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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하나님 단독 대면 위한 모든 종교 무용론_태승철 (사도행전 21:17~4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9.11|조회수36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단독대면 위한 모든 종교 무용론>의 줄거리:

유대인들의 사도 바울 박해가 참으로 끈질겨 그 끝이 없습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선민들이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더니 이제 그 아들의 참 종인 사도 바울을 죽이지 못해 몸부림을 칩니다. 이 상황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 자신이 이루기도 하고 전하기도 한 하나님 나라와 모든 종교의 결별입니다.

 

하나님 단독 대면 위한 모든 종교 무용론

(사도행전 21:17~40)

 

27.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28.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29.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

30.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31.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32.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

33.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

34.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36.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단독 대면 위한 모든 종교 무용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단독 대면 위한 모든 종교 무용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에 있어서 모든 종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종교 안에는 천주교와 개신교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조차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에 소용이 없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바울이 전도를 했던 이방지역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예루살렘에 와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전도했던 이방지역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온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잡아 죽이고자 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앞부분에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인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도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들 또한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의 말을 듣게 되었고 이에 대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악착같이 사도 바울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자 이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한편 이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20절에서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수만이라는 표현이 대략적이기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교인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유대종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유대종교를 벗어나지 못한 채 관습을 지키는 일에 열성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지에서 살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바울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적 그리스도인들 또한 바울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 소문의 내용은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전히 유대종교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 채 열성을 보이던 자들도 이러한 소문에 휘둘려 사도 바울을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던 장로들은 제안을 하게 됩니다. 22~23절을 보면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머리를 깎는다는 것을 보면 여기서 서원이란 나실인 맹세를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나실인 맹세를 한 네 사람과 함께 결례 의식을 행함으로 유대종교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점을 보인다면 사람들의 오해도 풀릴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십자가 작정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으로 나실인 맹세를 지켜 행했고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깍은 적이 있었기에, 나실인 맹세의 취지와 교회의 덕을 위하여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당시는 오순절 기간으로써 이방지역에서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바울의 전도에 불만이 많았던 이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체포하게 합니다. 앞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의 예언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소동의 원인으로 지목된 바울은 로마의 천부장에게 붙잡혀 감금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려 5년 동안 감금 생활은 지속됩니다. 2년 동안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감금되었다가 3년 가까운 기간은 감금된 채로 로마로 호송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로마에 도착한 후에는 마지막 생의 사역을 마치고 순교하게 됩니다. 이제 28장까지 이어지는 사도 바울에 대한 언급은 감금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무려 7장을 할애하여 사도 바울이 감금된 상태에서 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성령의 감동을 통해 감금된 기간의 사도 바울에게 집중한 주제는 종교와의 결별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스스로 이루었으며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의 결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유대종교가 대표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유대종교와 결별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조차 모르는 다른 종교는 말할 필요도 없이 결별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는 상태가 유지될 때에 이 땅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와 종교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습니다. 기독종교에 속하는 개신교나 천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개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살아감에 있어서 종교는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단독 대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단독 대면할 수 있는 상태가 곧 구원의 상태이며, 그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고 또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예수님 안으로 들여보내면 마음은 천국으로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것이 유지될 때 하나님과의 친해짐은 더해가고 하나님과의 일체됨이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 생활화뿐입니다. 종교의 시스템, 종교적 가르침, 종교적 율법이나 규율, 종교적 관습, 종교적 행사나 프로그램,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 등의 모든 종교적 요소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입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복음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종교의 모습은 이러한 복음을 방해합니다. 하나님과 단독으로 대면해야 되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습니다. 종교라는 단체에 소속된 일원으로 만들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게 합니다. 유대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이것을 의식하였든지 못하였든지 결과적으로 개인이 하나님을 단독으로 대면하는 것을 막았고 하나님 앞에 머물러야 할 마음을 빼앗아서 종교체계 안에 가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에 대한 탄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유대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단독 대면하는 것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 할례, 정결예식, 안식일 규정 등은 본래 하나님과의 단독 대면을 위해 제시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형식과 관습이 되어버리자 하나님을 대면함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행사로 전락하고 맙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바울이 모세를 배반했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무용론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모세를 배반하거나 율법의 무용론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배반하는 것은 모세가 제시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 유대종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취지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대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의 무용론으로 비추어졌던 것입니다. 율법의 온전한 정신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지켜지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유대종교가 종교의 대표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난 설교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강론에서 예언과 방언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언어적 차원에서 예언과 방언은 나의 바깥에서 만들어져서 나의 안으로 주어지는 언어입니다. 이는 곧 나의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여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나의 나라를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제시된 선동의 언어, 부화뇌동의 언어, 군중심리의 언어를 통해 내가 아닌 남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치밀하게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유두고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건을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3층에서 떨어진 유두고는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관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객관적 판단보다도 하나님의 생각을 먼저 받아들이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임은 이 정도로 치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유두고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대표되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유언처럼 하신 말씀에서 받는 복과 주는 복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유익함의 개념이 완전히 뒤집어져야함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내게 유익을 추구하는 길이 무엇인지가 새롭게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체질을 칼로 끊어내기 위해서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사도 바울의 행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묘사해 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행적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전도 받은 사람들에 대한 것을 묘사하기보다는 주로 전도하는 사도 바울을 묘사했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그리고 전도 대상이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전도를 잘 받아들인 경우보다는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박해하고 곡해한 경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에는 사도 바울을 교인의 대표로써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종교와의 결별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결별해야 될 대상은 본문에 나타난 유대종교뿐만이 아닙니다. 유대종교는 물론이거니와 기독종교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로부터 결별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종교와의 결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 활동의 결과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적인 만남에 기초합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또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단독 대면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두 번에 걸친 만남이 하나님 나라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단독 대면하는 일이기에 종교라는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종교의 관습을 지키려는 유대인들과 십자가 복음을 지키려는 사도 바울의 충돌은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단독 대면하는 관계를 유지해나감으로써,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종교와의 결별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마음에서 거부감이 드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결국 이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기독교든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힌두교든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에 속했다면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이 땅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신과 내세를 나의 나라 안으로 끌어들여서 만든 인위적 체계입니다. 종교에서는 신이나 내세 혹은 영과 같은 언어의 개념을 끌어들여서 인위적인 체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언어의 체계 속에 사람을 가두고자 합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언어체계에서는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실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철저하게 봉쇄됩니다. 쉽게 말해 종교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여둔 집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언어체계로 집을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머물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집에 갇혀있는 동안에 실제 하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과 만나고 싶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붙은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단독 대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혹은 종교를 감옥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단독으로 대면하는 상황을 방해하고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서 하나님에 관한 언어로 만들어진 감옥 속에 넣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감옥에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감금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감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종교는 하늘에 관한 언어로 만들어 놓은 이 땅에 있는 인위적인 체계입니다. 하늘에 관한 언어로 철저히 위장된 세상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에 속해있는 한 절대로 그리스도의 연쇄과정 속의 예수님과 하나 되어서 이 세상을 탈출할 수 없고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가서 하나님과 단독 대면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이 세상에 속한 하늘의 언어로 위장된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위적인 언어체계에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종교체계가 반드시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에서는 실제 하나님을 단독 대면하는 일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이 땅에 붙박이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땅에 가두고자 합니다. 위장전술로 하늘이라는 이름의 감옥을 만들고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의 수감생활을 하늘과 관계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한 결코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 되어 세상을 탈출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단독 대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복음입니다. 개인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하나님과 단독 대면할 수 있는 위치까지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지속될 때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전달되는 하나님 나라는 진행됩니다.

