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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영이 바뀔 뿐이지 사람은 안 변한다 _태승철 (사도행전 2장 1절~13절)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5.01|조회수14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이 바뀔 뿐이지 사람은 안 변한다>의 줄거리: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의 표징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이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령이나 악령도 직접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나 악령이 사람에게 말하도록 할 뿐입니다. 사람의 인격은 성령이나 악령이 원하는 열매가 맺히는 밭입니다.

 

영이 바뀔 뿐이지 사람은 안 변한다

(사도행전 2장 1절~13절)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이 바뀔 뿐이지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이 바뀔 뿐이지 사람은 안 변한다’

사람이란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육체가 죽은 다음에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의 체질을 벗어버릴 수 없습니다. 제목에서 “사람은 안 변한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죄의 체질은 악으로만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체질이 묶인 상태에서도 선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죄의 체질을 묶는다는 것은 마치 고혈압 증세가 있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약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혈압을 제어하는 약을 먹음으로써 고혈압의 증세가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살아있는 한 죄의 체질은 제거될 수는 없지만 제어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본문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1장을 통해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남의 이야기로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성령 충만은 선민에게서 일상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흔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사건으로 여겨집니다만, 앞선 말씀으로부터 드러나듯이 성령 충만을 원한다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뿐만 아니라 1장부터 이어져 온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적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교회와 교인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령 충만 자체를 받는 방법을 설명하기보다는 성령 충만으로 나타나게 된 교인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특히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4절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른 언어들’이란 외국어를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언급된 방언이란 하나님께서만 들으실 수 있는 영적 언어를 의미합니다만 본문에서 말하는 다른 언어란 말 그대로 외국어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각 지방이나 나라에서 쓰는 언어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은 어떤 외국어를 말했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제목에서 “영이 바뀔 뿐이지 사람은 안 변한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한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변하게 됩니다. 다만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말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은 직접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는 악령의 말을 따랐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악령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말하도록 하시든지, 악령이 말하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먼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성령을 불의 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말이 나오는 기관으로써 사람의 언어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말은 한 사람의 인격을 대표하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인격의 상태가 말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모습이 불의 혀처럼 임했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격이 성령에 의해 지배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가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악령에 의해서 말하게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령에 의해서 말하는 사람은 인생을 빼앗기고 영생을 빼앗깁니다. 돈을 버는 것, 건강을 유지하는 것, 형통을 꾀하는 것, 승진을 추구하는 것은 본래 인생과 영생에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추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나를 지배하는 영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영이 바뀌면 추구하는 가치 또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랐다는 말씀을 인격적으로 각 분야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령이 행동하게 하심을 따라 행동하고 반대로 악령이 행동하게 함을 따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내부에서 관찰해보면 성령이 생각하게 하심을 따라 생각하는 것이고, 악령이 생각하게 함을 따라 생각합니다. 또 성령이 느끼게 하시는 것을 따라 느끼고, 악령이 느끼게 하는 것을 따라 느끼게 됩니다. 의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지정의와 언행은 스스로 발현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의 비유는 사람의 지정의와 언행을 악령에게 빼앗긴 상태를 의미합니다. 악령에게 지배되는 지정의와 언행을 통해 살아가는 인생은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보배로운 생각이 가득한 인생을 잃어버린 것이고 영생마저 잃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악령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하는 상태에서는 악을 지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본문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단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앞서 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세례를 약속하셨고 또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살펴보았던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해야 될 기도에 대해 강조하였습니다. 본문은 성령과 악령과 사람관계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이전에 악령의 지배를 받을 때는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본 본문 1장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순절이 되어 제자들은 성령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필이면 오순절 날에 성령 충만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오순절의 상징성을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오순절(五旬節)은 ‘오십’이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의 첫 번째 안식일로부터 50번째 날입니다. 유월절에서 49일이 지났다는 의미에서 7 곱하기 7을 의미하는 칠칠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 이때는 밀 수확이 끝날 무렵이기에 맥추절이라고도 부르고 열매를 드리는 날로써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출애굽을 한 후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오순절은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있음과 동시에 율법을 받았음을 기억하는 날짜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열매와 율법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좋아하고 사랑하도록 선택받은 선민에게서 나타나야 될 인격적 열매를 기록한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오순절은 추수감사절과 같은 의미로써 열매와 연관이 있으며,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예수님 당시까지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날로서의 의미까지 포함시켜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교회가 탄생하고 교인이 나타나게 됩니다. 즉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면서 성령에 의해 열매를 맺는 사람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이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악령에 의해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열매라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밖으로는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내게 됩니다. 즉, 지정의와 언행은 인격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인격으로 번역될 수 있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ōna)는 로마 사람들이 연극에서 사용하던 가면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영어의 사람(person)이나 인격(personality)과 같은 표현들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인격을 뜻하는 페르소나가 가면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면 인격이란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확인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각이나 성격 혹은 말과 행동의 경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인격의 열매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입니다.

