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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께 파송 받아 성령으로 봉사한다>의 줄거리:
가룟 유다는 3년 공생애 기간 줄곧 예수님과 함께하며 제자로서의 과정을 마치고도 결국에 사도가 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12 사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의 직무'를 생각하면 사실 만인 제사장설과 마찬가지로 만인 사도설이 마땅합니다. 사도의 직무와 봉사의 직무는 구분될 수도 없고, 별도의 사람들에게 국한될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 파송 받아 성령으로 봉사한다
(사도행전 1장 15절~26절)
15.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이르되
16.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17.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께 파송 받아 성령으로 봉사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께 파송 받아 성령으로 봉사한다’
본문은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읽은 전반부에는 가룟 유다가 저지른 일과 결과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에는 맛디아가 선출되어서 열두 사도에 속하게 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봉사라고 하면 흔히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장애우를 돕는 등의 사회활동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 파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님으로 봉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봉사는 선민에게 예외 없이 나타나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선민의 삶을 분석해보면 보냄 받은 자의 삶이고 봉사하는 자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민의 봉사는 배우자와 대화하는 중에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대화하는 중에도 예수님께 보냄을 받은 자로서 서로에게 봉사하는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한 일이 아닌 봉사이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봉사하는 일과 월급은 분리되어야 합니다. 선민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하시는 삶의 현장에서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선민에게 있어서 월급은 일의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봉사를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내가 먹고살 수 있도록 월급을 제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삶을 봉사로 생각할 수 없다면 자유는 사라집니다. 이것은 단지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진실입니다. 나에게 월급을 주는 사장님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실제로 월급 또한 사장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월급을 받기 위한 품팔이가 아니라 봉사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본문에서는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빠지게 된 사건의 전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는 구약의 열두 지파와 연결되고 선민 전체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열두 제자 중에 한 자리가 빈다는 것은 구원의 역사에 빠지는 선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제자들은 빈자리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이때는 교회가 시작되는 시점으로써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두 명을 빠짐없이 채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이 누구도 누락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보궐선출을 통해 맛디아라는 인물을 열두 명의 자리에 포함시킵니다. 이 보궐선출은 모든 선민이 교회가 시작되는 현장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민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언급되는 단어가 바로 직무입니다. 17절과 25절에서 직무로 번역된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직역하면 봉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가 나오는데 이는 곧 보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봉사의 직무와 보냄 받은 사도의 직무라는 두 가지 직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유다가 맡았던 직무가 봉사의 직무였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선민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선민이 교회를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민의 삶은 봉사의 직무와 보냄 받은 자의 직무라는 성분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봉사의 첫째 조건은 나를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돌보고 싶은 관심과 힘을 남을 향해 쏟는 것이 봉사입니다. 진정한 봉사는 선민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봉사라는 말은 참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선민이 아니라면 진정한 의미의 봉사는 불가능합니다. 봉사는 나를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 애를 쓰는 것인데, 결국 나를 돌본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나를 돌보고자 한다는 것은 마음의 공백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고 채우기 위하여 추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공백은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작용하기에 봉사를 한다고 여기는 모든 순간이 실제로는 마음을 채우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봉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봉사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형태로 나를 돌보는 것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봉사는 원천적으로 선민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열두 제자가 대표하는 대상은 구약의 열두 지파 즉 선민입니다. 앞선 맥락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리자면 선민은 예수님의 승천하심과 성령님의 강림하심 사이에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승천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자 성령님의 강림의 여정이 마쳐지는 지점입니다. 선민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식 속에 품고 기도하는 사람이고 승천의 과정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땅은 성령님이 오셔서 몸과 지정의를 재료로 삼아 살아가시게 됩니다. 이런 인격적 구조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사람을 통해 진정한 봉사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길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우고자 소원하는 사람의 삶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게 됩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몸과 지정의를 재료로 삼아 이 땅에서 봉사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만이 땅에서 자기를 돌보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돌보는 일은 마음을 채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의 길과 성령강림의 길이 시작되고 마쳐지는 지점인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자기를 돌보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은 무조건 봉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공백이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보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대할 때에도 양육이 아닌 봉사가 됩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도 봉사가 됩니다. 회사에 나가 일을 할 때도 봉사가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십자가는 승천의 여정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강림의 여정이 마쳐지는 지점입니다.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로 올라가 나를 돌보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을 있음으로 느끼고 좋음으로 확신하며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역사를 천국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남아있는 몸과 지정의는 나를 돌보는 일에 사용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몸과 지정의를 재료로 삼아 이 땅을 살아가실 것입니다. 가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으면 그 사람의 삶은 성령이 붙잡고 이끌어 가시는 봉사의 삶이 됩니다. 직장에서도 봉사의 삶이고 세상 어디를 가도 나를 돌보는 일이 필요 없기 때문에 봉사의 삶이 됩니다. 나를 돌보는 일은 승천 길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하나님만으로 채워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은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웨이터가 손님들에게 서빙을 하는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주방과 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서빙을 합니다. 웨이터는 손님이 먹을 음식을 내놓습니다. 그 음식이 아주 맛있어 보인다고 해서 먼저 맛을 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웨이터들의 식사는 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배우자가 서로 웨이터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서 배를 채울 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하늘에서 채우는 선민에게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의 직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표현은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천사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들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보낸 사람을 대신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들이 하는 일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보냄을 받음의 절대적인 전제 조건은 만남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사야의 소명 사건에서 그러한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만나야 보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보냄을 받아서 하는 일은 몸으로 계시지 않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몸으로 계실 때에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과 만남을 가졌던 자들이 사도들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도들이 하는 일은 예수님이 하셨던 일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상황에서 예수님을 대신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역할이 증인이 하는 일과 같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증인으로서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재현함으로써 말씀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이러한 연결이 있기에 사실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는 분리될 수 없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돌보지 않는 봉사의 직무도 성령께서 몸과 지정의를 이용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도 또한 보냄 받은 자로서 보내신 분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증인의 역할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재현할 때에 듣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또한 보냄 받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성령이 안에서 역사하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앞에서 말한 봉사의 직무와 마주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많아지자 봉사할 사람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일곱 집사를 뽑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사도로써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령님이 임하셔서 이끄시는 모습을 보면 사도들보다도 스데반 집사님이 먼저 말씀을 전하다 순교를 하게 됩니다. 빌립 집사님도 전도하는 모습 이외에 다른 봉사를 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임을 돌보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빌립 집사님도 성령이 임하시자 한 일은 전도였습니다. 누가 사도인지 집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선민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배당에서 권사나 집사라는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 또한 그분들의 직분에 대해서 착각해서도 됩니다. 직함은 다를 수 있으나 직무는 다르지 않습니다. 만인제사장설처럼 만인사도설도 가능하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민으로서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조금 맛을 보았을 뿐인데 이전의 삶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명확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연쇄 사건 속의 예수님과 만나고 연합함으로써 보냄을 받게 됩니다. 보냄을 받기 이전의 삶은 땅의 삶을 위하여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통하여 채우려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을 만날 때에도 봉사는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대가 나를 위해 봉사하기만을 바랐을 뿐입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 채움거리를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고달프기만 합니다.
