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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소금과 빛 되는 보람, 기독교는 모른다_태승철 (사도행전 23:1~3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9.15|조회수53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소금과 빛 되는 보람, 기독교는 모른다>의 줄거리:

나는 종교인인 한 절대로 사람들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소금이란 지금 천국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됨을 유지하면서 사람들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살아계심의 기운을 발산하는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종교인으로 인식되면 내 하나님도 종교에 갇혀버려 발산될 수가 없게 됩니다.

 

소금과 빛 되는 보람, 기독교는 모른다

(사도행전 23:1~35)

 

22.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알렸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 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기병 칠십 명과 창병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소금과 빛 되는 보람, 기독교는 모른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소금과 빛 되는 보람, 기독교는 모른다’

우리가 읽지 않은 앞부분에서는 사도 바울이 산헤드린공회에서 자기변호를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공회의 분위기는 험악하였으나 바울은 이 기회에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 복음과 관련된 사항을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바리새인들이 공회원들로 끼어있던 것을 계기로 삼아 부활을 언급하였고, 이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공회는 무산되었습니다. 이제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사도 바울을 죽이는 일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을 중심으로 한 사십여 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생질을 통하여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로마의 천부장 또한 이 음모를 알게 됩니다. 천부장은 로마시민이라고 밝힌 바울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인 사백 명과 칠십 명의 기마병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90km 떨어진 가이사랴까지 바울을 호송하여 총독 벨릭스에게 재판을 받게 하고자 조처를 취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중에서 천부장 루시아에게 바울 암살 계획이 전해지는 부분부터 천부장이 벨릭스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어 바울을 호송하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이고 빛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소금과 빛으로 산다는 것은 참 재밌고 즐겁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경전인 신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기독종교인이 된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참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안타까움은 사도 바울을 두고 벌어진 산헤드린공회의 험악한 분위기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모습은 익히 알려진 것이고 예상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부분이란 본문에 나오는 로마의 천부장인 루시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루시아는 사도 바울이 로마 사람임을 알았고 유대인들에 의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상황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을 지키기 위해 먼저 군인 사백 명을 동원해서 예루살렘에서 50km 떨어진 도시로 호송하고, 다시 칠십 명 기마병들에게 호위를 맡겨 40km 더 떨어진 가이사랴까지 호송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벨릭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바로 그 내용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부장이 로마법을 기준으로 볼 때 사도 바울에게는 결박하거나 죽여야 될 어떠한 잘못이나 죄가 없다는 무죄임을 확인하였다는 뜻입니다. 단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율법과 관계된 유대종교 내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입니다. 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 아무런 문제도 아닌 일로 인하여 종교 안에서 서로 죽일 듯이 싸웁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왜 그렇게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악랄할 정도로 온갖 계략을 짜내면서까지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배당 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싸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이러한 싸움 끝에 교파와 종파가 갈라지게 되었고, 장로교 내에서도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갈라졌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까지 올라가도 발견되는 다툼입니다. 칼빈과 루터와 츠빙글리 등은 성찬론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로부터 루터교나 장로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들이 이렇게 갈라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핵심이란 일상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의 핵심으로 복음을 붙잡고 있었다면 어떻게 칼빈파와 루터파로 나누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부장 루시아가 유대종교를 바라보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이로부터 종교가 루시아에게 주는 인상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29절을 보면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법 문제라 함은 이것이 유대종교의 문제일 뿐 로마의 법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천부장 루시아는 안타까운 상태에 처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종교가 그토록 받들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루시아에게는 한낱 유대종교의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루시아는 유대종교인이 아니라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겼고, 유대종교가 하나님의 이름을 독점하고 있다고 보았기에 하나님을 유대종교만의 신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에서 느껴지는 유대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시선입니다.

