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은 신분 아닌 on/off 선택이다>의 줄거리:
가령 남자, 남편, 아빠 같은 신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분에 걸 맞는 행동을 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신분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러한 신분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신분이 아니라 선택에 따른 상태입니다. 일단 한번 시작한 믿음은 그 뒤로 줄곧 나의 선택에 따라서 켜질 수도 있고 꺼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신분 아닌 on/off 선택이다
(사도행전 14:19~28)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믿음은 신분 아닌 on/off 선택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은 신분 아닌 on/off 선택이다’
본문은 1차 전도여행을 마무리 짓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전도여행의 성과를 보고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자들이라면 이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1차 전도여행 마지막을 정리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적 고정관념이 하나 있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면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란 신분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서 은혜 가운데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렇게 받은 믿음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내가” 선택한 상태로만 성립하게 됩니다. 믿음을 선택한다면 믿음의 사람인 것이지만 믿음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은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자동차가 있다고 해서 언제나 운전 중인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차에 올라탄 순간에만 운전은 이루어집니다. 차에서 내린 상태에서 운전 중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지만 믿음에 올라탈 때만 믿음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켜져 있는 상태와 꺼진 상태는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선택은 일반적인 신분이나 정체성과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가진 남자라는 신분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동시에 저는 부모님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아들이라는 신분도 저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혹시 신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는 있을지라도 신분 자체를 벗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 가운데 선물로 받은 믿음은 고정된 신분이나 정체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택을 따라서 켜지거나 꺼질 수 있습니다. 스위치를 켜야만 전깃불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선택을 통해 켜져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고, 예배당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더라도 그것은 믿음과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믿음을 꺼놓은 채 예배당을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믿음을 켜고 사는 사람들보다 끄고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사람임을 자처하지만 몸에 주어진 신분을 주장하듯이 믿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서, 내가” 선택하여 켤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은 믿음이 켜져 있는 상태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말입니다. 육체의 혈연처럼 이래도 저래도 유지되는 신분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여 믿음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음을 켜놓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될 자리 자체를 떠난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싫어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것이 좋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좋다면 믿음을 켜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22절을 보면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실감 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는 표현은 어찌 보면 상투적입니다. 사도 입장에서 전도한 그리스도인들과 헤어지면서 으레 할 수 있는 말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믿음의 의미를 되새겨본다면 이 말씀은 결코 상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적용해야 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끝으로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은 마무리됩니다. 지난 시간에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들어갔다가 더베로 이동하였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더베가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였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더베에서 출발하여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과 버가와 앗달리아에 이르렀고, 이번에는 구브로 섬을 거치지 않고 배를 타고 바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갑니다.
1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는 사도 바울은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을 떠나야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때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는 당부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반대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은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자식과도 같았습니다. 1차 전도여행의 결과로 더베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과 버가에는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머나먼 이방 땅에 놔둔 채 안디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진리로 받아들인 이들에게 남은 과제는 앞으로 어떻게 믿음에 머무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에 머무는 것이 과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믿음에 머무는 것입니다.
믿음에 머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고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통한의 심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전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2차 전도여행 이후에 생겨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졌다는 점은 1차 전도여행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떠난 뒤로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어지는 7~8절을 보면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떠났다는 것은 믿음에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믿음에 머문다는 것은 곧 복음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의식하는 것입니다. 의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거나 잊어버리거나 다른 일에 밀려서 묻혀버린다면 믿음을 떠나는 것이고 믿음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바라본 자들은 불 뱀의 독에서 나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깨어있어야 하며 기억해야 하며 바라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믿음을 떠난 것입니다. 믿음이 곧 복음에 대한 의식이기에 복음을 떠난 것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신분은 혈연처럼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남자이며, 부모님 앞에서는 자녀이며, 배우자에 대해서는 남편이고, 자녀들 앞에서는 아빠라는 육체로 인한 신분처럼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믿음의 문을 제시하시고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 문을 지나서 좁을 길을 걸어가는 삶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바라봄은 곧 선택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전깃불을 켜놓듯이 켜놓을 수도 있지만 꺼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삶의 매 순간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은 오직 선택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믿음을 유지해나가야 하는 그리스도인 이방인 제자들에게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아내를 대면하는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저의 육체로는 아내와 대면하고 있지만 의식으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 것인지 아내를 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을 통해 믿음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머무를 때 천국의 현실감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 됩니다. 바라봄이 곧 선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의식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십자가의 예수님을 가장 우선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라봄이 의식하는 것이고, 의식함을 통해 선택은 이루어집니다. 매사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선택할 때 믿음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다른 예로 돈 문제가 발생한 상황을 떠올려봅니다. 돈 문제는 사실로써 존재합니다. 마음에서 돈 문제를 선택할지 십자가의 예수님을 선택할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돈 문제를 선택한다면 믿음은 꺼지게 됩니다. 그러나 돈 문제가 발생했어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한다면 믿음을 선택한 것이고 믿음이 켜지게 됩니다. 믿음이 켜지면 돈 문제를 현실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로써 존재하고 있는 돈 문제는 이제 천국 현실감 속으로 끌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이와는 반대로 살아왔습니다. 돈 문제가 생기면 돈 문제를 무엇보다 먼저 강하게 의식하고자 하였습니다. 의식 속에서 믿음을 끄고 돈 문제를 켜는 과정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천국을 현실로 느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자 예수님의 자리로 들어가는 길을 스스로 꺼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돈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보지만 이러한 간구나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사는 방식으로 이해해왔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을 의식하면 믿음을 끄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못 박히셨다는 사건을 먼저 의식하면 믿음에 머물기를 선택하여 믿음을 켜는 것입니다. 믿음을 켜면 이제부터 이 세상의 삶은 천국 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 현실 속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권자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나가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만 켜 놓을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따라 믿음을 선물이자 은혜로 받았습니다. 이제 믿음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열린 문을 따라 믿음의 좁은 길을 가는 것은 나의 몫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믿음의 길이 좁은 길인 이유는 어렵고 험난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마주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건강, 재정, 인간관계, 가족을 비롯한 갖가지 영역에서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나의 의식을 빼앗아가는 대상이 온 세상 천지에 널려있는 상태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온갖 대상에게 의식을 빼앗기는 상태가 넓은 문이고 넓은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의식을 빼앗기는 상태인 것입니다.