그런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게 된 이후에는 고달픔이 사라집니다. 봉사가 힘든 것 같지만 봉사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봉사할수록 힘이 들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봉사는 선민만의 특권입니다. 승천의 여정이 시작되는 십자가, 강림의 여정이 마쳐지는 십자가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선민이라야만 마음이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가서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땅에서는 나를 돌볼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몸과 지정의를 재료로 삼으셔서 주체가 되어 살아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 봉사의 삶이 가능해지고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서 사도의 직무가 가능해집니다. 보냄 받은 자로서 봉사하는 삶은 쉽고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삶이 괴롭고 힘들다면 이 봉사의 삶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사 받기를 원하는 동안에 예수님으로부터 보내진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상에 끌어당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소원하는 것이 있기에 예수님을 세상에 끌어당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에 붙어 있으면서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 땅으로 끌어당기고자 하고, 사람도 물건도 다 끌어당겨서 마음을 채워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가룟 유다에 대한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동고동락하였습니다. 제자의 과정을 다 마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사도는 될 수 없었습니다. 3년을 함께하고도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인생과 미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인생과 미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과 십자가를 치워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인생과 미래를 잃는 순간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님께 의존했던 이들의 미래는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인생과 미래를 위하여 십자가를 치워버립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의식이 붙잡고 있는 인생과 미래를 유지하고자 결정함으로써 제자에서 사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실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연합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잡는다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내 인생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더는 내 삶을 바라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지금도 삶의 현장을 바라보고자 하고 의식하고자 한다면 십자가는 잊힙니다. 십자가를 잊는다면 예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과 연합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룰 수 없다면 보냄을 받을 수도 없고, 보냄을 받을 수 없다면 봉사의 삶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끌어당기는 삶을 살게 되고, 봉사를 받으려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가시밭길 인생이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사람이 되느냐 마느냐는 십자가에서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던 제자에서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사도의 직무와 봉사의 직무를 삶의 속성으로 삼는 사람이 될 것이냐, 십자가를 놓아버리고 의식으로 인생과 미래와 삶의 문제를 신경 쓰면서 가룟 유다와 같은 낙오자가 될 것이냐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등져야만 볼 수 있고, 세상을 놓아야만 볼 수 있고, 세상을 잃을 때에만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놓아버리고 등지고 잃는다고 해서 이 땅에서의 나의 인생과 미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하게 있어야 될 하나님의 주권의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의식해야 될 대상은 인생이나 미래가 아닙니다. 의식이 세상을 붙잡고자 할 때에 마음의 공백 또한 세상으로 채우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세상으로 잡아당기는 삶이 이루어질 뿐 결코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삶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즐거운 봉사의 삶 또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마음 채움은 하늘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마주하는 사람에게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때 진정한 봉사의 삶이 나타나게 됩니다. 봉사의 인격구조를 가지고 대할 때에 심지어 원수를 대할 때조차 즐거울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사람과의 관계는 진정으로 즐겁고 기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과 미래를 놓아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인생을 등지고 잃어야 내 인생과 미래가 하나님의 주권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미래를 있음으로 느끼시고, 보시기에 좋은 일을 위하여 소원하시며 성령을 통해 성취해 가십니다.
의식 속에서 인생은 잃어버려야만 합니다. 의식으로는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며 죽은 자로서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로 있기에 인생과 미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 속에서 인생과 미래를 잃고 등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을 붙잡으실 것이고 성령님이 주체가 되셔서 이끌어나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 가볍고 즐겁고 재미있고 감사하는 봉사의 삶이 나타납니다. 마음은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삼아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이 땅에서는 성령님이 지정의와 몸을 재료로 삼아 봉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 파송 받아 봉사의 직무와 사도의 직무를 감당함으로써 가볍고 즐겁고 행복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승천의 여정이 시작되고 강림의 여정이 마쳐지는 주님의 십자가를 의식 속에서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룟 유다처럼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인생과 미래를 놓아버리고 삶의 현장을 등집니다. 오직 위로는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게 하시고, 아래로는 봉사의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셔서 누구를 만나든 보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