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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가 내 생애 인물관계도를 바꾼다>의 줄거리:
내가 생활화하는 즉 내가 그것으로 일이관지하는 십자가가 내 생애의 인물관계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항상, 쉬지 않고,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밝히 바라 봄을 일관되게 유지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인간관계를 관리하고 통제하시면서 만남과 만남 뒤에 있는 관계 맺음의 여부를 또한 주관하십니다.
십자가가 내 생애 인물관계도를 바꾼다
(사도행전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가 내 생애 인물관계도를 바꾼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가 내 생애 인물관계도를 바꾼다’.
십자가 생활화는 십자가로 만사를 꿰는 일이관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내 생애의 인물관계도는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 이전에 존재하던 모든 인간관계 판도를 바꾸는 지형변화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이 이루어질 때 나타나는 인간관계의 변화는 다양합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거나 멀어지게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관계에 대해서는 유지되지만 성격과 질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혈연관계입니다. 끊어내고 싶어도 끊어낼 수가 없는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이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면 혈연관계조차도 기존과는 전혀 다른 성격과 질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정 내에 불화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결혼에 실패한 사람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봄을 일관하기 시작하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부족하게만 느껴지던 배우자가 축복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 아내이고 남편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서 대하게 됩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늘 화를 내던 부모가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이 되면 자녀에 대해 측은지심이 생겨납니다. 자녀에게도 세상적인 기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녀에게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코 관계를 맺지 말아야 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잘못된 관계 맺기의 방식에 매여 평생을 소모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없는 인간관계와 관계 맺기의 방식은 우리의 삶에 조금도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평생을 속박하는 사슬이자 멍에가 됩니다. 삶이란 결국 인간관계입니다. 이 인간관계가 모조리 속박하는 사슬이고 멍에라면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과 디모데를 통해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서로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의 현실감을 강화시켜주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이들의 삶은 마치 하나님이라는 지휘자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와 조화의 다양한 형태의 중주와 교향곡이 됩니다. 이러한 삶은 바울과 디모데에게만 허락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밝히 보는 일에 집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애의 인물관계도를 새로 써 내려가실 것입니다. 맺어야 할 관계를 맺게 하시고, 맺지 말아야 할 관계는 끊게 하실 것이며, 끊어질 수 없는 관계라면 관계의 방식과 성격과 질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이토록 십자가의 잠재력은 엄청납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본문에서 참 특이한 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6절을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당시에 아시아라 불렸던 지역은 현재의 터키 서쪽에 있는 지방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바울 일행은 아시아를 떠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거쳐 무시아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터키 북쪽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몰리다시피 하여 도착했던 무시아는 터키의 서쪽 끝으로써 에게해 연안이었습니다. 에게해를 넘어가면 바로 남쪽에는 그리스와 북쪽으로 마게도냐가 있던 발칸반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6~10절 사이에서 성령님과 예수님과 하나님이 모두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경로를 보면 수리아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길리기아 지방이 나옵니다. 길리기아지방은 바울의 고향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지점이었던 더베와 루스드라가 나옵니다. 본래 바울 일행이 계획했던 것은 아시아 지방의 선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막으셨고 아시아를 통과하여 더 서쪽으로 이동해 무시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시아에 이르러서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더 북쪽인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리하여 바울 일행은 에게해에 인접한 항구도시인 드로아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곳에서 마게도냐 사람이 도움을 구하는 환상을 보게 되고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따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2차 전도여행은 드로아에서 에게해를 건너 발칸반도로 넘어가 마게도냐를 향하는 형태로 진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보면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울 일행과 동행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가는 길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같이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서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던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아시아 선교에 대해서는 성령이 막으시고, 비두니아 선교에 대해서는 예수의 영이 막으시는데, 마게도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들을 사람들에게 차별을 두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누가가 굳이 이런 기록을 남긴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먼저 2차 전도여행 팀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차 전도여행에서 언급되는 인물은 사도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입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만을 밝히 보던 자들이었습니다. 밝히 본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또렷하게 보는 것을 지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의식할 때에 나타나는 일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있음을 강하게 느낍니다.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있음을 우선적으로 느끼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보물이심을 확신하며 소원하는 상태가 됩니다. 몸은 땅에 있지만 마음은 천국 현실감으로 충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전도하기에 준비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외모에 대해 작동하는 판단기준이나 편견이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란 생김새, 차림새, 속한 나라, 민족과 종족, 신분, 집안 배경, 재산과 지식의 유무, 각종 능력, 말과 행동 등을 비롯한 외적인 요인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외적 요인을 가지고 호불호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사람도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가장 좋아하고 자랑할 수 있는 대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로 일이관지하는 삶의 효용을 느끼는 자로서 십자가가 가장 귀중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설령 십자가에 대한 언급을 한마디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맞춤형 인간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이나 타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본문의 강조점이 나타납니다. 십자가로 일이관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없기에 그로부터 좋아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외모에 대한 판단이 사라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뜻과 지혜를 따라 말과 행동을 할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일이관지할 수 없다면 타인에게 마음을 열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의 기준과 기호를 따라 사람을 가리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일이관지함으로써 판단을 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타인에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만날 사람을 가려내십니다. 이전에는 스스로 만날 사람을 가렸습니다. 내 기준에서 유익이 되면 보듬고 유익이 안 되면 내쳤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일이관지하는 삶이 유지될 때에는 이러한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열린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말하고 행동하고자 하게 됩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철두철미하게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가려내기 시작하십니다.