그렇기에 천부장 루시아는 유대종교와는 분리된 무관한 입장을 드러내었고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과도 분리되게 됩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천부장인 루시아를 지으신 분은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루시아가 가정에 있든지 공무를 집행중이든지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든지 하나님과는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다윗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루시아를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루시아는 유대종교로 인해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어디까지나 유대종교의 신으로 치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창조주가 지금도 루시아의 들숨과 날숨까지 주관하고 계신 중입니다. 결과적으로 유대종교는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루시아라는 한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자신들끼리 싸우며 하나님의 이름을 유대종교라는 언어체계 속에 감금시키고 있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천부장 루시아는 유대종교에서 일어난 일을 유대종교 내부의 사건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종교를 믿지 않는 자신과 로마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곧 삶의 영역 전체에서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대종교만의 신이라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으로부터 드러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현재 기독교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세상의 모든 사람에 대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구원자이십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십자가 예수님과 하나 된 자들 속으로 들어가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십자가 예수님과 성령님은 기독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독교 내부의 문제로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발생하는 오해는 광범위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창조론자들이다.”라는 말에는 이러한 편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진화론이나 빅뱅이론 같은 과학이론을 무시하고 그저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그 신이 자기를 만들었으며 들숨과 날숨까지 지배하고 주장하고 계신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 배경에는 기독종교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독점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독교의 전유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기독종교는 모든 사람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전유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기독종교가 만든 절차를 밟아야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예배당에 나가면 새 신자 교육을 받고 학습문답과 세례문답을 통하여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 다음에 권찰이 되고 구역모임에 열심히 참여하여 집사가 되어야 하나님께 복을 받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삶의 현장에서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가 끼어듦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배당의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배당 조직 안으로 들어가 종교인이 되어버리면 종교가 요구하는바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배당에 나와야 주일성수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처럼 종교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악착같이 끼어들어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넓혀버립니다. 천부장 루시아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손길은 루시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지배하고 있지만 정작 루시아는 그 하나님을 유대종교의 신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소금은 소금끼리 모여 있어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반드시 음식에 들어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소금 비유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말씀하신 뒤에 소금과 빛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되는 모습을 여덟 가지 측면에서 비춘 내용입니다. 그러한 삶에서 첫 번째로 주어지는 사명이 소금입니다. 소금의 사명은 반드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렁탕 속에 소금이 들어가야 의미가 있고, 삶은 달걀에 소금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난 기운을 발산하는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소금으로써의 삶은 반드시 사람들 속에 들어감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믿는 아버지가 자녀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자녀는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내려다보실 때 아버지는 소금이고 자녀는 삶은 달걀입니다. 이 자녀가 하나님 입맛에 맞으려면 소금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 앞에 있는 아버지가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 예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땅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사람 앞에서 소금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중에 사람을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을 의미 있게 보실 것입니다. 반대로 천국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고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노아의 홍수 때처럼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체가 됩니다. 이것은 마치 소금 없는 설렁탕과 같습니다. 회사에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이 없다면 백 명이 모여 있을지라도 이 단체는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회사에 있다면 이 사람을 통해 회사는 하나님께 의미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회사 안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의식하여 지속하는 동안에 백 명이 모여 있는 회사라는 단체가 비로소 하나님께 의미 있고 맛이 느껴지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흥미를 느끼시고 기대하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소금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회사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에 나로부터 하늘의 기운이 발산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곳은 성전이나 예배당이나 종교의 테두리가 아니라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금으로 세상에 들어가서 하늘의 기운을 발산하는 빛이 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기운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에 자녀는 삶은 달걀과 같습니다. 자녀 앞에서 소금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을 좋아하시고 맛있게 여기십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기운을 접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인이 된다면 소금과 빛은 될 수 없습니다. 종교인은 종교의 울타리만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설문조사를 할 때 기독교에 체크를 할 뿐이지 삶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종교인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스스로 훌륭하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았다고 여길지라도 정작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종교입니다. “저 사람은 제대로 된 기독교인이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자기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지으시고 호흡을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믿는 종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따라서 종교인이 되고자 합니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그렇지도 못합니다. 기독교인을 보고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독교인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을 뿐입니다. 불교도 늘어나고 천주교도 늘어나고 심지어 이슬람교도 늘어나는데 개신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안에서만 보아도 종교로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잘해봐야 종교를 전파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금과 빛의 삶이란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천부장 루시아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유대종교 내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하나님은 천부장 루시아는 물론이거니와 루시아의 가족과 자기가 속한 로마의 황제까지도 지으시고 주관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유대종교에 속한 신으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감금시키고 격리시키는 것이 종교의 폐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기독종교인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라는 체계 안에 머무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들도 마음속에서 예배당의 의미와 모임의 의미는 바뀌어야만 합니다. 이제까지 갖고 있었던 종교적 의미를 유지하는 상태에서는 바로 그 예배당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막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종교로써 예배당이 원하는 것은 자체의 번영과 확산과 견고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으로는 십자가 복음 안에 한 걸음도 들여놓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마음은 세상을 떠나야 하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한 상태에서 좋음과 싫음을 느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늘과 연결됨으로써만 소금이고 빛이 될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통해 하나님을 자기의 창조주이자 자기의 하나님으로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 사이에 기독교나 천주교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나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어야만 합니다. 소금과 빛의 사명은 사람들과 같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그들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그들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기운을 발산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게 소금과 빛의 삶이고, 이보다 보람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소금이고 빛이 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됨을 유지하는 동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평생의 사명이고 보람입니다. 오늘을 이 보람을 되찾는 첫 번째 날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 속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첫 번째로 의식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하늘의 기운을 발산하는 소금과 빛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게 해주는 기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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