으로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순탄한 상황이라고 좋아한다면 반드시 더 큰 고난과 마주하게 되고 마음은 더욱 심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처한 상황이 순탄하든지 순탄치 못하든지 마음은 몸을 탈출해야만 합니다. 몸이 처한 상황은 불행이나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불행하다면 마음이 몸이 처해 있는 상황에 갇혀있다는 증거입니다. 몸이 처한 상황은 감옥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모범을 보였고, 베드로 사도가 재현하여 가르쳐주시고 각인시켜 주었듯이 우리의 마음은 몸이 처한 상황을 감옥으로 여기며 탈출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는 그릇도 될 수 있으며 불행을 느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편견을 뿌리 뽑는 십자가 생활화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되 베드로 사도를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몸이 처한 상황을 감옥으로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은 몸이 처한 상황을 탈출하는 빠삐용이 되어야 합니다. 만나는 사람, 주어진 상황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감옥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빠삐용이 계속해서 탈출을 계획하듯이 오늘도 몇십 번이라도 마음의 탈출을 이루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을 마주할 때마다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철저하게 내 몸이 처한 상황이 감옥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에 마음이 묶여서 세상에 갇히는 일이 한순간도 없게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