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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

녹취문: 하나님 나라 불붙여서 새벽을 깨우자_태승철 (사도행전 25:1~2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1.09.18|조회수42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나라 불붙여서 새벽을 깨우자>의 줄거리:

예수님 믿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삽니다. 믿음의 삶은 예배당 중심의 종교 생활도 아니고, 종교인으로서 세상과 똑같이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냥이나 라이터로 불을 붙이듯이 그렇게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하나님 나라의 불씨를 갖다 대야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삶 전체에 하나님 나라를 불 일 듯하게 하는 불씨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 불붙여서 새벽을 깨우자

(사도행전 25:1~27)

 

10.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대

12.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 불붙여서 새벽을 깨우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나라 불붙여서 새벽을 깨우자’

본문에서는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가 사임하고 베스도가 총독으로 부임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유대인들의 정치적인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때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사도 바울을 증오하고 죽이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베스도 총독에게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와서 재판하기를 요청했지만 베스도 총독은 이를 거절하고 사도 바울에게 의견을 묻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도 바울의 로마행이 결정되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로마 내의 어떤 지방에 있을지라도 지방 관리에게 재판받지 않고 황제에게 재판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로마법을 이용하여 로마행을 결정합니다. 이로써 바울은 유대인 됨과 유대종교로부터 결별을 선언하고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완전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후반부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의 3차 전도여행 때 주된 사역은 에베소였습니다.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서 2년, 회당에서 3개월, 나머지 7개월을 합쳐서 3년 동안을 에베소에서 사역하였습니다. 에베소 사역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 후반부를 아우르는 주제입니다. 우리가 몇 장에 걸쳐 계속 보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유대종교의 종교생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제시된 바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도가 바뀌거나 사회개혁 등으로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에게 임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도 바울을 적대시하는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이 라이벌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바울의 생애를 통하여 전도한 결과로 모든 사람은 종교생활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살게 된다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결론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종교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몇 장에 걸쳐 바울과 종교지도자들과의 대결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단체에 속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혔을 때 예루살렘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도 바울 혼자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맞서는 형국에 있었습니다.

