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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모든 사람 각자에게 맞춤형 인간관계_태승철 (사도행전 16: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7.07|조회수7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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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모든 사람 각자에게 맞춤형 인간관계>의 줄거리: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모든 사람 각자에게 맞춤형 인간관계를 할 수 있을까요? 각양각색의 외모와 성격과 태도와 습관과 신분과 출신과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하나에 맞춤형 인간관계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그러나 십자가 일이관지하기로 양복점이나 양장점에서 의복 맞추듯이 그렇게 인간관계를 맞춤형으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 각자에게 맞춤형 인간관계

(사도행전 16:1~5)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모든 사람 각자에게 맞춤형 인간관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모든 사람 각자에게 맞춤형 인간관계’

본문을 언뜻 보면 인간관계라는 주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바나바와 결별하고 실라를 대동하여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합니다. 1차 전도여행의 이동경로가 시계방향으로 진행되었다면 2차 전도여행은 시계반대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지중해 동쪽 해안선의 모습을 보면 ⊃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습니다. 여기서 오른쪽 윗부분이 수리아 안디옥이 위치한 곳입니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터키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터키 지역의 서쪽을 아시아라 부르고 있습니다. 에게해를 지나서 지금의 그리스반도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1차 전도여행과 2차 전도여행은 경로가 반대입니다. 1차 전도여행 때에는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지중해의 구브로 섬에 가서 전도를 한 후에 지금의 터키 남쪽 지역들로 향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와 같은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에서는 바닷길을 따르지 않고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육로를 따라 터키 본토 쪽으로 들어간 후에 항해하여 되돌아오게 됩니다. 따라서 2차 전도여행에서는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경유지였던 더베와 루스드라 지역을 우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라는 젊은 청년을 만나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굉장히 아끼며 2차 전도여행에 동행시키게 됩니다. 루스드라까지 올 때는 실라가 함께 했지만 이후부터는 디모데가 함께 합니다. 그런데 여행의 시작에서 다 큰 청년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이제까지의 바울의 태도를 염두에 두면 이러한 모습은 다소 의아합니다. 바로 앞에서 바나바와 결별할 때도 할례파로 유대교의 전통을 중시했던 것은 마가 요한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전통을 아름답게 여기며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마가 요한의 사상을 반대하였고 2차 전도여행에 동행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디모데에 대해서는 유대교 전통의 가장 대표적인 의식인 할례를 행합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싶은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이 부분은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고 실은 무척 간단한 내용입니다. 디모데에게 행한 할례는 구원을 위한 장치가 아닙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루스드라에 사는 사람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경건한 삶을 살았고 사도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 복음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감탄하여 2차 전도여행에 동참시키고자 하였고 그 첫 과정으로 할례를 주게 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각지에 퍼져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복음 사건을 전도할 때에 유대인들을 피해가며 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을 우대하고 유대인들을 기피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동족인 유대인도 복음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지만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인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에 헬라인 아버지를 둔 디모데의 출신성분이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들어보기도 전에 이방인과 어울리는 자들이라는 이유로 거부해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의 기회조차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굳이 디모데에게 전통적 관례를 따라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유대인의 길을 선택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방지역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쓸데없는 반감이 조성되는 것을 막고 복음전파의 기회를 확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할례파 교인들처럼 구원과 유대교의 전통을 연결시켰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이 “모든 사람 각자에게 맞춤형 인간관계”라는 제목과 연관이 됩니다. 이방지역에 살고 있는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본문에서는 선교에 대한 전략적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다만 본문이 정말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복음전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전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하여 언제 어디서든 유대인들을 고려하여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던 사도 바울의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에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하나의 이치로 만사를 꿰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단 하나의 이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사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이치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인간관계에 대한 십자가 일이관지의 적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십자가로 일이관지할 때에 모든 사람에 대해 맞춤형 인간관계를 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십자가가 기준이 되며, 나를 싫어하는 원수와의 관계에서도 십자가는 기준이 됩니다. 배우자나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식이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동안에 마주하는 사람에게 맞추어진 가장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맞춤형 인간관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해야 될 말과 행동만을 하고, 하지 않아야 될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인간관계처럼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거부할 필요도 없고 가장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으니 인간관계는 항상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나와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고치의 유익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곧 인간관계라고 해도 될 만큼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생김새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각양각색의 인간관계를 맞춤형으로 해나갈 수 있다면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가장 큰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로 일이관지해나가는 것임을 본문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마음가짐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는 중에 마음은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구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에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도움을 구걸할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바울과 같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나로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며 온전한 마음의 충족을 누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19절 하반부를 보면 이러한 사도 바울이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종의 특징은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에 참견이나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종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이어지는 20절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뛰어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서 얼마든지 판단하고 지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잘잘못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는 별명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기와 똑같이 행동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세리와 창기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 대해서 얼마든지 비판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0절 하반부로부터 22절까지 같은 내용이 이어집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 자 함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이 다양하였으나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듯 단 한 마디의 비판적인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종의 입장을 취한 이유가 22~23절에 등장합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만남이 이루어져야 되기에 그들의 입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 사건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바울의 행동은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약점이라도 잡힌 것 같습니다.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보여야 할 당당한 삶의 모습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사람에게 매달릴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으나 단지 복음을 전하겠다는 한 가지 이유에서 종의 마음가짐을 자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축복과 은혜에 감격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이 복음에 참여시키고자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됩니다. 내가 마주하는 사람에게 상상도 하지 못하는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 비판하지 않고 이해하고자 하는 모습이 마치 약점이라도 잡힌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내게 반감을 갖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한 후에 나를 뿌리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복음을 전할 기회는 주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있는 자와 율법 없는 자와 약한 자처럼 되었습니다. 이래서 마음에 들고 저래서 마음에 안 든다는 기준 자체를 완전히 제거하고 만남을 가졌던 것입니다. 나에게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준이 제거될 때에 남는 것은 마주하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을 만날 때를 대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일이관지와 관련하여 공자의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였던 증자는 스승이 일이관지하던 이치를 충(忠)과 서(恕)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을 본문과 관련하여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충성 충(忠)이라는 한자를 보면 가운데 중(中)에 마음 심(心)이 있습니다. 충은 곧 가운데 마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어떤 위치에서 보아도 중앙에 위치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 공간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충은 곧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에 공평하게 대할 수 있는 자리에 마음을 둔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공평하다는 것은 단순히 똑같은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관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전철에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한다면 노약자석이나 임산부석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주어진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불공평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처지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진짜 공평한 대우를 위하여 노약자석이나 임산부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자가 이치로 삼았던 마음을 가운데 두는 충의 의미입니다. 경천사상을 주장한 공자에게 있어서 마음을 둘 장소는 바로 하늘이었습니다.

