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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예언대로 사는 삶, 예언적으로 사는 삶_태승철 (사도행전 21:1~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9.09|조회수59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언대로 사는 삶, 예언적으로 사는 삶>의 줄거리:

예언대로 사는 삶, 예언적으로 사는 삶.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네 차이가 아주 크지요. 예언을 하지 못 해도, 또 예언하는 사람에게 미래의 내용을 듣지 못해도, 예언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언을 하고 예언을 들었을 때 그 예언대로 사는 삶은 정말 위험합니다. 예언대로 사는 삶은 예언을 허락하시는 근본 취지에 대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예언대로 사는 삶, 예언적으로 사는 삶

(사도행전 21:1~16)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언대로 사는 삶, 예언적으로 사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언대로 사는 삶, 예언적으로 사는 삶’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당할 환난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4절에서는 두로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행 결심은 예언적으로 사는 삶의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을 하지 못하더라도 예언적으로는 살 수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가 귀중한 것은 분명하나 예언적으로 사는 것이 더 귀중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지자들처럼 예언은 하지 못하더라도 예언적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허락하신 궁극적인 목적 또한 예언적 삶을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는 언뜻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4절을 보면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가 읽은 10~11절에서도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앞서 본 11장에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임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던 인물입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행위예언을 통해 가르쳐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주어진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습니다.

두로의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의 예언이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었듯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굽히지 않았던 바울의 태도 또한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20장 22~2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권면을 할 때에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또한 두로의 제자들이나 아가보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예언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행을 고집하는 바울의 태도는 성령이 주신 예언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언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언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자면 제자들이나 아가보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예언으로 받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것까지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베드로가 십자가 사건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을 만류하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제자들은 그저 사도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만류했던 것입니다. 결박과 환난이 발생할 것을 알았다면 피해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얼핏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주어진 예언 앞에서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제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언대로 사는 삶이 있고 예언적으로 사는 삶이 있습니다. 예언대로 사는 삶이 제자들처럼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며 따라가는 삶이라면, 예언적으로 사는 삶이란 사도 바울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특별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언적 삶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예언을 직접 받지는 못하더라도 예언이 존재하는 이유 또한 이와 같습니다.

 

예언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사야나 예례미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선포했습니다. 이로부터 예언에 무관심한 것, 예언대로 사는 것, 예언적으로 사는 것으로 대표되는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예언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예언 자체를 믿지 않고 무시하거나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의 평강하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믿었습니다. 한편 예언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언을 받아들이지만 인간적인 반응을 합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올 것이 예언되었으니 망하지 않기 위해 대비책을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군사력을 키우고 무기를 수입하고 외교력을 발휘해서 전쟁을 막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제자들에게서 나타났던 예언대로의 삶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특징은 마음이 미래를 향해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위해 지금 준비를 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언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29장 13절을 보면 이사야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이사야 선지자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할 것을 예언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미래가 아닌 현재의 잘못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내야 할 곳은 미래가 아닌 현재입니다. 바로 현재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입장과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 이사야 예언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지금도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의한 멸망 예언이 내려진 시점에서 유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니었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군사력을 기르고 외교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바꿀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이 주어졌던 근본적 취지였습니다.

결국 선민이 관계를 맺어야 되는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입장과 태도는 지금 하나님과의 거리를 없애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는 말씀이 지적하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시며 바라신 것은 선민과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없어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는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마음 사이에는 몸이나 건강도 끼어있어서는 안 되고, 가족도 끼어있어서는 안 되고, 내가 하는 일이나 사업도 끼어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밀착되어서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거리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몸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도 올바른 입장과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언의 취지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로 하여금 올바르고 마땅한 태도와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에 대한 예언을 못하고 다른 사람의 예언을 듣게 될지라도 예언적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예언은 소중한 은혜입니다만 예언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예언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나의 마음의 거리를 없앰으로써 그로부터 비롯된 입장과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모든 선지자의 예언은 지금 현재 나의 올바른 입장과 태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입장과 태도는 나의 마음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거리가 없어진 상태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들어와 있는 대상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너의 마음은 밀착되어야 한다. 설령 자녀나 배우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너의 마음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을 없앰으로써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언적 삶의 모습이 사도 바울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반복된 예언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언대로의 삶을 살고자 했다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언대로의 삶이란 마치 점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점집에 가서 무당에게 점을 보면 미래를 예언하고 대책을 마련해줍니다. 액땜을 위해 굿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미래에 대처하고자 합니다. 이들의 관심의 대상은 지금이 아닌 미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성령께서 주신 예언에 대해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기껏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예언을 받고서도 그 예언의 주어진 취지를 염두에 두지 못한 채 그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바꿔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한 예언을 받고서도 무당에게 점을 보고 굿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예언대로 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언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예언적 삶을 선택합니다. 미래를 알면서도 미래에 있을 일을 대비하지 않고 지금 취해야 할 올바름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나를 보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거리를 더욱 좁히는 일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하루에만 일어나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일이 되면 또 다시 하나님과의 거리를 없애기를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언의 취지에 올바르고 합당하게 반응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예언적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사도 바울은 성령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바울은 결과적으로 미래만을 바라보는 예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박과 환난을 당할지라도 예언에 올바르고 합당하게 반응하는 예언적 삶을 살아가기를 선택합니다.

