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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영혼처럼 말과 행동도 구원받아야 한다_태승철 (사도행전 15장 1절~41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7.03|조회수56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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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혼처럼 말과 행동도 구원받아야 한다>의 줄거리:

구원과 의롭게 여김을 받기 위해서만 행위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도 일상 생활 속에서의 모든 행동도 내가 하는 것이라면 구원 밖에 있는 겁니다. 적어도 일상적인 삶이 구원받은 삶이 되기 원한다면 말과 행동으로 구원을 받으려 하는 생각을 버리고, 말과 행동 자체도 마음처럼 구원을 받게 할 것입니다.

 

영혼처럼 말과 행동도 구원받아야 한다

(사도행전 15장 1절~41절)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혼처럼 말과 행동도 구원받아야 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혼처럼 말과 행동도 구원받아야 한다’

본문에는 유대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로 격론이 벌어지게 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받아들여 나와 동일시할 때에 구원받게 됨을 전하고 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교가 완전히 무효화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유대에서 온 사람들은 안디옥교회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1차 전도여행에서 이룬 모든 성과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이방 땅에서 이루어진 구원이 실은 가짜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유대에서 온 사람들 간에 다툼과 변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결론을 내기 위해서라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교인들의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이에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바리새인 중에 믿는 사람들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온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바리새인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여전히 바리새인의 기질이 남아있었고 이에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격론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 논쟁의 결론을 내린 사람은 교회의 수장이었던 사도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네 가지 의견을 제시하는데 29절을 보면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목매어 죽인 짐승을 먹지 말라는 것은 당시에는 짐승을 잡을 때에 목을 매달아 죽이게 되면 피가 살 속에 배이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음행 또한 일반적인 성적인 타락이 아닌 우상숭배 과정 중에 신전 창녀들과의 육체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다 우상을 숭배하는 문화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방에서 나타나던 우상숭배 문화의 특징들을 금한 것은 구원을 위한 조건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베드로 사도와 야고보 장로가 논쟁을 매듭짓고 결론을 내릴 때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외에 다른 조건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상숭배 문화가 지배하던 이방지역의 그리스도인과,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위한 기준은 필요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쌍방이 서로 배려할 수 있는 선을 제시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이방에 있는 교인들을 형제로 받아들일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다만 이방인들은 2000년간 지속되어온 유대종교의 유산이 몸에 배어 있는 유대인들과 같을 수는 없었기에 이들에게서 우상숭배의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우상숭배의 문화권에 젖어있던 이방인 교인들 또한 유대인들에 대한 배려가 요구되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잔재를 벗어버릴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다만 본문은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보다 근원적인 차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와 연관하여 참으로 깜짝 놀랄 정도로 깊은 차원의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이에 대해 하나씩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원이 무엇이냐에 대해 정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연결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구원받아 하나님과의 연결이 이루어졌다면 이제 구원을 이루는 과정이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그릇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이 하나님과의 교집합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삶입니다.

마음의 구조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구원이란 마음의 채워짐입니다. 마음이 채워지면 세상을 향해서 아무런 바람이 생기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본문의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할례와 율법의 준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곧 말과 행동을 통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말과 행동에는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말과 행동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만이 진리에 입각한 오류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마음이 영혼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구원받은 상태에서만 말은 말일 수 있고 행동은 행동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말과 행동으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받은 자로부터 구원받은 말과 구원받은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타락한 상황에서의 구원은 모순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대한 어떤 바람도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재벌총수들이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서도 계속해서 재산을 늘리고자 하는 이유는 돈이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학총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많은 지식을 가지고도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마음 채움의 관점에서 보자면 구원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이 값어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값어치의 구원을 오직 은혜로 받게 되었음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면 더는 마음에서 세상에 대한 바람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재벌총수도 대학총장도 대통령도 바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구원이 없는 타락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말과 행동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만족한 상태에서 말과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족한 상태가 되기 위해 말과 행동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본래 말과 행동이란 구원받은 상태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모순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바라는 바가 없는 구원의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말다운 말이 나오고 합당한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 바라는 바가 많다면 구원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다운 말이 나올 수 없고 제대로 된 행동이 나올 수가 없으니 하는 말과 행동마다 잘못된 것이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은 바라는 바가 없이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하는 말이라야 옳은 말과 옳은 행동이 됩니다. 가정에서 배우자와 대화를 할 때도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명백합니다. 배우자에 대해 바라는 바가 없을 때 비로소 말 같은 말을 할 수 있고 합당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에 대해 바라는 바가 가득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은 말 같지 않은 소리이고 해서는 안 될 행동들뿐입니다. 말이 아니라 허튼 소리이고 거짓말이고 악한 소리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은 타락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물론 비종교인들도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기에 결코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가 본문의 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종교의 유산이 몸에 배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특징이 말과 행동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경향성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될 뿐만 아니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종교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종교의 특징은 말과 행동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과 행동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구원받아야 될 말과 행동으로 영혼을 구원하겠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뜻에 합당한 말과 행동 또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상태에서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온다는 것을 모르고 말과 행동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고 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구원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 사건은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타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말과 행동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을 고수할 때에 구원을 거부하게 됩니다.

