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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예수님 십자가는 도(道)이며 도(刀)다_태승철 (사도행전 24:1~2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9.16|조회수44 목록 댓글 0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
예수님 십자가는 도(道)이며 도(刀)다>의 줄거리

살면서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길이 안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 십자가가 길입니다. 유일한 길이고 정당한 길이고 마땅한 길입니다. 인생의 길이고 삶의 길이고 모든 문제의 길이고 모든 상황의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이 세상 모든 종교와 철학과 사상과 문제, 그리고 삶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킬러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도(道)이며 도(刀)다

(사도행전 24:1~27)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6.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6하반-8상반 없음)

8.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9.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그들이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22.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23.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십자가는 도(道)이며 도(刀)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도(道)이며 도(刀)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호송되고 5일 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데려와 벨릭스 총독 앞에서 사도 바울을 정식으로 고발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발에 대해 변명하였고 이에 벨릭스 총독은 최종판결을 내리지 않고 재판을 연기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도 바울은 무려 2년 동안이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감금된 처지에 있게 됩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며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도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더둘로 변호사는 이를 두고 “나사렛 이단”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벨릭스 총독은 아내 드루실라가 예수님의 도에 대해 지극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 도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24절 이하를 보면 벨릭스는 아내와 함께 사도 바울이 전하는 도를 듣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본문에서는 “나사렛 이단”과 “이단”이라는 표현까지 합쳐서 십자가 도에 관한 이야기가 총 네 번이 언급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목에서 “예수님 십자가는 도(道)이며 도(刀)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도는 길이고, 뒤에 나오는 도는 칼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 십자가는 길이며 칼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는 삶의 길이기 때문에 또 칼이기도 하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가 길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왜 칼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길로 번역된 헬라어 호도스(ὁδός)는 말 그대로 길입니다. 더둘러 변호사가 나사렛 이단이라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이 길을 따른다고 하였으며 벨릭스 총독 또한 아내로부터 들어서 이 길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불러서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이 길에 대해서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길이라는 사도 바울의 변론의 요지는 “나는 그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의 도를 따랐을 뿐이다. 한 번도 유대종교를 해치려 했거나 로마에 반감을 품고 봉기를 일으키려 한 적이 없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자가의 도는 길인데 이 세상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를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서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는 상황을 위한 길을 찾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은 건강이 회복되는 상태로 가는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부활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바울은 양심을 따라 이 십자가의 길을 늘 걷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종교를 해친다든지 유대인들을 선동해서 로마가 중시하는 평화적 분위기를 깨는 봉기를 일으키려 한 적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변론의 요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은 종교나 단체나 국가에 대해서 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에 대해 반감이나 적의를 품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세상 바깥으로 뻗어있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찌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질 수조차 없었기에 “내 갈 길을 가기도 바쁜데 어떻게 유대종교를 해치려하고 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종교는 왜 변호사까지 앞세워서 바울을 로마제국의 총독 앞에 고발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이 부분이 참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뻗어있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같이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이 세상의 종교나 국가에 대해 반기를 들고자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의 길이 결과적으로는 종교나 국가에는 큰 압박과 위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럴 의도가 없었으나 유대종교 입장에서 보자면 가만 둘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십자가의 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에 미온적이었지만 제대로 알았다면 사도 바울을 가만두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가 제국을 다스림에 있어서 가장 중시했던 것이 평화였습니다. 어떻게든 안정적 분위기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의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고 이것은 로마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습니다. 더둘로 변호사는 이것을 알고 바울을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며 실제로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종교나 로마제국에 대해 전혀 해를 입힐 생각 없이 십자가의 도를 걷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바울을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걷게 된다면 발생하게 될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대종교의 변호사나 로마제국의 벨릭스 총독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손실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을 방치한 결과로 로마에는 복음이 전염병처럼 퍼지게 되었고 무수한 박해 속에서도 로마는 313년에 기어이 기독교 국가가 되고 맙니다. 물론 당시에는 아직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종교가 성립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역사적으로 편하게 기독교 국가라고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의 국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떤 나라도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없었지만 사도 바울이 전하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로마제국을 삼켜버렸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에서 세상 밖으로 뻗어있는 길입니다. 이렇게 세상 밖으로 뻗어있는 길을 간다는 것에는 무척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대단하게 여겨지는 모든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학문들은 각각의 영역에서 길을 찾고 있습니다. 결국 “어떤 길을 가야 인간에게 행복이 주어지는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주어지는 문제들이 문제로 여겨지는 이유 또한 길과 연관이 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기에 문제로 여겨지게 됩니다. 길이 보인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고 상담가가 존재하는 이유도 길을 찾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걷게 되면 마음은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문제가 하나 생겨납니다. 종교는 세상 안에 있습니다. 철학도 세상 안에 있으며 사상과 학문도 세상 안에 있습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나 상담가도 세상 안에 있습니다. 삶의 문제조차 세상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길이기에 이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종교와 철학과 사상과 학문과 전문가와 상담가와 문제들이 있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길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고 마땅한 길임을 믿습니다. 