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은 한 편의 영화, 천국이 진짜 현실>의 줄거리: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에 의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가 확정된 뒤에 드디어 이방인 선교가 본격화됩니다. 택하신 그릇인 사도 바울의 세상의 판도를 바꾸게 될 전도여행이 막이 오른 것이지요. 3차에 걸쳐 이루어질 이 전도 여행의 성격이 규정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천국으로 현실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은 한 편의 영화, 천국이 진짜 현실
(사도행전 13:1~12)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은 한 편의 영화, 천국이 진짜 현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은 한 편의 영화, 천국이 진짜 현실’
본문에서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선교사로 파송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선교사 파송의 장면입니다. 이어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차 전도여행의 첫 번째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9절을 보면 드디어 사울이 바울로 불리게 됩니다. 공식적인 선교를 위한 전도여행의 시작과 함께 이름을 바꿨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바울이라는 이름은 새로 지은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로마 식민지하에 있었던 많은 유대인들이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나바는 로마식 이름으로써 유대식 이름은 요셉이었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또한 로마식 이름이고 유대식으로는 요한입니다. 사울은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로 바울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로 활동을 시작한 1차 전도여행에서의 첫 번째 일화는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전도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편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남자 마술사 즉 박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바예수에 대해서 저주하기를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전도여행이 마술사를 저주하는 일로 시작되었던 것이 특이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바나바와 바울은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 항구에 이르게 됩니다. 구브로 섬은 지금의 사이프러스(키프로스) 섬으로써 동서로 길게 뻗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살라미 항구는 동쪽 끝에 위치한 항구였습니다. 바울은 이 항구에서 출발하여 약 180km 정도의 구브로 섬을 횡단하며 순회전도를 하다 서쪽 끝인 바보 항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바보 항에는 로마정부가 파송한 총독이 거하는 관저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의 이름이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었습니다. 헬라어로 발음하면 셀리지우스 파울루스가 됩니다. 그리고 마술사로 언급된 바예수는 서기오 바울 총독관저에서 일하는 궁중 박수였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희한하게도 전도여행에서 처음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은 마술사 바예수를 고용하고 있던 총독 서기오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바예수에 대한 저주가 함께 동반되었다는 점이 주목할 부분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전도여행의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구원이 무엇인지가 이 저주의 내용을 통하여 명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바울이 바예수에게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하필이면 저주가 보지 못하는 것으로 임하게 됩니다.
마술사 바예수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복음을 받지 못하게 전력을 다해 방해했을 것입니다. 이에 성령이 충만했던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저주를 내려 얼마간 맹인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전도여행 전체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표식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중심으로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서 사도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의 성격과 목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그릇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이방선교를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선교가 시작되기 이전에 의도적으로 특별한 과정을 통하여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어떤 인격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 뒤에 이방인 선교를 위한 전도여행은 본격화됩니다. 이러한 전도여행의 목적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 제시된 바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인격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을 이방인 중에서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유전자를 이방인들에게 이식해주는 방법이 전도여행이었던 것입니다. 누가가 이러한 과정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베드로 사도와 관련되어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이방인들에게 이식시켜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제일 큰 사건으로 의식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라면 돈이 없을 때도 돈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식합니다. 내가 지금 돈이 없다는 문제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더 크게 느끼는 것입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문제보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나 때문에 부활하셨으며 나를 위하여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더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가 있어도, 나라의 문제가 있어도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 연쇄과정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가장 큰 사건으로 의식할 때에는 인격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드렸던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유전자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인격적 유전자의 첫 번째 특징은 세상일에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죽음과 베드로 사도의 출옥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언제나 가장 큰 사건으로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야고보 사도의 죽음이 나쁜 것이 아니며 베드로 사도의 출옥도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 상황에 대해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해서 인생을 실패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다고 해서 인생에서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몸으로 만나는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하늘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진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세상은 마음에서 좋고 나쁨을 가리거나 기쁨이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세상은 단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인격적 유전자의 두 번째 특징은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특징은 옥에 갇힌 베드로가 깊은 잠에 빠졌던 모습으로 대표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채움을 소원하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염두에 둘 때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세상에 머물지 않고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항상 하늘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게 됩니다. 베드로의 몸은 옥에 갇힌 채 두 군인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여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일 아침이면 참수를 당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강하게 의식함으로써 하늘에 올라가 하늘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최측근의 자리인 보좌 우편에서 마음이 머무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으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마음이 하늘로 가게 됩니다. 몸으로 만나는 모든 상황을 감옥으로 여김으로 마음이 하늘로 갑니다. 그리고 하늘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음이 유지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인격적 유전자의 세 번째 특징은 현실감이 바뀌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사의 이끌림을 받아서 감옥 철문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일을 환상으로 여기다가 감옥에서 벗어난 후에야 실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제일 큰 사건으로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언제나 하늘에 올라가 있으므로 현실감이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객관적 사실들을 접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모두 현실로 느끼지는 않습니다. 오직 마음에 닿게 되는 사실만이 현실이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이 닿지 않는 사실들은 현실이 아닌 환상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는 동안 세상을 환상으로 느끼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세상을 빠져나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있음을 느끼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대신 몸이 있는 세상은 마치 환상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삶을 한 편의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면 영화 속의 모든 것은 다 사라집니다. 이 세 번째 그리스도인이 가진 인격적 유전자의 특징이 오늘 본문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화를 촬영하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화를 촬영할 때에 배우들은 극중 상황을 진짜인 것처럼 연기합니다. 이때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은 각본과 감독의 지시를 따르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마음이 닿지 않기 때문에 현실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영화를 찍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온 세상의 감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말하며 그대로 행동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유전적 특징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가장 큰 사건으로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현실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바뀐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바울이 바예수에게 내린 저주가 현실이 천국으로 바뀌는 것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예수를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눈으로 보는 차원에서 무슨 일을 행하거나 일어날 일들을 약속합니다. 즉,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게 하여 철저하게 현실로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마술의 특징은 결과를 보여주되 원인과 과정을 감추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와 반대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마음을 붙이게 하여 현실로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길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제공합니다. 바예수는 이러한 복음을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칠까 두려워하였고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합니다. 그러나 총독 서기오 바울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관행과 풍습을 따라 궁중 마술사를 두기는 하였으나 통치를 함에 있어서 의존하지는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바예수는 단순한 마술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거짓 선지자의 명성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그 위세는 대단했을 것입니다. 당시 궁중 마술사들은 왕이나 총독이 관할 영역을 다스릴 때 필요한 판단과 지식을 제공해주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총독은 지혜 있는 사람이었다는 기록대로 마술사에게 의존하지 않았고, 바예수 또한 총독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행여나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바예수의 입지는 아예 없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예수는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것입니다.
