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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유일한 나 없인 유일신 하나님도 없다>의 줄거리:
사람은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기 인생과 삶에 관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부화뇌동과 군중심리와 선동 됨 없이 유일한 존재가 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한 사람이 자기에게만 속하는 독특한 생각과 말을 하는 유일한 인격적 존재가 될 수 없다면 그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나 없인 유일신 하나님도 없다
(사도행전 19:21~41)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유일한 나 없인 유일신 하나님도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유일한 나 없인 유일신 하나님도 없다’
본문은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앞부분인 21~22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위한 작정을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3~32절에서는 에베소 사람들의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가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작정하는 부분,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에 의해 이루어진 선동, 이에 사람들이 부화뇌동하여 넘어가는 상황, 군중심리가 작동되어 나타난 소요의 네 가지 부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유일신 하나님과 실제로 만나고 있다는 증거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로 살아감으로써 표현됩니다. “유일한 나”란 인생에 대해서 오직 나에게서만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사는 상태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선동되거나 부화뇌동하거나 군중심리에 휩쓸려 산다면 유일한 나를 살아간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상태는 유일신 하나님도 없음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본문은 유일한 나의 상태가 어떠한 것이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할 때에 영육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영도 구원을 받고 육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육의 구원이란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살고 있는 삶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유일한 나로 살아감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육의 구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영의 구원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영은 곧 마음입니다. 영의 구원은 마음이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부활 승천 우편까지 따라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상태가 될 때 이루어집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가 영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의 구원이 이루어질 때는 육의 구원 또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삶에는 많은 문제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문제들은 대개 나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나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세상에서 나에게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대개 부모라면 자녀로 인해 문제를 겪기 마련이고, 결혼을 했다면 부부관계에서 문제를 겪기 마련입니다. 다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에도 해답은 다를 수 있습니다. 똑같은 문제라도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는 방식의 접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로 사는 것이며 육의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육의 구원은 영의 구원과 함께 나타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가 유일한 존재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선동을 당하고 부화뇌동하거나 군중심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살아간다면 결코 유일한 존재일 수 없으며 유일하신 하나님도 계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본문 21~2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의 일정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2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작정의 내용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보고를 하고 로마로 가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 부분의 원문을 보면 “에데토 오 파우로스 엔 토 프뉴마티(ἔθετο ὁ Παῦλος ἐν τῷ πνεύματι)”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프뉴마티는 성령을 뜻합니다. 바울이 스스로 작정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결정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지난 시간에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방언과 예언은 모두 언어를 통해 일어나는 본질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방언과 예언의 공통적 본질이란 사람이 자기 안에서 만들어낸 언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은 천국에서 만들어진 언어가 인격 안으로 들어와서 나타남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방언과 예언과 같은 본질의 언어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단순히 작정하였다고 번역되었지만 이 작정은 성령 안에서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보고한 후에 로마로 갔다가 현재의 스페인인 서바나 지역까지 전도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울 자신의 생각과 결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국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이 사도 바울의 인격을 통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후에 이어지는 본문의 내용은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23절 이하를 보면 데메드리오라 하는 은장색이 직공들을 선동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선동은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불어넣어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선동에 넘어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을 자기의 생각과 말처럼 여겨서 움직이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데메드리오는 에베소에서 은을 세공하던 직공들의 조합장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이나 전도활동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강론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들은 참 신이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가르침이 온 지역으로 퍼지자 은으로 우상을 만들던 은장색들은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은을 세공하여 아데미 여신상과 신전의 모형을 만들어 파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생업에 문제가 생기자 사도 바울과 교인들을 탄압하여 복음의 확산을 막고자 합니다.
27절을 보면 데메드리오가 은장색들을 선동했던 구체적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8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라고 선동에 넘어간 은장색들이 부화뇌동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넘어간 이들은 공감하며 분노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보다 에베소에서 믿던 아데미 여신이 더 크다고 경쟁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은장색들의 군중심리에 의해 소요가 일어나게 되는데 군중들은 대체 왜 소요가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가담하여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29절을 보면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고 하였습니다. 군중들은 대체 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노천극장으로 우르르 따라 들어갔던 것입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과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거대한 노천극장은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손꼽히는 곳이었습니다. 이어지는 32절을 보면 그 모습을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은장색들처럼 선동을 당한 것도 아니고 왜 소요가 일어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군중심리에 휩쓸려 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 바울이 성령 안에서 전도여행의 일정을 결정하는 모습과는 극히 대조적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선동과 선동에 넘어간 부화뇌동과 군중심리를 기록하며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가 못 박히신 사건만을 알겠다는 작정은 물세례와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성령세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작정이 장기간 유지될 때에 나타나는 현상 전체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적 특징은 언어의 변화입니다. 방언과 예언과 같은 본질적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있는 천국에서 만들어진 언어를 시시각각 받아서 생각하고 말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연관된 영역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가게 됩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현상 전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 아니라면 나의 나라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로 나타납니다. 오감을 통하여 들어오는 세상과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마주치게 됩니다. 마음이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이기에 세상의 상황과 사람에 따라서 좋음과 싫음의 판단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판단에 따라서 지정의의 능력이 움직이며 그 사람만의 생각과 말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상황과 사람에 대하여 시시각각 하나님을 의식하고자 합니다. 내 바깥에 있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자 창조주로서 내가 만나는 상황을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만나는 상황, 사람, 사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생각을 갖고 계시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생각과 말씀을 나에게 주시고자 준비하고 계십니다. 똑같은 돈 문제를 마주할 때도 각자에게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받아서 살아가는 모습은 유래가 없는 유일무이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돈 문제를 포기하게 만드실 수도 있는가 하면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해결하실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이 세상에서 유래가 없이 나에게만 맞추어진 생각과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저희 집안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희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군대를 먼저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재수나 삼수를 하지 않고 바로 군대를 가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와는 무관한 세상의 생각입니다. 저는 기도하는 중에 먼저 군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기도하는 중에 아이와 아내를 설득하고 동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제가 지금 인터넷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또한 저의 생각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방송을 시작한 것이 2003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인터넷으로 방송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설교를 녹음하여 CD로 만들었는데 테이프 녹음이 일반적이던 때에 그 또한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저에게 선견지명이 있고 미래지향적인 성향이 있어서 이러한 일을 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기도하는 중에 제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꿈이나 계시 등을 통하여 갖게 된 생각으로 행했을 뿐입니다.
