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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S) 십자가로 하는 영점 조정 기도 (사도행전 16:25~40)_태승철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8.16|조회수15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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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로 하는 영점 조정 기도>의 줄거리:

마음의 영점이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내가 동일시됨으로써 그에 딸린 약속 안에서 줄줄이 우리에게 은혜를 안겨줍니다. 그런데 이 동일시의 진정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의 영점 조정입니다. 다분히 필사적으로 마음의 영점을 조정해야 합니다. 이 한 가지만 필사적이면 찬양과 지진이 동반됩니다.

 

십자가로 하는 영점 조정 기도

(사도행전 16:25~40)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로 하는 영점 조정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로 하는 영점 조정 기도’

영점 조정은 플러스나 마이너스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영점에 정확하게 조준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생활 속 여러 방면에서 쓰이지만 성경 곳곳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였듯이 신앙생활에서도 영점 조정은 요구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마음의 영점을 조정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간 여종이 더는 점을 칠 수 없게 되자 주인들은 분노하여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였습니다. 이때 바울과 실라는 본래 로마 시민권자로서 처벌을 피할 수 있었으나 밝히지 않고 매를 자처합니다. 그리고 죽도록 맞은 후에 깊은 감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채웠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건 뒤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기도와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풀어지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간수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모든 죄수가 다 도망쳤으리라 생각하고는 자결을 하고자 합니다. 당시 법으로는 탈옥의 책임은 간수에게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오히려 자신들이 여전히 감옥에 있음을 밝히며 간수의 자결을 막습니다. 이에 놀란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구원을 받는 방법을 물었고 31절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간수와 그 집안의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받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대답이 주어집니다. 이 상황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받은 구원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알려줍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말해 살아있는 동안 천국출입증을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 출입허가를 받은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만 받은 구원을 죽을 때까지 묵혀둘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구원을 전하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받은 자답게 천국에 출입하는 삶을 살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는 바로 천국에 출입하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구원을 바라는 간수에게 구원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출입증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 구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이 사용될 때 나타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본문에서는 그것이 기도와 찬양과 지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을 받았다면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가 드린 기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기도를 함으로써 천국출입증을 받은 자답게 천국에 들어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찬양입니다. 찬양하는 삶이 이루어질 때 이 땅에서는 지진으로 상징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구원이 사용될 때에 나타나는 세 가지 요소 중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어떤 기도를 했던 것일까요? 이 기도의 내용은 앞선 맥락과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들어간 이유는 귀신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과 실라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대중들 앞에서 공표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귀신의 속셈이 있었습니다. 이 공표를 통해서 높임을 받는 대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바울과 실라였습니다. 이를 깨달은 바울과 실라는 번민하여 괴로워하였고 결국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은 결과 고발당하여 붙잡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여기서 바울과 실라는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고 매를 자처합니다. 낮아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철부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낮은 자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낮아질 수 없다면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울과 실라는 필사적으로 낮아지고자 몸부림을 쳤고 그 과정에서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도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몸의 고통이 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으로부터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이러한 기계적인 고백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낮아지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점 조정 기도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동일시되고 하나 되기 위해서 마음은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까지 낮아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입으로는 고백을 하여도 실제로 마음이 낮아지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기에 십자가 생활화 또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십자가 복음에 약속된 찬양과 지진으로 이어지는 연속적 은혜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으로 붙잡을 때는 반드시 마음의 영점이 조정되어야만 합니다. 영점이 조정되었다는 것은 마음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낮은 자리에 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영점 조정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번 휴무기간 동안에 전국을 다니며 사십 명의 성도님과 만남을 가졌습니다. 결론은 성도님들께서 제일 힘들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다.”라는 고백을 아무리 해도 실제로 죽은 자가 되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로 내려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스스로를 낮추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과 실라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 그러자 군중들은 바울과 실라를 높이고 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높음을 받으셔야 할 대상은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에 이러한 높임과 환대에 반항하고 저항했습니다. 그 결과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고 이로 인해 고발을 당했지만 로마 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매를 자처함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토록 필사적이었던 이유는 실질적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낮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높임과 칭찬을 듣는 동안에는 본의 아니게 마음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높임과 칭찬은 마음이 높아지도록 밀어붙이는 압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낮아지게 하려는 시도를 압력으로 느끼고 저항하고자 합니다. 반대로 높이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압력으로 느끼지 못하기에 저항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과는 반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것을 압력으로 느끼고 저항합니다. 이 낮아짐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어려움입니다. 바울과 실라 또한 이 낮아짐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고 하는 일은 결국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제대로 할 때 십자가에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찬양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찬양은 마치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구름 위로 올라가게 되면 찬란한 영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기도를 통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면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구름 위로 올라가는 찬양의 단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비행기 대신 예수님을 타고 구름 위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황홀한 빛을 느끼게 됩니다. 