앞서 사람의 인격은 성령이나 악령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도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악령도 직접 말하지 않고, 사람도 직접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든지 악령이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입니다. 자기 스스로 말한다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접촉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닌 사람은 다른 존재를 통해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때 사람은 가장 큰 괴로움을 느낍니다. 마치 발이 닿지 않는 심연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모습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다못해 강아지라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강아지의 존재를 느낌으로써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있음의 접촉면이 하나님의 크기로 되어있기에 언제나 사람은 자기 존재감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도 하나님보다 작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마음은 육체를 통해 만나는 세상 것들에 대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게 될까요? 이것이 바로 유전 죄의 체질입니다. 그리고 이 체질을 자극하여 추진하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악령의 역사입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마음이 무엇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이 사이를 잇는 것이 악령입니다. 죄의 체질로 인해서 세상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체질을 자극하여 부추기는 악령의 지시를 받아서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를 움직여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죄의 체질로 인해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려는 상태를 주님의 십자가로 우선 멈추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세상에 대해서는 있음을 느낄 수 없고 좋음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오셔서 마음에서 있음을 느끼는 접촉면과 좋음을 확신해서 채우려고 하는 마음 공백의 작용 방향을 하늘을 향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생각도 감정도 의지도 말과 행동도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려는 죄의 체질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이 체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의 동일시를 통해서 제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체질을 따라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열매를 맺게 방치하는 것은 악령의 지배를 용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멈출 수 있도록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에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로 여길 때에 죄의 체질은 멈춰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격적으로 동의할 때에 성령께서는 오십니다. 나에게 죄의 체질이 있음을 알고 그 죄의 체질이 십자가에서 죽기를 원할 때 성령께서 오셔서 나의 인격을 지배하십니다. 성령께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에서 드러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이 바뀔 때 열매가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한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려 하는 죄의 체질은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십자가로 죽었음을 인정하여 억제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죽음의 효과를 실제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나의 인격을 지배하시며 생각하게 하시고 감정을 느끼게 하시고 뜻하게 하시고 말과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교인입니다. 교인은 성령에 의해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뜻하며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또 중요한 어휘가 하나 등장합니다. 2절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홀연히’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즉 예측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성령세례, 성령 충만, 성령강림을 약속받았지만 언제 약속이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는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기억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길은 성령이 내려오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홀연히 오십니다. 홀연히 오신다는 것은 곧 우리의 주권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우리의 지침이나 간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령강림의 주도권은 나에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성령강림은 홀연히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곧 성령은 나의 심부름꾼의 입장으로 오시는 분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나의 요구의 따라 기계적으로 오시는 분도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일에 충실하면 성령께서 홀연히 오셔서 내 인생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해 가십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강도 만난 자와 같습니다. 악령이 주도권을 쥐고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며 무엇을 하고자 의지합니다. 기뻐해도 악령에 의한 것이고 슬퍼해도 악령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강도 만난 상태에서 나의 주체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강도 만난 사람처럼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나의 죄의 체질을 파악하고 이러한 체질을 부인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해 제시된 하늘을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일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체성은 선택에서 끝나게 됩니다. 악령이 지배하는 상태로 살 것인가, 성령께서 지배하시는 상태로 살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죄의 체질을 인정하고,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는 자가 되겠다고 선택하고자 한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삶의 현장은 성령의 주권이 임해야 할 장소입니다.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직장생활을 하는 등의 모든 일은 성령이 주도하시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악령이 주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면 이미 악령에게 인생을 빼앗기고 영생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당장 이것을 체감하지 못할지라도 인생과 영생을 빼앗긴 결과는 언젠가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강림이 홀연히 이루어졌다는 것은 악령이 주도권을 쥐든지 성령이 주도권을 쥐든지 내 인생은 다른 영에 의하여 지배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약속된 성령을 소원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의식 속에서 첫 번째로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하며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기를 원한다는 주체성을 발휘할 때에 성령께서는 홀연히 강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주체성이 발휘되어야 할 영역은 무척 좁습니다. 죄의 체질은 세상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령은 세상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며 역사합니다. 세상을 추구하고 바라기 시작하면 악이 됩니다. 그러한 나를 알고 부인하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하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아있는 자가 되고자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만 있음의 느낌과 좋음의 확신을 적용하고 하나님만을 소원하는 것만이 나의 주체성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거나 악령의 역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와 교인의 탄생 사건입니다. 오순절은 열매와 관계된 날입니다. 사람에게 맺힐 수 있는 열매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이며 말과 행동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열매가 겉으로 드러나는 말입니다. 말을 통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드러내며 말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매를 뜻하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성령이 말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순절이 의미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오순절에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의 대표인 말을 하는 모든 곳에서는 성령이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인은 말이라는 열매로 결정됩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살 때 교인이냐 아니냐를,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홀연히’라는 단어가 뜻하는 대로 인생은 어차피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악령이 살거나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성령이 사시는 상황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영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지금 말하게 하는 것이 악령인가 성령인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하든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의 자아의식이 분명하다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희미해진다면 여러분의 말이 아닌 악령이 하게 하는 말입니다. 아무쪼록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을 하며 사는 진정한 교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우리의 일상이 되게 해주셔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만 말을 하는 사람들로써 이 세상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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