반대로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의식을 집중하는 대상이 오직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십자가의 예수님 바라보기를 우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켜진 상태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빛 아래에서 삶이 천국의 현실감 속으로 흡입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모든 문제들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주권이 변함없이 적용되고 성취되어 갑니다.
이어서 22절 하반부를 보면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있었고 이후에는 로마의 박해가 이어지게 됩니다만 환난은 단지 이러한 박해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근원적인 의미에서 환난이란 세상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본성과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유전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세상을 의식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하는 일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어야 할 많은 환난입니다.
그러나 넓은 문과 넓은 길을 좋아하는 본성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환난으로 여기게 하는 근원입니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냄새 맡는 대로 맛보는 대로 손끝에 느끼는 대로 세상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거슬러야 하기에 환난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환난을 뚫고 나가면서 의식으로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바라볼 때 믿음이 켜지는 것이고 믿음이 켜지면 천국은 현실이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천국 현실감 안에서 이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모습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주이자 주권자로서 모든 것을 관장하시고 이끄시는 천국의 현실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함으로써 천국을 현실로 느끼고 마음은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져 가는 평강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믿음은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음을 켤 것인가 끌 것인가에 달려서 성립되느냐 성립되지 않느냐로 결정됩니다.
한편 23절을 보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 제자들을 떠나야만 합니다. 이들은 이제 겨우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리스도가 이루신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의식하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믿음이 흔들리거나 떠나게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러한 일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장로들을 세워서 그들을 위탁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로를 예배당 조직의 행정을 담당하는 이사회의 회원 정도로 생각합니다. 실질적으로 요즘 예배당에서 장로들의 역할이란 그러한 일들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장로는 그러한 행정직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에 머물게 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이 한 일은 믿음 안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전도가 나타나게 되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고 적대적인 사람들과 마주할 때 할 수 있는 일 또한 믿음 안에 머무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낯선 상황에서 보이는 어떤 것보다도 먼저 의식을 했습니다. 그럴 때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지역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천국의 현실로 흡입되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자 예정하신 자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언제나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식하던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증언하게 하셨고 기적과 표적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일어났으되 전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지역에 선교사로 가서 한 일은 믿음에 머무는 것뿐이었습니다. 믿음에 머물러서 믿음이 켜지면 삶의 상황들은 천국의 현실로 흡입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일들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뜻에 의해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제 이러한 바울과 바나바는 떠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머물기를 바라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이 장로들을 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는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고 믿음에 머물러 있기를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장로들이 해야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장로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의식하는 일을 사명으로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장로는 본래 예배당 조직에서 예산문제를 조정하고 행사를 심의하는 이사회의 회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특별히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가장 먼저 의식하여 믿음을 켜고 유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문제로 인해 믿음이 흔들릴 때 장로들 주변에 믿음의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방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문제들로 인하여 믿음이 꺼질 위기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켜지게 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의 존재 의미와 저의 사명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삶의 문제들을 마주하는 가운데 믿음이 꺼지게 되었을 때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며 많은 말들을 하게 되지만 모든 말의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첫 번째로 의식하고있는 중이고 믿음을 켜놓고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등불이 꺼져서 세상의 어둠 속에 묻힌 사람들이 이 등불을 보고 믿음의 불을 켜실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삶의 문제가 생겼다면 의식해야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으며 문제의 환난을 뚫고 나갈 때 삶의 문제들 또한 천국의 현실 안으로 흡입될 것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천국의 현실이 내 삶에 임하게 될 것이고 나라가 임하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22절의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대로 이 세상의 문제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의식을 빼앗아가고자 합니다. 이 문제들에 의식을 빼앗긴다면 믿음은 꺼지고 맙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우선적으로 의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환난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식하는 일은 유전 죄를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어색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색한 일을 통해 믿음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불을 켜는 것입니다. 믿음의 불을 켜면 천국이 현실이 됩니다.
우리는 이 환난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9~30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의식을 빼앗아가고자 하는 세상에 대항하여 십자가를 우선적으로 의식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환난입니다. 이 환난은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할 때에 쉽고 가벼워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배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이 가르침을 의식하고 유지해나가는 것이 곧 믿음에 머무는 것이고 믿음의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천국 현실은 내 삶에 임하게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언제나 의식하며 시선을 떼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항상 믿음에 머물게 하시고 믿음의 불이 켜지게 하셔서 천국 현실이 임하는 기가 막히는 은총을 내 것으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