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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대부분 환대는 적대와 다를 바가 없다>의 줄거리:
나와 타인의 만남에 대해서, 초점을 내가 타인에게 행하는 부분에 맞추지 말고 타인이 나에게 행하는 부분으로 옮겨 봅니다. 이럴 때 십자가 일이관지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가 바로 '환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타인의 환대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도 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대부분 환대는 적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 환대는 적대와 다를 바가 없다
(사도행전 16:11~15)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대부분 환대는 적대와 다를 바가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대부분 환대는 적대와 다를 바가 없다’
요새 우리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오고 있습니다. 선교나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얼굴을 마주대하는 만남입니다. 그리고 만남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서 선교와 전도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만남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주제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밝히 보면서 사람을 상대할 때는 천국현실감을 갖게 됩니다. 천국현실감 안에서는 타인의 외모에 대한 선입견은 사라지게 됩니다. 어떤 외모의 사람일지라도 그를 향한 거부감이나 미움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모란 생김새나 차림새, 사회적 신분과 성격, 말과 행동 등의 모든 외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을 환영하게 되는 상태가 되고 그 사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나에게 있는 것으로 남을 돕고자 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예수님을 주고 싶어 하고 은과 금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 말과 행동을 하며 인간관계를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준비되었어도 만남을 가져야 할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관리하시고 통제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남과 만남을 기초로 하는 모든 관계를 주관해 가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인간관계에 대한 초점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상대방이 나를 대할 때에 하나님의 주관하심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만남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볼 수 있듯이, 나의 외모 또한 상대방에게 노출됩니다. 이때 상대방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나름의 기준을 통해 좋고 나쁨을 판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대처하고 받아들여야 할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적대시하거나 거부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오히려 대처는 간단합니다.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면서 상대에 대한 미움을 갖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나를 적대시했다고 해서 마음에 미움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밝히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며 일이관지할 수 있다면 상대방 또한 십자가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상대방과 관련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해나가실 것이니 덧붙일 내용이 달리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나를 환대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나를 환대하는 사람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누군가에게 환대를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는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도 좋은 환대가 있지만 반대로 절대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환대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환대는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환대입니다. 사람들이 내게 마음을 열고 잘 대해주고자 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환대하고 칭찬하고 인정해줌에 취하게 된다면 십자가 생활화는 멈추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내가 누군가를 마주할 때는 상대도 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때 상대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나의 외모에 기준을 두고 환대나 거부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상대의 외모로 인해 환대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상대방이 외모로 환대하거나 거부할 때에도 반응할 수는 없습니다. 나를 환대하는 이유가 생김새나 차림새나 신분이나 사회적 능력과 같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외모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인간관계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환대나 우호적인 분위기에 대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환대에 목마르고 인정을 기대하는 것은 십자가를 밝히 봄에 있어서 강력한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에 어떻게 환대받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환대와 인정이 나의 외모로 인한 것이라면 절대로 그리스도인다운 당당함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울 수 없다면 하나님에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말과 행동은 세상을 향해 굽어지기 마련입니다. 상대로부터 환대와 인정을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밝히 보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것을 이유로 나를 환영하는 것은 세상이 아닌 하늘에서 하나님과 천군천사들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환대와 인정을 기대하며 만족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거룩한 하늘이 나를 환대하고 인정하는 일은 세상과 다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는 것 하나만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사건이 거지 나사로의 비유이며 욥의 시련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모든 환대와 칭찬과 인정과 수용이 사라진 상태에서 전적으로 하늘로부터만 환영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제시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는 것보다 환대하고 인정해주는 것이 무서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하늘을 대체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환대와 인정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향할 수 없게 만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도 되는 환대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경우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난 환대가 아닌 세상적인 기준에 의한 외모의 판단으로 이루어진 환대라면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환대나 인정을 기대해서도 안 될 것이며 실제로 그렇게 된다고 해서 반응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받아들여도 되는 환대가 나타나는 오늘 본문의 주제는 환대를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 외에는 어떤 환대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살펴보게 될 내용 또한 이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거나 존경하여 가까이하고자 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가 제시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루디아의 경우에 대해 집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2차 전도여행의 행선지를 바꾸게 하신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은 아시아에서 선교를 막으시고 예수의 영은 비두니아에서의 선교를 막으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에게해에 인접한 드로아로 진행하였고 그곳에서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마게도냐 선교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문의 내용이 시작됩니다. 바울 일행은 약 250km를 항해하여 발칸반도의 네압볼리 항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진행하여 마게도냐의 첫 번째 도시인 빌립보에 도착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 사람은 두아디라 도시에서 자색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입니다. 당시 두아디라는 터키의 서쪽에 위치하여 금속세공업이나 염색 및 직조 공업이 굉장히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동시에 신전에서 이루어지던 성적으로 문란한 우상숭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의류 공업이 발전했으니 상인들도 많았고 자연스레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만든 자색 옷감을 빌립보에 수입하여 판매하던 무역상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안식일이 되어 기도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방지역이라도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는 으레 회당이 있었습니다. 다시 규정으로 남자 10명 이상이 되면 회당을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건물이 허름하더라도 회당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빌립보에서는 수소문해도 회당을 찾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이 없는 경우에는 강가를 찾아 기도를 했기에, 바울 일행 또한 성 밖에 있는 강가에 나와서 기도를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유대교를 믿는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역사적 배경이 존재합니다. 당시의 황제였던 글라우디오는 로마로부터 유대인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었는데, 그 결과 다른 도시에서도 유대인들을 축출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떠나고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로 전향한 사람들 중에 여자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 옷감 무역상이었던 루디아가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루디아에 대해 하나님을 섬겼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여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고 말씀을 듣던 루디아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본문 14절 하반부를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말씀을 전했는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그 예수님과 연합할 때에 마음이 하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하늘에 이를 때에 말로만 섬기던 하나님을 실제로 나의 하나님으로 가질 수 있게 됨에 대해 전했을 것이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며 살게 될 때 이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복음의 골자를 전했을 것입니다.