제가 평생 목회자 세미나를 다니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을 우습게 보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한다는 선배 목사님들이 후배들에게 가르침과 경험을 나누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서 성공적인 목회라는 것에 대한 개념 자체에도 문제가 있습니다만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는 접어두기로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가 아무리 목회자 세미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자 하여도 참석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나를 아시고 나의 목회현장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목회에 성공한 선배 목사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가장 가까이에 계신다는 이 사실을 모른 체하거나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목회를 훌륭하게 성공한 목사님이 세미나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목사님이 하나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배 목사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으니 세미나에 참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을 마주할 때는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받아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원치 않아도 독특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삶의 모습은 유일무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적용하지 않는 사람은 오감을 통하여 들어오는 세상과 속수무책으로 접하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는 세상가치에 대한 좋음과 싫음의 판단이 생겨납니다. 그로부터 지정의가 만들어지고 좋은 것은 어떻게 가질 것이며 싫은 것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과 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서 만들어진 생각과 말로 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열려있는 마음의 상태는 결코 사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나의 나라를 살고자 하지만 정작 나의 생각은 만들어지지 못합니다. 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은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대처 또한 세상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책으로 전해지든 입으로 전해지든 이미 그 문제를 겪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들을 내 것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말들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 같아도 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서 석학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우리가 도움이 되는 판단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방향과 방식에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의 나라를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나라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실제로 나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좋음과 싫음의 느낌을 따라 지정의를 움직여 생각과 말을 만들고자 할 뿐입니다. 실제로는 비슷한 문제를 겪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생각과 말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의 부화뇌동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나와 공통된 문제로 생각을 제시하면 그것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선동에 넘어가는 모습입니다. 나의 나라를 살겠다는 윤곽만을 정해놓았지 실제로 나를 살지는 못합니다.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해 A라는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A라는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나답게 살 수도 없으며 유일한 나도 없습니다. 마치 유행하는 똑같은 상표의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다수에 속하는 것은 안정된 믿음을 줍니다. 틀리지 않을 것이고 괜찮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믿음을 위하여 유행하는 옷을 사듯이 다수에 속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군중심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점퍼 하나를 살 때도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과 뜻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 점퍼가 길거리에 놓고 떨이로 파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광화문 지하도에서 산 버버리 코트를 30년이 넘도록 입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입는 브랜드의 점퍼를 사야만 안심이 됩니다. 그래야만 다수에 속하고 처지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당시 돈으로 13,000원으로 샀던 버버리 코트는 30년을 입었지만 만족스럽습니다. 좋은 옷을 싸게 잘 샀다는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과 연관하여 옷 한 벌에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의 상황과 문제들에 대해 생각과 말씀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생각과 말씀은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이기에 유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생김새가 유일하듯이 ‘나’라는 사람의 인격에 맞춤형으로 생각과 말씀을 주십니다. 여기에는 세상의 선동이 개입될 수 없고 부화뇌동이 나타날 수 없으며 군중심리가 표현될 수 없습니다.
75억 인구 전체가 동쪽으로 가더라도 나를 위해 맞춤형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생각이 서쪽으로 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평생을 살면서도 자기를 살아보지 못합니다. 옷 하나, 물건 하나를 살 때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이렇게 자기를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은 곧 육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육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영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과 마주하게 되는 영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면 이 땅에서의 삶 또한 반드시 변화하게 됩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순간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생각과 말씀을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 맞춤형의 유일한 생각과 말씀을 따르는 삶은 진정한 의미에서 나를 사는 것이고 유일한 내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과 나의 영이 마주하는 영의 구원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유일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과 말을 만들어내겠다는 윤곽만을 가졌을 뿐이지 실제로는 온통 세상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받아들여서 따라가며 내가 없는 나의 나라를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 때만 유일한 나는 보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며 독특하고 유래가 없는 유일무이한 나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은 누구와 비교해서 못날 수도 없으며 훌륭할 수도 없는 가장 독특하고도 유일한 가치로써 삶이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영의 구원의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육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맞춤형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을 받아들여서 물건 하나 살 때도 유일무이함을 드러내는 영육구원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좋으심이 허락하시는 유일무이한 생각과 말을 하며 사는 존재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더 이상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에 좌우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