정리해봅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예수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절대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사도 바울을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본문 말씀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복습을 잠깐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도행전은 종교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예언과 방언과 같은 언어의 본질로 생각하고 말하며 살게 됩니다. 예언과 방언의 언어적 특질은 내 안에서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라 나의 바깥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언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언어를 받아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의학적 지식이나 과학적 지식 같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사료되는 지식조차도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것보다 우선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를 산다는 것은 유두고가 죽었다 살아난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이 사건 뒤에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철야강론을 한 뒤에 앗소까지 80리 길을 홀로 걸어갑니다. 유두고를 살리는 대단한 일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이 격앙되고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흥분한 사람들과 결별하고 혼자 80리 길을 걸어가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을 드리며 하늘에서 기쁨을 찾고자 합니다. 유두고를 살린 일에서 기쁨을 찾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동행들이 유두고의 사건으로 인해 격앙되고 상기된 상태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하고자 했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기쁨의 재료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삼는 자들의 삶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땅은 단 한 방울도 좋음과 기쁨의 재료를 생산하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땅을 복지로 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주겠다는 의지의 방향을 굳히고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타인의 진정한 유익을 생각할 때에 복지의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예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언은 미래에 마음을 두고 관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근본 취지입니다. 선지자들이 말한 예언의 주제는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것들을 바라며 산다면 미래는 꿈꾸는 것과 다르게 흉악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언이 등장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미래에 마음을 두지 말고 지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 나라는 종교를 떠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던 사도 바울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정작 로마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총독과 천부장 등은 사도 바울을 보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전도를 한다는 것은 타인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불붙이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장 같은 영역이나 건강이나 과제와 같은 영역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해 하나님 나라가 가동되고 불붙이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타인에게 하나님 나라를 불붙게 하는 불씨를 담고 있는 화로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옛날에 한 집안의 며느리에게 맡겨진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화롯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등불을 켜거나 아궁이에 불을 때는 등의 가정에서 불이 필요한 일들을 위한 불씨를 보존하던 것이 화로였습니다. 그렇기에 며느리가 이 화롯불을 보존하지 못하면 친정으로 쫓겨나는 일까지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과 나라들에게 불을 붙이실 수 있는 불씨를 담고 있는 인격적 화로인 사도 바울을 로마의 행정력까지 동원하여 유대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보존하시고 로마로 인도하시게 됩니다.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유럽전역과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북부까지 뻗어가는 10만km에 이르는 가도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이로부터 나왔습니다. 로마의 중심에는 황제가 거하는 황궁이 있었고 사도 바울은 그 황궁의 감옥까지 옮겨지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화로의 불씨들은 개인에게 불붙게 되고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불씨가 어떻게 한 사람에게 불붙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잣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종잣불이 각 개인에게 옮겨가는 모습은 본문에서 베스도 총독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그립바 왕이 등장합니다. 아그립바는 유대 땅을 다스리던 분봉왕이었고, 베스도는 로마황제로부터 파견되어 지역을 다스리던 총독입니다. 분봉왕은 신분이나 계급은 총독보다 높았지만 로마의 눈치를 봐야했던 입장이었기에 총독과 좋은 사이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은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을 만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90km 정도 떨어진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베스도 총독과 만난 자리에서 사도 바울의 고발에 대한 토론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황제 가이사에게 보내기 위해서는 재판을 요청하는 공소장이 필요했고, 이 공소장에는 사도 바울의 죄목이 기록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이 보기에는 사도 바울은 로마법에 저촉되는 죄를 저지른 적이 없었습니다. 로마인의 상식으로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공소장의 죄목을 기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사정에 해박한 아그립바 왕에게 사도 바울의 죄목을 알려달라는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18~19절을 보면 베스도가 말하기를 “원고들이 서서 내가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혐의는 하나도 제시하지 아니하고 /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가 죽은 것을 살아 있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고발하는 것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벨릭스를 대신하여 총독이 된 베스도가 파악한 바로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한 이유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전파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베스도는 이것을 “또는”이라는 말을 통해 유대종교의 문제와 분리시켜 이해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라 하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전파했던 것은 유대종교에 속한 문제와는 다른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점이 본문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베스도 총독의 입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아직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개인적으로 살고 있는 바울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불씨가 베스도 총독에게 옮겨붙게 되었습니다. 드럼통에 장작 등을 넣고 불을 지피는 모습을 보면 불꽃이 사방으로 튑니다. 그런데 그 불꽃이 닿는다고 해서 다 불이 붙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겨울에 말라있는 풀 등에 불꽃이 닿으면 금세 불이 붙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베스도 총독의 입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담겼다는 것은 불꽃이 옮겨진 것이지만, 그 불꽃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불붙기가 삶의 영역에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까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언어로부터 시작해서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일은 너무나 싱겁고도 우스울 정도로 작은 불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입에 담고 그 죽음과 부활로부터 시작해서 불이 붙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종교나 현대의 기독교종교와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에게 종교생활을 위해 요구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보면 이 일은 실로 간단하기 그지없습니다. 유대종교에서는 안식일과 율법과 규정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기독교종교에서는 예배당 조직이 제시하는 주일성수와 같은 규정들을 지키고 충성 봉사를 요구합니다.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종교생활과는 다르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단어가 입에 담기고, 입에 담긴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로 마음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단어가 핵심입니다. 이것이 이방인 베스도 총독의 입에 담기는 순간 불꽃이 옮겨붙은 것입니다. 드럼통에 장작을 태울 때 옷에 튄 불꽃은 툭툭 털어버리면 사그라질 수밖에 없지만 이 불꽃을 살리면 타오르게 됩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쉽게 사그라지는 불꽃처럼 아슬아슬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 두 단어를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로 받아들일 때 구원은 이루어지고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불꽃이 옮겨붙지 못한 채 사그라진다면 너무나도 아슬아슬하게 어마어마한 축복과 은혜가 기다리고 있는 문앞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이고 나의 부활이라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져 가기 시작합니다. 유대종교나 기독교종교가 요구하는 어떤 것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입에 담은 시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불꽃은 옮겨붙은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로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종교나 예배당이 아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유대종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까지 부르지만 종교로만 머문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도행전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단어입니다. 이것을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개인에게서 시작될 때에 그 모습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배우자를 마주할 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면 하나님의 불씨는 옮겨붙습니다. 이 불씨가 그냥 꺼지느냐 불이 붙느냐는 배우자 앞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단어를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로 바꿀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으므로 배우자가 아닌 하나님께로 가서 기쁨을 찾겠다는 자아의식을 유지한다면 부부관계에 하나님 나라의 불이 붙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께만 기쁨이 있다는 자아의식을 놓쳐버리면 불씨는 옮겨붙지 못한 채로 꺼지고 맙니다. 직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이라는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불꽃을 옮겨 붙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로 받아들이고 세상을 떠난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할 때에 직장이라는 장소에서 하나님 나라는 활활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불꽃은 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의 말을 듣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버립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이고 부활한 자라는 자아의식은 유지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의사와 대면하는 상황과 시간이 하나님 나라로 불붙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불붙으면 의사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은 강하게 임하게 됩니다. 의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의 섭리에 종속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 나라에 불을 붙이게 되면 주변 사람 모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은 나를 중심으로 삼게 됩니다.

 

종교는 나의 나라에 신의 이름을 끌어들여서 구축한 언어체계입니다. 이처럼 나의 나라를 살면서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흑암 가운데 있습니다. 직장에 가서도 20명의 동료와 함께 직장생활을 한다고 하면 20개의 흑암의 나라가 진행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자아의식 속에 받아들이면 나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불이 붙게 됩니다. 그럴 때 흑암 속에 갇혀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발하게 됩니다. 흑암 속에 머물던 사람들에게 광명의 세계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당시 로마는 흑암 속에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도중 고린도에 3개월을 머무는 동안 로마에 편지하였던 것이 로마서입니다. 이로부터 로마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그 숫자는 미미하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의 원형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종잣불을 담고 있는 화로 격인 사도 바울이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로마라는 흑암의 세계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새벽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일은 일어나야 합니다. 배우자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배우자에게 새벽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이고,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하나님 나라를 불꽃처럼 일으키는 것입니다. 배우자뿐만이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 새벽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행을 통하여 흑암의 로마제국에 새벽을 옮겨가게 됩니다. 우리도 오늘 하루 어디를 가든지 흑암 속에 있는 자들에게 새벽을 가져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행은 우리의 삶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반복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흑암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벽을 나르는 사람들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단어를 나의 죽음과 부활로 받아들이는 자아의식을 형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불붙이게 하시고 또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새벽을 알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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