 

본문의 논쟁에서 베드로와 야고보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 네 가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멈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과 관련하여 네 가지가 문제시 되고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구원을 위하여 말과 행동을 동원하고자 하였다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한 구원을 등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과 행동의 관계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마음에서 아직도 세상을 향한 바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서 채움거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본래 말과 행동은 구원받은 다음에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상태에서 구원받은 말과 구원받은 행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방문화권에 존재하던 우상숭배에 대한 네 가지를 금하는 요청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제시되는 계명이나 율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일까요?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계명이나 율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수록 믿음이 무엇인가를 파고 들어가면서 정확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구약의 계명과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키라고 제시된 것도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 뜻은 타락한 마음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을 가지고는 율법을 결코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는 타락한 말과 행동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해볼 테면 해보라고 제시하신 것이 율법과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율법과 계명에 어긋나는 역사를 반복하며 그야말로 박살이 났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마음이 구원받은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만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으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구원을 염두에 둘 때 구약의 계명과 율법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세상에 대해 바랄 것이 없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기만 해도 세상에 대해 바랄 것이 없어집니다. 구원을 받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세상을 바라는 것과 다른 점은 이루어짐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바라는 것은 열 개 중에 한 개도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소원하는 만큼 반드시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소원하고 바라는 구원받은 상태에서는 세상에 대해 아무 바람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비로소 구원받은 말과 구원받은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계명과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말다운 말과 행동다운 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타락한 상태의 특징이 몸에 밴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할 일과 내가 할 일을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만 할 일이 있을 뿐 내가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구원받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나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은 구원받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과 하나님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말과 행동 때문에 힘들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은 우리를 불행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내 말과 내 행동이 나를 불행하게 합니다. 타락한 내가 말 한마디를 하고 행동 하나를 할 때마다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은 무효화 되는 중입니다. 그리고 삶은 지옥의 예고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나는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행동하시기 위하여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당부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 머물러 있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본문에서는 할례와 율법이 등장하지만 개신교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수주일입니다. 성수주일은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을 세상에서 살다가 일요일 주일에 예배당에 가서 공중(公衆)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 또한 성수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배웠고 그렇게 가르쳤던 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예배당에서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생각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러나 믿음에 머무는 것은 성수주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의식으로 밝히 보는 것이 바로 믿음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지적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의식하는 동안에 구원을 받고 받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도 진행됩니다. 그러나 현재 개신교에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예배당에 나와서 성수주일을 하지 않으면 신앙에서 이탈한 것이고 멸망의 길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렇게 배워왔고 평생을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성수주일은 깨뜨리기 힘든 고정관념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문에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는 구원받지 못하는 말과 행동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착각이 깔려있습니다. 이 착각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성수주일이 아니고 성수매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고자 한다면 주일에만 할 것이 아니라 매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지 지켜져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성수주일은 그 본연의 의미를 잃고 행동을 앞세우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모든 계명과 율법, 신약의 산상수훈이나 많은 명령형의 말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의식으로 밝히 보는 상태가 유지될 때에 이것이 어떻게 지켜지는가를 체험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하는 동안에는 마음이 율법과 계명에서 어긋나는 방향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율법과 계명이 지켜지는 방향으로 점차적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식하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해갑니다. 말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삶이 변합니다. 나는 완벽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바라봄이 유지된다면 모든 것이 완벽을 향해 움직여가게 됨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말과 행동은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무효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를 강요한 자들은 바리새인 중에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어느 틈엔가 다시 바리새인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는 일에 주력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럴 때만 말도 행동도 삶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식에서 지워버린다면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구원을 잃어버리고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구원을 위해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를 강요하였듯이 형식적 성수주일과 예배당에 대한 충성 봉사를 강요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꼭 신앙과 관계된 말과 행동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의 말과 행동도 문제가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마음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우리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어갑니다. 그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순간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끊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붙잡고 유지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말과 행동은 점차적으로 완벽을 향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완벽하고자 해서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기 시작하는 말과 행동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구원을 받아 이 세상에 대한 바람이 없어지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라고 묻지 않아도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점점 교집합을 이루게 되면서 온전한 말과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구원받은 자를 불행하게 할 요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상황이 여러분을 불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의식으로 밝히 보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며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구원받은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따라서 하늘에서는 하나님과 내 마음의 교집합이 커져 가며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복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 상태에서는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을 하든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어차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지 않는 상태에서 나오는 말은 말같지도 않는 말이며, 행동은 사기꾼의 거짓된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말과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유익입니다. 오늘도 의식으로 십자가를 밝히 보는 가운데 말하고 행동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한 가지 소원을 간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고 어떤 상황을 대하든지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밝히 보는 상태가 유지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지게 하시고, 이 땅에서 나타나는 말과 행동은 오직 하나님의 소리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장갑으로 쓰임 받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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