유일하게 올바르다는 것은 진리라는 의미이며, 마땅하다는 것은 반드시 걸어가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유일한 길이기에 올바르고 올바르기에 반드시 걸어야만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모든 존재들의 존재의미를 죽이는 칼입니다. 종교와 철학의 존재의미를 죽이는 칼이고 모든 전문가와 상담가의 존재의미를 죽이는 칼이 됩니다. 이 세상 안에 남아있으면서 자기 존재감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모든 존재들의 의미를 잘라내고 무효화시키고 없애버리는 칼로 작용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해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다고 변론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날마다 세상 밖으로 나있는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을 따라가느라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의도치 않았지만 십자가의 도가 유대종교가 세상에 존재해야 될 이유 자체를 잘라버리는 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길을 전도해서 걷게 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유대종교의 존재의미는 칼에 잘려나간 휴지와 같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대종교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철학이나 학문 등도 세상에 있는 한 이 칼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는 로마제국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총독 벨릭스는 절대로 사도 바울을 방치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가 로마제국의 뿌리까지 흔들 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전파되면 전파될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로마제국이 있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걷는 사람들에게는 로마제국의 존재감은 제로가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결국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의 국가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로마제국을 침공한 민족들에 의해서 정복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을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정복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돈 문제는 재벌에 의해 정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벌은 죽을 때까지 돈 문제에 헐떡거리다 죽는 사람입니다. 돈 문제는 돈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떠나는 십자가의 도를 걷는 자들에 의해서 정복됩니다.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문제를 아랑곳하지 않고 건강이 있는 세상을 떠나는 자들에 의해서 정복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 문제의 존재감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복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세상의 모든 길을 찾는 노력을 무효화시키는 칼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칼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돈을 벌게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의 뜻으로 이용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정복하게 해드릴 수는 없지만 돈 문제를 정복하게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돈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도록 해드릴 수는 없지만 건강 문제를 정복하게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돈이 없더라도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 의해 돈 문제는 정복되고 돈도 정복될 수 있습니다. 돈이 정복된다는 것은 돈이 있거나 없거나 돈에 취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방식은 종교, 철학, 학문, 전문가, 상담가 등을 찾는 노력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길을 찾는 노력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버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갈 수 있으며 가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심에도 나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연쇄과정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심장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신 보좌 우편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채워지기 위한 공백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 공백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로만 온전히 채워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로 마음을 채우는 교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나의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친분이 쌓여서 친해짐이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마음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늘에 이르러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몸으로 살아야 될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가 바로 이 세 가지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심장처럼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몸에서 심장과 허파와 위장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일부분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유지할 때에 마음은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과 마주하며 친분이 두터워지게 됩니다. 또한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몸으로 살아야 될 삶을 대신 살아가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걸었던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는 삶은 하나님이 살아가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가시기에 이 세상의 종교나 철학이나 학문이나 사상 혹은 전문가나 상담가의 조언이 전적으로 필요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애를 살아가실 때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처럼 여러 가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십니다. 나의 삶에서 필요한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전문가든 상담가든 누구라도 동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이것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자 이 세상에 대해서는 처자와 부모와 형제자매와 나의 목숨까지도 마음에서 잘라내는 칼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기 위해서는 처자와 나의 목숨까지도 잘라내야 할 판인데 종교나 철학이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학문과 전문가와 상담가가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길이며 칼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종교와 철학과 학문과 전문가와 상담가 등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강한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이러한 위협을 끼치겠다고 마음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따라 걸을 뿐인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도를 걸을 때 나의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나의 분깃이자 재산이자 몫으로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내 몸으로 살아야 될 삶을 하나님께서 살아가시는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의 성취를 위하여 모든 사람을 필요에 따라 주권적으로 동원해나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중에도 나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학문도 전문가도 상담가도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를 걷는 사람을 세상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속으로 하나님은 들어오셔서 관계된 모든 일에 대해 창조주로서의 주권을 발휘하시며 정복하고 다스려 나가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나의 죽음이라는 고백을 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도를 걸었을 뿐인데 나타난 파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종교나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는 사도 바울은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유대종교나 로마제국의 입장이 아닌 사도 바울의 입장을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이고 그것을 허락받은 선민들입니다. 오직 사도 바울이 걸어간 십자가의 도를 따라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아랑곳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시는 동안에 세상이 정복되고 다스려지는 삶을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하시는 하루를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의 길인 십자가의 도를 짊어지고 다니듯 걷게 하여 주심으로써 나타나는 모든 여파와 파장 속의 은혜를 오늘도 만끽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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