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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믿고서 잘돼본 적 없는 이유>의 줄거리:
예수 믿음이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잘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 믿고 나서 이 세상에서 일이나 상황이 더 잘 된다고 느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잘 믿어서가 아니라 전혀 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난 뒤로는 정말 사이다 마시듯 세상일이 잘 된다거나 반대로 안 된다는 답답한 느낌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예수 믿고서 잘돼본 적 없는 이유
(사도행전 16:16~24)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믿고서 잘 돼본 적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믿고서 잘 돼본 적 없는 이유’
본문에서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은 부부라고 여겨집니다. 이들은 바울과 실라가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 점을 치지 못하게 된 것을 두고 고발하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심히 많이 친 후에 감옥에 가두고 발을 차꼬에 채웠습니다.
제목만을 보자면 예수 믿고서 잘 돼본 적 없는 이유를 찾아서 고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문제점을 찾아서 반성하고 해결하고 고치면 이제 잘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본문과 연관해서 살펴보자면 제목의 의미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예수 믿고서 잘 돼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이 봐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봐주시지 않았다면 오히려 세상에서 잘 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봐주시고 배려해주신 덕분에 예수 믿은 뒤로 잘 돼본 적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혹시 세상에서 하는 일들이 잘 풀리고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멀리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제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된다는 말의 정의를 정확히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일반적으로 잘된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가치를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상황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가치들을 많이 가질 때에 마음은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가 쌓여서 높아지는 만큼 사람들은 우러러보고 부러워하게 됩니다. 세상의 가치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가치를 가진 사람을 환대하고 친해지고자 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잘된다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고서 이렇게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고 부러움을 받을만한 잘된 일이 없습니다. 대체 예수를 믿고 잘 돼본 적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예수님을 통해서 사이다 마시듯 속 시원하게 풀려가기를 기대합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일이 순조롭게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는 바람에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최고로 잘된 일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최고로 잘된 일은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는다면 잘돼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잘된 사람입니다.
예수 믿음이 가장 잘된 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잘된다는 것은 진정한 가치를 원하는 만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의식에서 밝히 봄이 유지되면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을 담기 위해 지음 받은 공백으로써 즉 영혼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되면 부활과 승천에도 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에 내 마음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창조주이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나도 하나가 되고자 소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 의미에서의 잘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이보다 더 큰 잘됨은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잘된다는 것은 원하는 만큼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치가 진짜 좋은 가치냐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좋지 않은 가치를 좋은 줄로만 알고 원하는 만큼 얻었다면 잘된 것이 아니라 속은 것입니다. 허탕을 치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좋은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대상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 외의 대상들은 모두 일시적인 채움을 제공할 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채워진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은 다시 공허해지고 맙니다.
공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진정한 잘됨이란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갖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 안으로 들여보내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것보다 더 잘될 수는 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의식으로 밝히 보고 계시다면 이미 가장 잘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보다 더 잘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최고의 합격이고 최고의 승진입니다. 하늘에 올라간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소원은 세상의 소원과는 다릅니다. 소원하는 대로 백발백중 다 이루어지게 됩니다. 소원하는 만큼 하나님을 가지는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고로 잘됨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신앙인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잘되기 위한 여정이 출발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을 이 세상에서 잘되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거나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최고로 생각할지라도 세상에서 잘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 세상일이 술술 풀리고 세상의 가치를 많이 갖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에서 최고로 잘된 일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우리가 하나님을 소원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을 소원하도록 속입니다. 예수 믿었으면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넣어줍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대하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귀신의 역사입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의식으로 밝히 보는 상태를 틀어막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고의 일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입니다. 