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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세상 일등들에게 가혹한 십자가 복음_태승철 (사도행전 17:22~3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8.25|조회수7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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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일등들에게 가혹한 십자가복음>의 줄거리:

세상 가치 획득 경쟁에서 일등 한 사람.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의 근거가 되는 그 세상 가치를 무조건 가장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그 세상의 가치를 가진 사람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사건입니다. 어떤 세상 가치보다 그 사람 자체가 더 값진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세상 일등들에게 가혹한 십자가 복음

(사도행전 17:22~34)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일등들에게 가혹한 십자가 복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일등들에게 가혹한 십자가 복음’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설교는 여러분들이 읽어보시면 다 이해하실 수 있는 내용이기에, 우리는 이러한 설교가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하는 앞부분에 주의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2절을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레오바고는 언덕 위에 있는 광장입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임을 갖고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재판도 이루어지던 광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세계 문화의 중심지이자 학문과 철학과 지혜의 본산지였던 아덴 시민들을 향하여 설교를 합니다. 당시의 아덴 시민들은 세상의 일등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언제나 가치 획득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믿어지는 가치들을 정해놓고 획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들을 획득한 사람들은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로 불립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일까요? 우선 절대로 존경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갖은 고생 끝에 세상의 가치를 많이 얻게 된 상태를 인정하고 존경하고 칭찬하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신앙이고 비굴함의 표현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임은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가장 사소하며 쓸데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복음을 통해 진정한 가치에 눈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들을 다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사람 자체의 가치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지고 있는 세상의 가치에 근거해서 자부심을 갖거나 스스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예를 들어 100kg의 금덩어리는 그 자체로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령 금덩어리에 10kg 정도의 납덩이가 붙어있을지라도 그것은 금덩어리의 가치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금덩어리가 납덩어리로 인해서 훌륭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이와 같습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가치를 한 사람에게 몰아준다고 해도 그것은 납덩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납덩이와 같은 가치들을 많이 가졌다고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어불성설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가치 때문에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는 동안 인간 이하로 떨어지게 됩니다. 재벌은 돈이라는 가치를 많이 가졌기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스스로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돈이 고평가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인간 이하가 되어버립니다. 재벌이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그 사람의 가치는 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귀중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귀중한 사람입니다. 돈 때문에 스스로를 귀중하다고 여기는 순간 그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가치는 버려지고 인간 이하로 전락하게 됩니다. 돈에 근거해서 자신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여긴다면 결국 자신의 가치가 돈보다 낮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자체의 가치가 무엇 때문에 대단한 것일까요? 천하 만물 중에 오직 사람만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존재란 그저 사람에게 영적인 요소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진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상대하여 마주할 수 있도록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사람 자체의 가치는 이 영적인 부분 즉 영성에 있습니다. 영성(spirituality)은 곧 영적인 존재와 관계하는 성질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이와 같은 주제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영은 우리의 오감으로 포착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나지 않고 맛도 느껴지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치는 바로 영성에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영성을 통해서 세상 전체를 창조하신 영이신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인 마음이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되면 창조 되어진 이 세상에서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가치들이 너무나 사소한 것으로 전락 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유일하게 좋으심을 마주 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보다 더 좋다고 여겨지는 세상의 가치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크시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들이 사소하고 지극히 작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과의 만남은 바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사람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덴에서 행해진 사도 바울의 설교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함입니다. 설교내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아덴 전도에 문제가 있었음은 이후의 행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고린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 1년이 넘게 머물게 되는데 이 기간을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디모데와 실라가 마케도니아와 데살로니가에 있다가 고린도로 내려와서 바울과 합류하게 되는데 이 시점을 중심으로 하여 합류하기 전까지가 고린도에서의 전기가 됩니다. 이 시점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1장 2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영적인 슬럼프에 빠져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장 3절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의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과는 너무나 상반되는 분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영적 슬럼프에 빠졌던 이유는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가 원인이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의 전도와 설교는 사도 바울 스스로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영적 슬럼프에 빠져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장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22~25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에 와서 굳이 유대인과 헬라인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아덴에서의 사건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덴은 당시 지혜의 본산지였습니다. 광대한 로마제국 내에서도 철학과 문화와 학문과 지혜에 있어서 일등인 도시였습니다. 종교에 대해서도 단순히 인간의 본능적 종교심의 표출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철학과 이론을 덧붙여 사상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자신들이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 또한 이들의 자부심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80년대까지만 해도 하얀 피부의 서울 사람이 시골에 내려가면 관심을 받았던 것과 같습니다. 또 70년대로 가면 미국이민이 별세상으로의 이주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시골 사람들에게는 서울이 일등이었고, 서울 사람들에게는 미국이 일등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강릉은 주말만 되면 서울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이제는 시골의 개념이라는 것이 모호해져서 외모만 봐서는 구분이 되지 않지만 70년대 80년대에는 서울 사람들은 외모부터 시골 사람들과 차이가 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구분이 아덴과 타지역에도 존재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타지역 사람들을 야만인으로까지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타지역 사람들도 아덴 사람들을 자신들과는 무엇인가 다른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아덴은 자타공인 지혜에 있어서는 모든 도시에 앞선 일등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을 따라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아덴의 철학자들과 시민들은 행복의 길을 모색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본능을 넘어서 생각하고 연구하여 이론을 만들어냈습니다.