이 경천사상으로부터 서(恕)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서(恕)를 보면 같을 여(如)에 마음 심(心)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같을 여(如)를 보면 여자 여(女)에 입 구(口)를 쓰고 있습니다. 그 옛날에 가부장적인 사회구조에서 남자가 하는 말에 여자가 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같을 여(如)라는 글자가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것은 현대사회에서는 통용되기 어려운 기준입니다. 다만 똑같이 따른다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마음 심(心)이 붙어서 용서할 서(恕)가 됩니다. 즉, 용서는 마음의 같음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돈을 떼어먹고 갚지 않았습니다. 증자의 생각에 따르자면 돈을 빌려줄 때의 마음과 돈을 떼였을 때의 마음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게 피해를 주는 원수가 나타났어도 나의 마음이 평소와 다르지 않게 유지되는 것이야말로 원수를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용서라는 것은 그 근원을 생각하면 단순히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사람이 어떻다는 기준을 제거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은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돌로 치지 않을 때나 돌로 칠 때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동일했습니다. 돌로 치기 전에는 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가, 돌로 칠 때는 못된 놈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외형적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용서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6장 37절에서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용서란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잘못하지 않은 사람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증자는 겉으로 드러난 신분이나 배경이나 성격 등을 가지고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을 갖지 않는 마음의 자리를 충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마음을 가운데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가 하늘입니다. 하늘에 마음을 둔 사람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공평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경천사상입니다. 다만 공자는 하나님을 몰랐기에 그 사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지 않았기에 경천사상으로서의 하늘이 무엇인지를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복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일이관지의 삶을 살 수 없다면 오히려 창피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관지라는 말은 공자가 했지만 진짜 일이관지의 주인공들은 우리가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하나의 이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선교적인 맥락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칭찬을 듣더라도 기뻐할 일이 아니며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비난할 일이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상태에서만 사람에 대해 어떠한 기준도 적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주하는 사람에 대해 맞춤형으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준비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으로 판단기준을 삼아 인간관계를 해나가고자 했습니다. 상대방의 외모와 차림새와 말과 행동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그것은 곧 나의 마음이 먹히고 지배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나도 좋아했고,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나도 싫어했습니다. 타인의 반응에 의해 나의 마음이 지배당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는 결코 온전한 것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답지 못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시받지 못한 공자조차도 이것이 제대로 된 인간관계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참 진리이자 하나의 이치로써 받아들인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든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그 사람에 대하여 가장 합당하고 공평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준비는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준비가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람에 대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이방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에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답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에 대해 상관치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할례를 중시했습니다. 적어도 이러한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은 제시되어야 했기에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선교의 맥락에서만 교훈을 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단 하나의 이치로 삼는 일이관지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맞춤형의 인간관계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타인을 따르고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타인에게 맞추어주는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맞춤형 인간관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중에는 이것이 최고의 유익을 위한 말과 행동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받아들이든지 받아들이지 않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맞춤형의 인간관계를 해나가는 것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습성을 따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대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치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타인에게 적용할 수 있는 어떠한 판단기준도 없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나를 욕할지라도 그 사람을 나쁘게 여길 수 있는 기준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립니다. 나를 칭찬할지라도 그 사람을 좋다고 여길 수 있는 기준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도 모진 말을 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나를 욕하고 괴롭히는데도 축복의 말을 해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맞춤형 인간관계를 해나갈 수 있는 비결이고,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이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부터 십자가 일이관지를 통하여 인간관계가 재미있고 신나게 하시며 또한 나를 대하는 사람에게도 최선의 유익을 가져다주는 맞춤형 인간관계를 해나가는 기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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