사도 바울이 관심을 두었던 대상이 지금 나를 보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듯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대상도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의 거리 좁히기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을 통해 가능합니다. 바울은 몸부림을 치는 십자가 작정을 하고 나실인 서약을 지켰습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심정으로 마음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으로 들여보낼 때 하나님과의 거리는 없어지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우리가 지금 취할 수 있는 올바름입니다. 이렇게 내일도 모레도 올바름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설령 그 마지막에 바울과 같은 환난이 있을지라도 받아들임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여준 올바름을 이어가는 예언적 삶에 대한 마음의 결심은 배워 마땅하며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20장 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본문 13절에서는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뿐인 목숨을 던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제 살펴보았던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던 이유에는 또 다른 측면에서 두 가지 복을 완성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복이란 받는 복과 주는 복입니다.

받는 복은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받으려야 받을 수 있는 복이 없습니다. 내가 받아서 누릴 수 있는 복이 아예 생산되지 않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철철 넘치는 원유가 우리나라에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에서 철철 넘치는 복이 이 세상에서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이 없는 세상에서 복을 완성하고자 하였습니다. 몸부림을 통한 십자가 작정으로 천국에서 받는 복을 완성하려 하였고, 복이 완성된 증거는 땅에서 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집도 재산도 사회적 지위나 권력도 없었습니다. 무엇이든 가진 것이 있어야 줄 터인데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가진 것은 몸 하나뿐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신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전하고자 했고, 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당신을 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천국에 계심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부수적으로 주어야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이 없는 세상에서 몸 하나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을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는 복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땅에서 원유가 나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받을 복이 없는 곳이 세상이기에 바울은 몸 하나만 있어도 복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몸부림을 통한 십자가 작정으로 마음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동안 하나님과 마주하게 되었고 천국에서 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복이 없는 이 세상에서 줌으로써 복을 완성하고자 하였습니다. 천국에서는 복을 받아 누리고 땅에서는 복을 주어 완성시키고자 했던 복의 욕심쟁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올바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내려다보실 때 발견하실 수 있는 올바름은 하늘에서 복을 받고 땅에서 복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몸부림을 통한 십자가 작정과 이 세상에서는 받을 복이 없고 좋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자각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 안으로 마음을 보냄으로써 부활 승천 우편까지 따라 올라가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힙니다. 바울은 이렇게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마주하는 관계를 극대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될 때에 땅에서는 천국의 복을 받은 증거가 나타나게 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게 됩니다. 천국에서 많은 복을 누리고 있음의 증거는 이 땅에서 많이 주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타인을 위하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자기 몸입니다. 세상에서 이 몸을 보전하고 유지하면서 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서 기쁨을 얻고 복을 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결핍감과 부족감과 상실감과 피해의식에 찌들어 살게 됩니다. 아무리 복을 얻으려고 하여도 얻을 수 없기에 평생을 거지근성에 붙들려 항상 굶주린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세상에서는 내가 받을 복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주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타인에게 유익이 될 것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저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라고 계속해서 묻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땅에서는 타인에게 줄 것이 몸 하나 남아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의 몸 하나까지도 타인을 위해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주는 것을 확대해가고자 했던 바울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복을 주셨고 바울은 하늘과 땅에서 복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주는 것과 하늘에서 받는 것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몸부림을 통한 십자가 작정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았기에 타인에게 몸까지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몸까지 주겠다는 결심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기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미 마음에서 자기의 몸조차도 잘라냈습니다. 잘라냈기에 언제나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해 몸조차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집도 있고 재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이것을 지금 당장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일에 대해서도 순간순간 하나님의 지시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올바름은 세상에서는 받을 복이 한 방울도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게 주어진 것이라면 집이나 재산이나 권력이나 몸까지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줄 수 있는 재고목록이 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박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받을 수 있는 복은 하늘에만 있습니다. 몸부림을 통한 십자가 작정으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 세상의 박리가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고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잘라낸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한 재고목록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몸까지도 재고목록에 포함되기에 아까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복음을 전할 때에 주저함 없이 몸까지도 내놓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몸부림을 통한 십자가 작정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이루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받을 복이 한 방울도 없는 곳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통째로 받는 복을 누리실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하나님을 통째로 받았다는 기쁨에 이르지 못했을지라도 몸부림을 치며 십자가를 붙들 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과 인간관계에서 받을 것이 있다고 여기는 한 천국과의 연결은 끊어집니다. 이것을 알기에 십자가를 붙들 수 있습니다. 또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받으려 하지 않고 어떻게 유익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받을 복이 한 방울도 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주는 복을 완성시킬 수 있는 간단한 비결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하나님, 어떻게 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줄 수 있겠습니까? 길을 열어주시고 줄 수 있는 재료를 주시고 지혜를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쉬지 않고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매순간 지속되어야 할 올바름이고 예언적인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주신 취지는 지금 나를 보고 계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거리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 거리를 없앰을 통하여 이 땅에 나타나는 올바른 입장과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못하더라도 더 크고 중요한 예언적 삶은 이루어져만 합니다. 예언적 삶을 통하여 위로는 받는 복을 완성하고 아래로는 주는 복을 완성해가는 복의 완성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에 빠져 죽는 예수의 이름 세례에 목숨을 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천국에서 받을 복을 완성하게 하시며, 이 땅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주는 복을 완성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셔서 예언적 삶을 사는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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