예를 들어 한 아가씨가 가족들과 함께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 될 사람이 지방의 유서 깊은 집안의 출신입니다. 이제 이 아가씨가 마주하게 되는 유서 깊은 집안의 며느리의 삶은 서울 아파트에서의 삶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며느리의 삶이라는 표현에서 연상되는 답답함이 있기에 이 비유가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변화도 이렇게 클진대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는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은 결혼과 같습니다. 그리고 결혼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나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서 천국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예수님이 마주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대면하게 됩니다. 이제 천국에 올라간 나의 마음에서는 세상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 이 땅에서 몸으로 살고 있는 삶에도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결혼이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인 것처럼 예수님과의 연합은 철저히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신랑과 신부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듯이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종교가 만들어 낸 가르침이나 체계나 관습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결혼해서 하나 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단독 대면할 때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는 종교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소속되고 싶으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종교의 관습을 벗어버리고 싶지 않으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시길 바랍니다. 종교는 땅에 속한 것입니다. 땅에 속했기에 세상을 탈출하지 못하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예수님과의 결혼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대면하는 일은 종교의 일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는 예언이나 방언과 동일한 본질을 갖는 하나님 나라의 언어를 통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받는 복과 주는 복이 뜻하는 대로 복의 개념이 뒤집힌 상태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유익의 개념 또한 뒤집힌 상태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것이 유익인 줄 알았던 삶이 뒤집혀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을 주고자 하는 삶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는 이러한 개인적인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떤 식으로든 종교와는 무관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종교적 관습을 배척한다는 오해에서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했던 복음에 대한 박해는 결과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박해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단독 대면하면서 하나님을 내 마음의 채움과 좋음의 대상으로 갖고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는 삶은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의 사도 바울의 행적에서 드러난 몸부림을 통한 십자가 작정을 정리해봅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하늘의 언어를 받아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세상의 언어를 받아들여서 선동과 부화뇌동과 군중심리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언어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유두고의 죽음과 살아난 사건을 통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객관적 사실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우선되어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80리 길을 걸어간 사건을 통하여 마음은 어떻게 하든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야 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에서 주는 쪽으로 유익을 구해야 하며 받으려 해서는 오히려 손해가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고, 미래지향적인 체질을 칼로 끊는 예언적으로 사는 삶이 이루어져야 함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나의 나라를 살던 습성은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단독 대면을 방해하는 고질적인 방해물로써 종교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종교는 하나님 나라에 가장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 요인입니다. 이 이야기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사도행전의 마지막까지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이처럼 무서운 요소입니다. 나의 나라를 살던 습관 중에 가장 악랄한 것이 바로 종교에 의존하는 성향입니다. 종교는 개인적으로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황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하늘 언어로 위장된 언어체계로 하늘에 올라가야 될 마음을 땅으로 끌어내리고, 하늘로 올라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마음을 땅에 묶어두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바울의 행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목록이 제시되었습니다. 세상의 언어로부터 시작하여 미래지향적인 습관과 마지막으로 종교에 귀의하고 종교를 의지하려는 체질은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종교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는 가장 무서운 라이벌로 들추어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종교인의 습성과 관습과 의식은 버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를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개인적으로 십자가 예수님을 신랑 삼아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마주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모시고 단독 대면할 수 있게 됩니다. 종교는 이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최대의 적입니다. 종교는 가짜 언어체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속이고 있습니다. 종교의 세를 늘리고 배 불리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땅에 가두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금되었던 것같이 사람의 마음을 감금시키는 것이 종교임이 본문을 통해 제시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나라가 나 개인의 삶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신 최대의 적인 종교로부터 온전히 해방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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