루디아가 이 말씀을 들을 때 주께서 마음을 열게 하셨고 바울의 말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이러한 변화가 한순간에 일어났는지 반복하여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루디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밝히 보며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보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루디아는 자색 옷감 무역상이었으므로 나름대로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도록 권합니다. 본문 15절에서 이 장면을 보면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강권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한 것을 보면 바울 일행이 처음에는 루디아의 요청을 사양했으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루디아는 이러한 바울 일행에 대해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이라며 사양할 수 없는 권유를 합니다. 만약 오지 않는다면 나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이러한 강권에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루디아의 집에서 머물게 됩니다.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의 전도는 유럽 전체의 전도에 대한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전도를 받은 대상으로 기록되고 있는 무역상 루디아의 기록은 참 특별합니다. 학자들은 루디아의 집으로부터 유럽의 첫 번째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루디아의 환대를 사도 바울이 받아들인 것으로부터 유럽의 첫 번째 교회의 시작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만남이 환대를 하고 환대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앞서 환대의 위험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루디아의 환대가 교회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은 이 환대는 세상의 환대와는 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디아가 바울 일행을 환대한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환대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목에서 “대부분 환대는 적대와 다를 바가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루디아의 환대 방식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고 하였습니다. 섬긴다는 단어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재물을 최고로 좋아하고 재물을 많이 갖고자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좋아하고 하나님을 많이 갖고자 소원하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무역상으로서 재물을 섬기기 쉬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대교를 받아들여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유대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종교로 변질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유대교를 받아들인 루디아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물을 잘 벌게 해주는 종교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용케도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서는 하나님을 최고로 좋은 가치로 여기고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루디아에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전하자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이 소원하던 하나님을 실제로 갖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본보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소원 또한 루디아의 소원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많이 벌고 싶고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질 수 있는 소원입니다. 그리고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밝히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새 지속적으로 말씀드리고 있는 십자가 일이관지의 삶입니다. 루디아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무역상이었던 루디아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듯이 하나님을 벌어 하나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지 못하던 중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활동하는 동안 자기 집에 머물도록 권유하고 바울 일행 또한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유럽에서의 선교가 막을 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타인이 베푸는 환대를 받아들이는 기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의 환대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환대입니다.
이외의 환대는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세상의 기준에서 나의 외모를 보고 이루어지는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외모를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많이 갖는 것을 소원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기준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나의 외모를 보고 좋아하고 존경하고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환대에 대해서는 적대시와 똑같은 취급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적대시하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소리를 치고 행패를 부려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음에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대를 받아들이고 기쁨으로 삼는다면 그 즉시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됩니다. 나의 외모를 근거로 삼는 환대는 나에게도 독이 되고 상대에게도 독이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환대입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이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을 공유하는 자들의 환대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공유하지 않는 자가 나를 환대할지라도 그것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독약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이루어지는 환대와 존경과 인정에 맛들이고 기대하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끝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전혀 살 수 없게 되므로 졸렬한 비겁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소원하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환대 외의 모든 환대를 적대시하고 쳐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에 자주 듣던 이야기가 교단 내의 정치활동에 대한 것입니다. 노회를 보면 정치하는 장로님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의 큰 관심 중의 하나는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 찾기입니다. 부목사들 중에서 스타 목사감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 담임 목사 자리가 비었다고 하면 소개도 해주면서 세력을 만들어갑니다. 괜찮은 목사들과의 연줄을 통해서 교단 내의 정치세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서 취임을 한 목사님들이 예배당에서 환대를 받으면 그 이유는 외모입니다. 교인들은 생김새, 차림새, 학력, 경력을 보고 새로 취임한 목사를 평가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차원에서의 외모를 기준으로 삼아 목사에 대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취임에는 장로님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형식으로 기도를 한다지만 결국 당회의 결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설교도 시켜보지만 결국 외모에 치중한 기준으로 평가를 내립니다. 교인들은 이러한 환대를 통해 목사를 데려오고, 목사는 환대를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초청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목회는 시작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가 환대를 받기 위한 거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목사가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환대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당회의 장로님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나에게 거부반응을 느끼지 않을 것인가?”가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예배당은 교회가 아니며 결과적으로 예배당 자체도 망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교계에서 이러한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의 어떠한 특징이든지 나 자신에게 근거를 둔 칭찬, 존경, 환대는 무조건 막고 피해야 하는 독입니다. 나를 환대한다고 내 편이 아니고 나를 적대시한다고 적인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늘에서 환대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대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공유하는 사람으로부터의 환대입니다. 오늘은 상대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를 드리고 있지만 나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면 나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상대를 환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하나님을 갖기 위한 유일한 길로 예수님을 붙잡고 있을 때 타인에게 할 수 있는 환대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됩니다. 실제로 환대가 받아들여지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환대는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타인의 환대를 받아들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디아가 제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환대가 아니라면 어떠한 환대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심으로써 타인에 대해서는 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한 염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도 역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만을 당당하게 행해가는 인간관계의 장군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타인의 환대에 대해 취약하였음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른 환영과 인정을 즐기고 반응하는 동안에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님을 다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인의 환대에 목말라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이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볼 수 있게 해주시고, 타인의 반응과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하셔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