인적이 없는 허허벌판에서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무서울 것입니다. 대도시의 어두운 밤 골목에서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또한 무서울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우연히 마주해서는 안 되는 사람과 마주치는 일은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만남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결혼해서도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만을 붙잡고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간관계는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내가 만나야 될 사람을 가려내십니다. 내가 누구를 만났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일행을 아시아로도 가지 못하게 하시고 비두니아로도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바울 일행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도 지나쳐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시아나 비두니아에 전도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직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아시아 지역에도 에베소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누가가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관계도를 바꾸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통제하셔서 만나게 하시는 사람에게 복음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집사람의 사촌이 자녀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집이 부유하여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많이 사주곤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준 물건이 자꾸 없어지기에 아들에게 물으니 친구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보고 부러워하면 그냥 줘버린다는 것입니다. 잘 쓰라고 사준 부모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마음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좋다는 것을 알기에 십자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나누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나누어줄 대상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인간관계는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만나게 하시는 사람만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다만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심한 박해를 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궁금증이 생기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사람에게서 긍정적인 결과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만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루스드라에서 또한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던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사금을 채취하는 모습과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사금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모래흙을 걸러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사람 중에는 나를 박대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이유가 없는 만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박해를 받아서 이고니온으로 갔고, 이고니온에서도 박해를 받아 루스드라로 가게 되었으며, 루스드라에서도 박해를 받아서 더베로 가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박해는 오히려 이동을 위한 추진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통제하에서 만남은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다만 그 만남 중에서 박해와 같은 일을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없는 만남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붙잡고 있는 자들에게서 이루시는 역사를 보면 마치 기존의 인물관계도를 정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로 일이관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만큼 하나님이 내 생애의 주인이 되셔서 계획을 펼쳐나가시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에 필요 없는 모든 관계를 제거해나가기 시작하십니다. 이어져 나가야 할 관계가 있다면 그 관계가 기존과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도록 뒤집어엎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 관계의 변화를 위해 우리가 따로 노력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인물관계도를 바꾸어 가시는 일은 하나님이 해나가실 것입니다. 십자가로 일이관지하는 삶을 시작했다면 세상에 대해 죽듯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죽어야만 합니다. 끊어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변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온전히 붙잡을 수 없다면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계획 속에 없는 일들로 인해 인간관계는 속박하는 사슬이자 멍에가 됩니다. 인간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의 중요성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빚으시고 하와를 이끌어서 아담에게로 데려가십니다.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이 알아서 만나도록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사람이 환대하든 적대하든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적대함이 내 생애에서 일어날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추진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린 것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긍정적인 일들이 일어난다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처럼 둘이 만나면 이중주가 되고 셋이 만나면 삼중주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모두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면 오중주로 하나님의 뜻을 연주해가는 것입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면 합주단이 되고 교향악단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지휘자는 언제나 하나님 한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졸업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졸업하는 것이야말로 인간관계의 달인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하나를 바라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자녀인 우리가 만날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관계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에 그 사람이 잘 대해주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 사람에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판단과 선입견에 대해서 무조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나처럼 십자가로 일이관지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인간관계의 방식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십자가를 바라봄은 의식적이어야 하고 의도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마주하는 사람의 외적인 요인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그 사람도 십자가로 일이관지의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가르쳐주시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없는 관계라면 끊어내실 것입니다. 필요하고 이어질 관계라면 관계의 성격과 질을 바꾸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와의 만남처럼 똑같이 십자가로 일이관지해나가는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을 새로운 인물관계도의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지휘를 따라 연주하는 이중주가 되고 삼중주가 되고 오중주가 되고 합주단의 합주곡이 되고 교향악단의 교향곡이 되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휘 아래 교향곡을 연주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로 일이관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끊어야 될 관계는 끊으실 것이고, 변해야 될 관계는 변하게 하실 것이며, 새롭게 맺어져야 할 관계는 맺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신 사랑의 계획이 관계의 영역 속에서 온전히 충족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하나를 바라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관계의 지형도를 새롭게 쓰실 수 있도록 모든 주권을 넘겨드립니다. 만나야 될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끊어야 될 사람이라면 끊게 하시고, 관계의 성격이 바뀌어야 될 사람에게는 바뀐 관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비하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감격과 즐거움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들로 인하여 나의 천국현실감이 강화되고 나로 인하여 그들의 천국현실감이 강화되는 형제자매의 관계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