귀신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일이 잘되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100kg의 황금을 100kg의 납덩이와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비유가 와 닿지 않으신다면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 끼 수제비 때문에 10kg 최고급 한우갈비 세트를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결혼을 잘해서 행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 결혼을 해서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상 결혼을 가장 잘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 결혼은 수제비 한 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다면 이미 최고급 한우갈비 세트를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혼을 잘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수제비와 한우갈비 세트를 바꾸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 자체가 가장 잘된 것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세상에서 원하는 일들이 잘 풀려가는 것을 주권적으로 막고 계신 것입니다. 이 잘됨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가장 잘됐다면 그 상태가 유지되면 됩니다. 새롭게 더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 일은 가장 잘된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일이 가장 잘된 일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바라봄이 유지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외에는 다른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도 없으며 세상의 일들이 어떻게 풀려가든 그것은 잘됨이나 못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삶은 새롭게 잘되거나 잘못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이미 최고로 잘되었기에 그 상태를 유지해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 자신에 대한 일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핵심이 되는 내용은 사도 바울의 괴로움입니다. 18절을 보면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이 본문의 주제가 됩니다. 우리 또한 사도 바울과 같은 괴로움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이란 단순한 슬픔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괴로움은 최고의 상태인 하늘로부터 마음을 떨어지도록 밀어붙이는 세상의 압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괴로움을 배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의 반응은 의아합니다. 다시 18절을 보면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심히 괴로워하였다는 헬라어 원문을 보면 디아포네데이스(διαπονηθεὶς)로 직역하면 철저하게 고통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 속속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였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7절을 보면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과 실라에 대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침은 여러 날을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바울이 이러한 소리를 좋지 않게 여겼다면 바로 귀신을 쫓을 수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여러 날이 지난 후에야 귀신을 쫓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사도들이나 제자들 그 누구도 자의로 판단하여 행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귀신을 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귀신들린 여종으로 하여금 바울과 실라를 따라다니며 괴롭게 하신 진짜 주체는 성령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는 왜 이렇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지체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동안 벌어진 일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격 전체로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던 사도 바울이 이러한 괴로움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귀신들린 여종을 방치하시는 동안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고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외치는 상황을 보고,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구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과 실라의 위대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 때문에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본래 바울과 실라가 목적으로 했던 것은 전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로 인하여 예수님이 유명해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여종의 계속되는 외침으로 인해 이와는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빌립보 지역에서 바울과 실라는 본의 아니게 유명인이 되었고 사람들로부터 환대와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환대와 관심이 압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한 분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인정해주는 소리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은 높아지게 됩니다. 입사 때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들의 반응이 마음을 높아지게 밀어붙이는 압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에게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이 사건을 교훈으로 제시하시고자 즉시 귀신을 쫓지 않으시고 여러 날을 방치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귀신들린 여종은 바울과 실라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외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세상을 떠나는 복음을 전하고자 했지만 이 세상에서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들에게 그러한 복음은 뒷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안주하고 싶고 잘되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은 귀신들린 여종의 소리를 듣고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상에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이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구원을 위하여 방법을 찾던 중에 바울과 실라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구원을 준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 구원을 자기가 원하는 식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잘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종이 꼭 필요한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높이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 덕분에 이 세상에서 잘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게 되었고 존경과 관심이 쏟아지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귀신의 역사입니다.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잘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음을 높아지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원치 않았더라도 계속해서 높임을 받는 분위기 속에서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높아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괴로움을 느꼈던 이유는 마음이 십자가로부터 벗어나도록 환경전체가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바울에게 칭찬하고 존경하고 관심을 가지며 마음이 높아지도록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있던 바울에게 몸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력한 강풍이 불어왔던 셈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상황과 이로부터 나타난 사도 바울의 반응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제시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합당한 반응은 괴로움입니다.