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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원받았다면 월급 대신 구원으로 살자>의 줄거리:
인간 세상에서 샐러리맨이 월급으로 살 듯이,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고 살 듯이, 연예인이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 살 듯이, 직장인이 승진의 희망으로 살 듯이, 노인이 밥심으로 살 듯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정으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받은 구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고 죽지 않은 것은 여생을 받은구원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았다면 월급 대신 구원으로 살자
(사도행전 16:29~34)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구원받았다면 월급 대신 구원으로 살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구원받았다면 월급 대신 구원으로 살자’
구원은 묵히고 썩히고 보관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월급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받은 구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 구절은 34절입니다.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폐암이 의심되어 조직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배우자와 자녀로부터 시작하여 친척들까지 모두 걱정하며 검사결과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검사결과가 악성이 아닌 양성으로 판정이 나왔습니다. 이 결과를 받은 온 집안 식구들은 다같이 기뻐할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수의 집안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기뻐했던 것일까요?
간수와 온 집안이 기쁨을 누리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이 누린 기쁨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 간수는 구원을 받는 방법에 대해 물었고 이에 바울과 실라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간수와 온 집안은 바울과 실라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다시 34절을 보면 이 기쁨의 이유를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 믿는 것을 거의 같은 의미로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 믿는 것을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의 내용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게 되어 기쁨을 얻었다는 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가장의 폐암 조직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와서 온 집안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기쁨입니다. 더 혹독하고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기쁨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가장의 건강이 보장된 일은 기뻐해야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기쁨의 이유가 된다면 오히려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간수와 온 집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게 된 것 자체로 기뻐했던 것입니다.
간수와 온 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써 눈에 보이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기독교나 천주교처럼 종교라는 울타리를 통해 소속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난 뒤에는 기껏해야 루디아의 집에 모여서 복음을 받아들인 몇몇 사람들과의 만남을 이룬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예배당도 없었으며 예배당 조직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빌립보에서 몇몇 신자들과 함께 남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음에도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곧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면 그 구원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직장인은 월급을 받아서 먹고 삽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고,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삽니다. 노인들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으로 삽니다. 구원으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작용하는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받은 구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유일하게 좋으심이라는 표현이 무척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좋으시기 때문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할 대상이 되십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 함은 여분이 없을 정도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알고 믿을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돈을 좋아하고 건강을 좋아하고 자녀의 형통을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는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을 때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암 검사를 받은 가장의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온 것이 좋다면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아하는 상태는 아닙니다. 하나님도 좋지만 그만큼 건강도 좋아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구원의 내용이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창조주 되심과 이 땅에 대해 주권자 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써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자입니다. 그리고 몸부터 시작해서 나와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계신 주권자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과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와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자연현상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민족과 사람들이 관련돼있는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을 비롯한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미물인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나 심지어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가 나고 빠지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결정권자이시고 소유권자이신 하나님을 젖혀둔 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민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은 하나님 없이 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지 못한다면 구원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찾고자 합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었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는다면 세상에서는 좋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창조주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 하나 나고 빠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주권이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고민하는 동안 하나님의 주권의 그물망을 찢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찢으며 나의 주권의 영역을 만들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와 주권자로 연결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바울과 실라가 전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지 않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은 것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싫은 것을 향하는 법이 없습니다. 싫은 것을 거부하는 것도 좋은 것을 향함과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있기에 싫은 것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에 마음을 향하게 하고 그로부터 힘과 뜻을 발휘하고 있다면 세상에 있는 것을 좋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있는 그 무엇도 좋아할 수 없다면 이 땅에 있는 그 무엇도 싫어할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싫어할 수도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는다면 그 증거는 이 세상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라고 떠들어대거나 다짐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에서 세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있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병든 것보다 건강한 것이 좋고, 돈이 없는 것보다 돈이 많은 것이 좋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좋고,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이 좋게 느껴진다면 세상에서 좋은 것이 많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는다면 그 증거는 세상에 대한 좋아함이나 싫어함에 대한 중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도 좋고 건강도 좋은 마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상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돈 있는 상태를 좋아하기에 돈 없는 상태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지 않는 상태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이러한 일이 얼마나 일어나는지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받았다면 몸이 아플 때도 싫어할 일이 아니고, 건강한 상태가 좋아할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마음과 뜻과 힘을 쏟을 대상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인 상태로는 죽었다 깨나도 하나님을 유일하게 좋으신 분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하나가 되는 동일시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철저하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동일시는 세상의 좋음에 대한 죽음이고 세상의 싫음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좋거나 싫게 여겨지는 일들에 대해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죽는 것입니다.
암이 의심되어 받은 조직검사 결과가 악성으로 나온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를 싫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악성이라는 검사결과에 대해서도 싫어할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건강한 것이 좋아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좋음과 싫음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럴 때만 비로소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간수와 온 집안이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뻐합니다. 복음을 듣고 세상이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으심으로 알고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받아들인 복음이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로 당신 자신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돈이 기뻐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후로 돈은 기뻐할 대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돈이 기뻐할 대상이 아니니 돈이 없는 것을 싫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창조주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알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자 그 하나님이 내게 당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되었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믿고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사람을 언제나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받을 수 있음이 확고하게 약속되었기에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에 땅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아할 일도 아니며 싫어할 일도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구원을 받으셨다면 이렇게 구원으로 살고 계십니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는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향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에 십자가를 적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이 안 벌리는 상황에, 병에 걸린 상황에 십자가를 적용하면 전혀 싫어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돈이 많고 건강한 것이 좋다면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동안 나의 주체성은 살아납니다. 어떤 일이 주어져도 좋지도 싫지도 않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있는 상태이기에 나의 주체성은 살아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세상의 일들에 대해 좋거나 싫다고 반응하는 동안에는 나의 주체성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주권은 무산되어 버립니다.
조직검사 결과가 악성으로 나온 것이 싫게 느껴지는 동안 하나님의 주권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병든 상태에 대해 스스로 주체가 되고 주권자가 됩니다. 설령 하나님을 부르더라도 주권자의 입장에서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병이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한 채 스스로 주권자가 된다면 진짜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잘못하셨다고 외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이나 자녀의 형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있게 하시거나 없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녀를 세상의 기준대로 형통케 하시거나 그렇지 못하게 하신 분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동안 스스로 주체가 됩니다. 그 일이 내 마음에 좋다고 여겨지면 하나님을 칭찬하듯이 감사를 하고, 싫다고 여겨지면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실수라도 한 것처럼 고쳐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내 주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의 좋고 싫음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같은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휴무기간 동안에 만나 뵈었던 모든 분들과의 대화를 종합해볼 때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는 분들조차도 여전히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곧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사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좋음과 싫음의 느낌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것이 꼭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어떤 일이 주어져도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고자 하는 나를 죽임으로써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만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설령 스데반 집사님처럼 돌에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나도 싫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순교조차도 단지 하나님의 주권의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표현은 항상 적절하고 항상 최선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망한 것처럼 보이고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표현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언제나 가장 적절하게 최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에 대한 좋음과 싫음이 다 사라집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유일하게 좋아하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좋음도 싫음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건강해도 좋아하지 않으며 병에 걸려도 싫어하지 않습니다. 돈이 잘 벌린다고 좋아하지 않으며 돈이 벌리지 않는다고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이 최선으로 적절하게 삶을 이끌어 가고 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믿음이라는 구원을 받았다면 십자가는 생활화되어야만 합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하나님 믿음만으로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신 분이시며 유일한 소유권자이시며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환하게 보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게 하시고 구원받아 하나님 믿음으로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