그 빛이 나를 통과할 때에 마음에서는 쾌청함과 유쾌함과 평강이 느껴지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나타나는 일이 찬양입니다. 마음이 하늘빛으로 가득 차서 찬양이 나타날 때 이 땅에서는 지진과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주인으로 살고 있던 모든 삶의 영역을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도맡아 살아가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나의 삶이지만 조금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삶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신앙의 원점을 짚어주고 있습니다. 휴무기간 동안 사십 명의 성도님을 만나고 내린 결론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의 관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바로 영점 조정 기도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사람들에게서 높임 받는 것을 괴로움으로 여기고 저항하였습니다. 높임 받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람직하게 여기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저항하여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발이 차꼬에 채워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자처한 바울과 실라의 기도는 결코 “감옥에서 구원해주옵소서!”라는 내용일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기에 바울과 실라의 태도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태도는 세상에서 좋아하고 바람직하게 여기는 상황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매질과 감옥에 갇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으로부터 영점 조정 기도의 내용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들의 등급을 매겨보면 어떨까요? 마이너스 100이 최고로 싫게 여겨지는 일이라면 마이너스 50만큼의 일도 있을 것이고, 마이너스 10만큼의 일도 있을 것을 것입니다. 영점에 도달하면 더는 나쁨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고로 좋은 일이 플러스 100이라면, 플러스 50만큼의 일도 있을 것이고, 플러스 10만큼의 일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동일시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싫거나 좋게 여겨지는 일들에 대해서 마음의 지수를 영점에 맞추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의 느낌이 제로가 되고, 마찬가지로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의 느낌이 제로가 되는 상태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온전하게 연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싫어하는 일들에 대해 마음의 지수가 제로 되는 지점입니다. 또한 세상에서 좋아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음의 지수가 제로 되는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자아의식의 온전한 내용을 이루려면 마음의 영점 조정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생각을 하고, 고백을 하고, 자아의식을 갖고자 할지라도 찬양과 지진이라는 은혜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찬양과 지진은 기도와 함께 약속으로 묶여있는 필수적인 은혜의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기본은 충만한 기쁨에 의한 발산입니다. 마음이 하늘빛으로 충만해지면 이 땅은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평 위에서도 마음이 하늘빛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십니다. 부딪히고 상충하는 관계들이 하나님으로 덧입혀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지진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 찬양과 지진이 뒤따르지 못한다면 마음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 됨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영점 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할 만한 일들에 대해서 싫음의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고 모든 사람이 좋아할 만한 일들에 대해 좋음의 지수가 제로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어진 상황을 싫어하는 것은 교만이고 높아진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어진 상황을 좋아하는 것은 음란이고 더러움입니다. 설령 암에 걸렸어도 싫어할 수는 없습니다.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인다면 암에 걸린 것조차 싫지 않습니다. 반대로 승진은 좋은 일로 여겨집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인다면 승진을 해도 좋지 않습니다. 이 좋고 싫음의 지수가 제로 되지 못한다면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싫어하던 일을 여전히 싫어하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좋아하던 일을 여전히 좋아하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직접 개입하시며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는 마음은 완전히 영점 조정이 되어야 합니다. 영점 조정이 될 수 없다면 하나님의 개입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실라가 처해 있는 상황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죽도록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혀 그 발이 차꼬에 채워졌습니다. 이들에게는 변호사나 후견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대중의 지지가 있어서 호소문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떠한 기약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귀신 들린 여종에 의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을 때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높임 받는 것을 주님의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압력으로 느끼며 괴로워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받은 구원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천국출입증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마음은 구름 위로 올라가서 하늘빛으로 가득 찬 찬란함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진실임에도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 됨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휴무기간의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거듭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가장 낮은 자리인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의 자리입니다. 싫어함에 대해서 죽는 것이고, 좋아함에 대해서도 죽는 것입니다. 싫어함에 대해서 영점을 맞추고, 좋아함에 대해서도 영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삶이 괜찮은 상황이라고 생각될지라도 그것으로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전혀 좋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영점의 상황으로 마음을 낮출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여 붙어있는 한 더러움과 음란이 발생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 아버지 집도 버리게 하셨고 아내 사라나 독자 이삭도 버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세상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게 주어진 것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이삭과 같이 여겨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 마음에서 좋아함의 지수가 제로 되게 하여 주셔서 전혀 좋아함으로 느끼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싫어할 만한 일들에 대해서도 싫어함의 지수가 제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했던 기도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고 천국출입증을 받은 자의 기도입니다. 이 영점 조정의 기도가 마음이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십자가 붙잡고 마음의 영점 조정의 기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이 아닌 마음입니다.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지라도 다 지나갈 것이고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상황에 대해 마음의 좋아함과 싫어함의 지수를 영점으로 만들 수 없다면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유일한 과제입니다.

찬양은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으로 가득 찬 기쁨의 발산이고, 지진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체가 되어 살아가심을 상징합니다. 영점 조정의 기도 뒤에는 이러한 찬양과 지진의 은혜가 따를 것입니다. 마음의 영점 조정의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를 잊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에는 찬양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삶에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이끄시는 지진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과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싫어하는 것을 없애 달라는 기도이거나 좋아하는 것을 지켜달라는 기도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싫어해야 할 것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해야 할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는 영점 조정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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