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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로 가려는 자는 산을 오르지 않는다>의 줄거리:
그리스도인이 땅에서부터 살게 되는 영생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바로 하늘 현실감입니다. 하늘 현실감이란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있음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늘 현실감을 중단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 바로 이 땅에서 높아짐입니다. 마음의 끌림이 높은 하늘에서 높은 땅으로 대체되는 순간 영생은 사라집니다.
하늘로 가려는 자는 산을 오르지 않는다
(사도행전 14:1~20)
16.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로 가려는 자는 산을 오르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로 가려는 자는 산을 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 사도의 전도여행의 궁극적 목적은 이방인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전도여행이 소개되고 있는 본문에서는 계속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인격적 특징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세상일에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었으며, 세 번째는 천국 현실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 현실감을 가질 때에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살게 됩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죽은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영원한 현실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천국 현실감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반드시 천국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닿는 사실만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삶 또한 현실감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현실이 아닌 것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천국 현실감과 관련하여 본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천국 현실감은 그리스도인 됨의 핵심요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일을 대체하고 무효화시키는 강력한 유혹이 존재합니다. 땅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하늘을 지향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높아봤자 땅은 땅일 뿐입니다. 산봉우리가 아무리 높아도 하늘에 닿는 법은 없듯이, 땅에서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하늘과는 어떤 관계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에 닿기 위한 유일한 길은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 하늘로 가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로 갈 수 없다면 하늘까지 올라갈 길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면 하늘 현실감도 가질 수 없고 영생을 살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로 가고 싶어 하는 유혹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원수가 있다면 내가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이기에 십자가로 가고자 한다면 내가 나의 원수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나에 대해 스스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그러한 모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음의 끌림이 높은 하늘을 향하는 대신에 높은 땅으로 대체되는 순간 영생은 사라집니다. 영생은 하늘 현실감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높아질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하늘을 향하기가 더 쉬우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은 이 땅에서 높아지는 길을 찾는 천재들입니다. 꼭 대통령이 되고 재벌총수가 되고 대학총장이 되어야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 말 한마디를 누군가 받아들여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고작 신문지 한 장만큼 높아진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분명히 인정받음과 높아짐의 욕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신문지 한 장 만큼이라도 높아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는 방법을 귀신같이 찾아내고야 맙니다.
사회적으로 절대 높아질 수 없는 처지에 있을지라도 본능적으로 높아짐에 대한 추구는 멈추지 않습니다. 종이 몇 장의 높이만큼이라도 추구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이 별 볼 일 없는 바람일지 모르지만 마음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고작 이 정도의 높아짐에 대한 추구가 영생을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영생은 오직 하늘 현실감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높아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높아지고자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땅에서 높음을 추구하는 동안 하늘의 높음에 도달할 기회는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문지 한 장 위에 올라서고자 하더라도 마음의 방향성은 산에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땅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마음은 결코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로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땅에서 높아지기를 거부하고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원하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땅에서 높음을 원하는 동안에는 하늘 높음의 길로 들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등산길에 한 걸음이라도 들여놓았다면 땅에서 높아지는 길에 올라탄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산에 오를지라도 결국은 땅에서 높아진 것이기에 하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늘로 높아지는 길과 땅에서 높아지는 길은 완전히 다릅니다. 무의식중에라도 종이 몇 장 정도라도 높아지고자 했다면 내려와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나의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또 나 자신을 볼 때 중요한 것은 하늘 현실감입니다. 하늘 현실감은 곧 하나님의 존재감을 무엇보다 크게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아닌 나의 존재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내가 한 일이 훌륭해서 남들이 나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면 남을 망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 현실감을 가져야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즉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루스드라 사람들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때에 바울과 바나바는 기겁을 하며 하나님께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고자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렇게 놀랐던 이유는 자신들은 세상에서 높아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루스드라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타난 바울의 설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가면이어야만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내가 하나님의 가면이 아닌 독립적 존재로 인식된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가면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존재감을 느끼고 훌륭하게 여겨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존재감과 훌륭함이 나의 존재감과 훌륭함으로 오해되었다면 반드시 그것을 바꾸는 투쟁과 싸움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높이든 말든 내 마음에서만 낮아지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태도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방관한다면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망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나 자신의 그리스도인 되기도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 앞에서 높임 받는 것은 묵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본능적 바람이 묵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현실감을 갖고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마음은 돌로 쳐 죽여야 할 상태입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섬을 떠나 바보에서 배타고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시내의 유력자들과 귀부인들을 선동하여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였습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남동쪽으로 120km 정도를 더 이동하여 이고니온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게 되었고 또 다시 루스드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하는 중에 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9~10절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장애인을 걷게 했듯이, 바울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걷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은 이제까지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11~12절을 보면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주신이고 헤르메스는 전령의 신입니다. 이들은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까지 동원하여 소와 화환들을 준비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한 두 사도는 옷을 찢으며 사람들을 만류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게 된 사람들의 존재감을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하나님께 도달하는 길로써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전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됩니다.