마술사들이 하는 일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유일한 현실로 느끼게 하면서 마음을 붙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불가사의한 일들을 일으키고자 했고, 눈에 보이는 상황에 형통과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혜를 말해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었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목적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눈멀고 하늘에 눈뜨는 것입니다. 마술사들의 일과 대극점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술사에게 눈이 머는 저주를 내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예수가 보는 세상이 유일한 참 현실이라고 믿고 가르치며 사람들을 인도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저주받은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저주받은 삶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유일한 참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알고 그것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느끼며 모든 수고와 노력을 쏟아붓습니다. 마음이 언제나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상황에 휩싸여서 반응하기에 평강이 있을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고 선입견이고 가치관입니다. 내 속에 녹음된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저주입니다.
전도여행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현실이 바뀌는 것입니다. 몸으로 만나고 있는 어떤 것도 현실이 될 수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 현실임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에 마음을 닿게 해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라는 것을 전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저주를 받은 바예수는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런데 이를 본 총독 서기오 바울의 반응이 특이합니다. 12절을 보면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증언한 주의 가르침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입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은 자기가 평생 눈으로 보고 살았던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늘이 현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증거로 제시하신 사건이 바예수의 눈이 머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현실로 보게 하던 마술사 바예수의 눈이 머는 사건을 통하여 총독 서기오 바울은 하늘이 존재함을 마음에서 확증하며 믿게 됩니다.
우리 또한 총독 서기오 바울과 같이 전도를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현실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현실이 바뀐다는 것은 정체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남자이거나 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남편이고 아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이 바뀌는 것입니다.
몸으로 만나는 세상을 현실로 느낀다면 정체성은 세상에 귀속되게 됩니다. 남자이거나 여자일 것이며, 남편이거나 아내일 것이고, 자녀들의 부모일 것이며, 직장에서는 직원일 것이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국민 중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은 눈으로 보는 세상을 현실로 삼을 때에만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제일 큰 사건으로 의식하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을 현실로 삼을 때에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은 하나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만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정체성은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서 갖고 있는 모든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서의 삶은 영화와 같이 느껴지게 됩니다. 영화를 찍는 배우의 역할을 수행해가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앞에서는 배우자의 배역을 담당하게 됩니다. 자녀들 앞에서는 부모의 배역을 담당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배역을 담당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증언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갖는 현실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배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지금 몸이 만나고 있는 상황은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습니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면 인기를 얻어서 소위 뜨게 됩니다. 착하고 아름다운 역을 맡았다고 뜨는 것이 아닙니다. 악역을 맡았고 나오는 장면이 많지도 않은데 뛰어난 연기를 보여줘서 뜨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장면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서 다른 영화로 출연의 판도를 넓혀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배역에는 좋고 나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이 처해있는 이 세상에서의 상황은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온 세상의 감독이신 하나님의 신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말하고 행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바예수의 눈이 멀게 된 사건은 세상을 현실로 보는 것이야말로 저주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절대 현실로 삼을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맡은바 배역을 담당해야 할 영화이고 연극입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첫 번째 일화를 드러내며 앞으로 진행될 전도여행의 의미를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현실이 아니기에 세상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할 수 없으며 세상에서 좋고 나쁨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이 아닌 이 세상을 사는 모습은 환상과 같습니다. 영화를 촬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맡겨주신 배역을 담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의 의미는 영원히 함께해야 될 하나님과 얼마나 호흡을 잘 맞출 수 있는가를 점검하는 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배우가 감독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연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명한 감독들을 보면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호흡이 잘 맞는 배우를 여러 작품에서 계속해서 기용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감독이신 하나님과 얼마나 호흡을 잘 맞출 것인지를 이 세상의 삶을 통하여 증명해나가는 것입니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 건강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호흡을 맞출 것인가 혹은 돈이 많은 상황에서, 건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호흡을 맞출 것인가를 점검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하늘에서의 상급은 얼마나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많이 가졌는지, 얼마나 하나님과 일체를 이룰 수 있었는지에 따라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은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고 나쁨의 판단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 하기를 바라시며 신의 소리를 발하고 계시는지를 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호흡을 맞춰나가는 일을 확장시켜 나가고 능숙하게 해나가는 달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고 이 세상을 사는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은 영화 속 촬영현장입니다. 감독이신 하나님과 호흡이 척척 맞는 배우들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진짜 나의 현실인 하늘에서 하나님과의 일체됨이 더욱더 강해지고 많아지고 커지는 복된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더 이상 현실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언제나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하나님과 점점 더 일체가 될 수 있게 하시고, 이 세상 삶은 영화 속 촬영현장의 배우처럼 오직 감독이신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일에만 전심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