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잘되는 것을 괴로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말하는 것들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바울은 이것이 귀신의 역사라는 것과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상황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울과 실라의 이름이 전도되고 있었고 바울도 스스로 마음이 높아지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성령은 바울이 이러한 마음을 보이기까지 지켜보시다가 마침내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가장 잘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는 상태를 유지해가는 것입니다. 귀신은 이것을 틀어막기 위한 방법으로 세상에서의 잘됨을 이용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귀신의 역사를 막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서 잘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잘됨의 기준을 하나님께 맞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 잘된 것으로 보이는 일이 실은 잘된 것이 아닙니다. 잘 안됐다고 보이는 일도 실은 안 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져 갈 수 있으면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일이 잘 풀린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축하를 하고 존경을 보이며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을 밀어붙이는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의 압력이 느껴질 때는 괴로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이제까지 실제로 잘되지 않았을지라도 잘되기를 기대하며 살아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해주시고 성령님과 하나님이 저렇게 해주시면 삶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귀신의 역사에 넘어간 상태입니다. 마음에서 이러한 기대가 발생할 때는 마땅히 괴로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일이 잘될 때 혹은 잘되기를 바랄 때 이것이 귀신의 역사임을 깨닫고 괴로워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일이 잘되어서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고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면 그것이 나의 마음을 높아지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세상의 압력은 우리의 마음을 반드시 십자가의 자리를 벗어나게 만듭니다. 세상에서 높아진 자리에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서만 최고의 합격이자 승진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최고로 높은 곳인 하늘로 가게 되고, 최고로 좋으신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 눈에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생긴다면 괴로움을 느끼며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절대로 세상에서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붙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축하와 존경과 부러움과 환대는 나의 마음을 높아지도록 밀어붙입니다. 그럴 때 인격 전체로 괴로워하면서 세상과 싸워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싸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매를 맞은 사건입니다.
본문의 사건 이후에 귀신이 떠나가자 여종은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었습니다. 돈벌이를 잃은 주인들은 분노하여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게 됩니다. 이에 빌립보 지방 관리들은 바울과 실라를 잡아다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지방 관리들이 재판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을 하게 되면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실라 또한 바울과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모든 처벌을 다 받도록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높이던 사람들은 각자의 구원의 기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병든 자는 낫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고, 가난한 자는 부유해지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으며, 자녀의 형통을 바라는 사람은 자녀가 잘되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됨의 내용을 구원으로 여기며 마음에서 붙잡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의 일을 잘 풀리게 해주는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파하던 바울과 실라는 직접적으로 자신들이 바라는 구원을 제공해줄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던 중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관리들에게 붙잡혀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발이 차꼬에 채워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 눈에 비치는 바울과 실라는 더는 존경받아 마땅한 해결사가 아니었습니다. 옷을 벗기고 매질을 당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바울의 의도가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높은 자리에서 끌어내려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팽개치기 위하여 스스로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싸움 또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속성을 괴로워하며 싸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잘되는 일이 생길 때에 사람들이 보내는 칭찬과 관심과 환대의 압력에 밀려서 마음이 높아지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를 끌어내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잘됨에 마음을 붙여서 높아지게 되면 하나님이 보실 때에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밝히 봄은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겠다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최고로 잘된 일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잘된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세상에서의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싸워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여 일이 잘 풀린 결과로 사람들의 시선이 압박이 되어 나의 마음을 높은 자리로 밀어붙이고자 할 때에는 괴로움을 느끼며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의 잘됨과 싸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낮은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야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로 잘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밝히 봄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나를 높이려는 세상과 싸워나가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잘된 일인 십자가의 자리를 지켜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이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바울과 실라는 사람들 눈앞에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높아진 만큼 낮아지기 위하여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던 바울과 실라가 벌거벗겨져서 매 맞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이들을 높이기를 멈춥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그제야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행복해하고 즐거워합니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잘된 자리인 십자가를 밝히 보는 자리를 지켜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 세상에서 높아지고 싶어 하는 마음,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싸우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밝히 봄을 유지하는 삶을 끝끝내 해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을 믿은 뒤로 내 생애에서 이렇다 할 만큼 잘돼본 적이 없음이 오히려 하나님의 배려였음을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밝히 보는 것보다 더 잘된 일은 일어날 수 없음을 깊이 깨닫게 하시고, 사도 바울이 보인 괴로움을 본받아 십자가 자리까지 낮아지고 지켜내는 싸움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