그로부터 일어난 일이 또 특이합니다. 19~20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 일행을 추적하여 루스드라까지 와서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게 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였다고 생각하고 끌어내어 시외에 내쳤습니다. 바나바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하여 장례를 치를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신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시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달리 무엇을 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이튿날 30~40km떨어진 더베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전도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이어집니다.
더베는 1차 전도여행의 종착지였습니다. 이곳으로부터 바울 일행은 거꾸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버가와 앗달리아에서 말씀을 전한 후에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다만 더베에서의 전도에 대한 구체적 상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1차 전도여행에서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사건은 바울이 돌에 맞아 실신했음에도 깨어나서 루스드라 시내로 다시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바울의 행동에 대해서는 다소 이해가 어렵습니다. 다만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서 이 사건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로부터 루스드라에서의 사건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16장을 보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 나옵니다. 이 여종은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17절을 보면 “그가 바울과 실라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실라를 크게 높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바울은 심한 괴로움을 겪게 됩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도 맞고,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도 맞으며 구원의 길을 전했던 것도 맞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괴로워했던 것은 여기에 귀신의 강한 노림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목적으로 했던 것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도를 알았기에 사람들 앞에서 높아짐을 두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버립니다.
귀신이 떠나간 여종은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었고, 여종을 통하여 돈벌이를 하던 주인들은 분노하여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고발합니다. 이에 바울과 실라는 체포되어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이들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하자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벗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간수와 간수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했고 세례를 줍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간수의 상관이 결국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게 되었는데 이때 37절을 보면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의 로마시민권자는 특별대우의 대상이었습니다. 로마 식민지의 지방관리가 로마시민권자를 벌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관리가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이 매를 맞기 싫고 감옥에 갇히기 싫었다면 진작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도록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서 감옥에 던져졌고 지진이 나서 풀려나게 된 후에야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힙니다. 이에 바울을 처벌한 지방 관리는 놀라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본문에 기록된 루스드라에서의 사건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이 유력자들과 귀부인들을 선동하여 핍박했을 때에 바울은 유대인들을 피해서 이고니온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고니온에서도 유대인들의 핍박은 이어졌고 다시 루스드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에서도 유대인들의 핍박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바울은 피하지 않았고 잡혀서 돌에 맞아 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에 빌립보에서처럼 공권력에 의해서 체포되거나 매를 맞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혔다면 처벌을 받지 않았을 상황이었음에도 굳이 밝히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루스드라와 빌립보에서의 사건을 종합해보면 사도 바울의 행동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바울과 바나바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 사건을 통해 신격화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빌립보에서도 귀신들린 여종을 통해 바울과 실라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밝혀지는 사건을 통해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높아짐을 받은 뒤에 사도 바울은 스스로 낮아지기를 선택합니다. 자기를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낮고 천한 자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죄인 취급을 당합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자처하여 기꺼이 죽도록 돌에 얻어맞았으며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히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싫어했던 일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높임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바란 것은 하나님이 높아지고 예수님이 높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전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천국 현실감을 갖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통해 자신이 높아지는 상황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높아짐을 막고자 자신의 원수가 되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미워하듯이 자신을 미워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로 치는 적대감 앞에 자신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유대인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똑같이 미워할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같았다면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다며 기뻐하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사도 바울의 행동패턴을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하늘 현실감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우리가 바울이나 바나바처럼 신격화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지 한 장 깔아놓고 올라서려는 마음조차도 높아지고자 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이렇게 높아지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를 원수로 여겨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나, 이 세상에서 높은 곳을 지향하려는 나를 원수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이 땅을 벗어나서 하늘로 갈 수 있고 하늘 현실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면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의 소리만을 따라서 살아가고자 할 때도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높아지는 나,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나, 괜찮다고 인정받는 나는 방치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나를 원수 취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에서 드러나는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신앙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높아진 자기 자신을 방치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의식은 높아지고 팽창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23장 12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등산길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아직 높아진 것도 아니지만 높아지기 위한 등산길에 한 걸음이라도 들여놓았다면 마음은 이미 하늘로 가는 길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낮아지고자 할 수 없다면 십자가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붙잡고 높아지고자 합니다.
하늘 현실감을 가지고자 한다면 마음은 하늘로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시작되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때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르며 신의 소리를 듣고 산다면 나도 높임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올바른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십자가 생활화는 무효화되고 영생을 사는 것도 의미가 없으며 신의 소리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도 끝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에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의도치 않게 높아지는 것조차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서 조금이라도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스스로에게 원수로 행할 수 없다면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말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극히 높은 하늘로 가기 위하여 세상에서는 가장 낮은 자리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가장 낮은 곳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바람과 의도치 않게 높아지는 상황에 대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 자신을 원수로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자기기만이고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진짜 복은 하늘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5절에서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으나, 오직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진정성은 높아지려는 나를 적대시하는 것이고 의도치 않게 높아진 나를 원수로 여김으로부터 확인될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모든 삶의 현장에서 순간마다 마음이 하늘로 가서 천국 현실감을 느끼고 하나님의 가면 되어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는 중에 의도치 않게 사람들로부터 높아지는 나를 원수 삼고, 또한 사람들에게서 높임 받고 싶어 하는 나를 원수 삼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