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서 인간의 지혜를 동원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아덴의 학문과 철학을 통해 지혜라는 영역에서 일등인 도시였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도 이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아덴의 독특한 가치관을 필요 이상으로 깊게 존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쓰라린 실패의 경험으로 남게 되는 영적인 슬럼프의 이유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0절을 보면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아덴을 의식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는 이러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지혜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자와 같은 입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 위에 복음을 올려놓고자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후회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0절 하반부에서 21절까지를 보면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미련하게 여겨질지라도 전해야 할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을 의식한 나머지 지혜의 방식으로 복음을 살포시 포장하였고 그 결과 십자가 복음은 제대로 전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타난 고백이 25절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고백을 아덴에서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당신들이 갖고 있는 세상적인 가치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하나님의 좋으심에 비하면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고 이후에 고린도에 와서야 그것을 후회하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경쟁에서 일등한 자리를 존중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2장 4절을 보면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활동이 아덴에서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덴에서의 실패를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통을 느끼며 반성의 반성을 한 것이 고린도전서 1~2장을 통해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면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을 인정하며 복음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3절을 보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아덴에서는 3만이 넘는 신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단이 만들어진 이유는 혹시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누락된 신이 있을 경우에 화를 내고 벌을 내릴까 걱정하여 달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들과 동일하게 여겨 소개하고자 했던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종교심을 존중한 결과 듣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다른 신의 하나로 소개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3만이라는 신들의 꼴찌 자리에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등재하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설교내용을 보면 합당한 이야기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 입장에서 이 설교는 아덴의 골목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신에 대한 소개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천지의 유일하신 창조주이십니다!”라고 외칠지라도 이미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을 인정한 후에 이루어진 설교이기에, 아덴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 또 하나의 종교나 사상을 소개하고 있구나.”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개가 이렇게 되어버리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앞서 데살로니가나 베뢰아에서처럼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31절을 보면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죽고 부활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믿으라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아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에 대한 사상을 전하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복음전파의 실패는 바로 세상적인 가치의 존중으로부터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취했어야 할 태도는 앞서 살펴보았던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내용과 같습니다. 1장 25절에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는 이야기를 아덴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너희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서 본능에 사로잡히지 않고 생각과 사고를 통해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온 세상이 알고 있고, 너희 또한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할지라도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라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대통령에게 전도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떨까요? 대통령의 자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가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 대통령의 자리는 사소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자리이지만, 복음의 기준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자리임을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벌에게 전도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앞에서는 재벌이 갖고 있는 돈의 가치란 휴지와도 같습니다. 돈이 많다는 것을 세상사람 모두가 다 대단하게 여기고 스스로도 대단하게 여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돈은 휴지처럼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인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 인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세상적인 가치가 단지 배설물과 다를 바 없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전도는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설령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 자신은 그렇게 느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자체가 세상에서 버림당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가치로부터 격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격리가 하나님 쪽에서 보면 원하시던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쪽에서 세상의 가치를 버리는 일이 된 것입니다. 내가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면 여자 친구는 생각하기를 내가 버리고 싶었는데 차라리 잘됐다는 식으로 그 사람을 차버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마음가짐이 이와 같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대단하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복음은 당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휴지처럼 여기게 해줍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하나 되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창조주 하나님과 마주하는 자리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마음은 예수님이 마주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하게 될 때 하나님이 가장 좋은 가치임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의 가치는 쓰레기나 배설물처럼 더 이상 마음에 담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당신은 그럼에도 예수를 믿으시겠습니까?”라고 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전도는 세상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는다는 생각이 없다면 쓰레기나 배설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뜻을 따라 사용하시는 재료가 됩니다. 그러나 버려져야 할 쓰레기이고 배설물을 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끔찍한 일입니다. 돈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를 한답시고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 일을 해내셨습니다. 이제 먹고살 만 해졌으니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것이 어떨까요?”라고 하는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거짓말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복음의 입장에서 존중의 표현일 수 없습니다. 돈을 대단하게 생각하는 부자가 있다면 돈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가치가 강등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오히려 돈 때문에 망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만 합니다. 대법원 판사의 자리에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 자리가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땅에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고 있고 전하는 사람이라면 동네 아주머니일지라도 대법원 판사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가치를 똥 더미 위에 던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 복음을 알고 전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아덴에서의 실패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대단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단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지혜와 사상들이 다 배설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함이 진행되는 중이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가치를 획득한 아덴에 대한 존경의 분위기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약하고 두렵고 심히 떨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박해 속에서도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서 죽은 줄 알고 내다 버릴 정도가 되기도 하였지만 당당하였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태장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서도 기도와 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 약해졌던 이유는 세상의 가치를 존중하게 된 결과였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나쁜 의도를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에서처럼 반발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아덴의 성향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복음전파는 실패하게 됩니다.

단지 몇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전파는 받아들인 사람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라도 복음전파는 성공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받아들여도 실패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갖고 있고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자부심을 느끼는 세상의 가치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될 때 사소한 것이고 배설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직언할 수 있다면 복음전파는 성공한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가치를 존중하느라 이것을 말할 수 없다면 복음전파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을 뒤늦게 깨달은 바울이 영적 슬럼프에 빠진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께서 붙잡고 있는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나의 영이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유지시켜 주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의식하는 동안 나의 마음은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의 모든 가치가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 복음을 내 것으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시키는 대로 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의 자부심의 근원이 되는 세상의 가치들이 휴지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자 배려이며, 한 사람이 가진 가치에 대한 진정한 존경이라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 앞에서 복음이 주는 나의 위치인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리를 결코 벗어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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